96화. 건안 원년, 여름
장안 미앙궁.
한나라의 옛 황궁이었던 이곳은 훗날 세워지는 자금성의 6배에 달하는 거대한 궁궐이다.
천자 유협과 대사마 이각이 장안을 나선 후, 이 거대한 궁궐의 주인이 된 인물은 평양후 장제다. 본래 서량의 무부(武夫)였으나 창술 하나로 동탁의 눈에 들어 벼락출세한 인물이다.
그러나 미앙궁을 차지한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장제는 미앙궁의 높은 누각에서 분노로 몸을 떨며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장안의 외성을 돌파한 마가군 병사들이 까맣게 몰려들어 미앙궁을 포위한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마가군 병사들은 한 무리씩 모여서 저마다 북과 징을 치며 시끄럽게 성안의 주의를 끌고 있었다.
“역적 이각은 죽었다! 눈으로 직접 보아라!”
“성문을 열어라! 관중도독께서 장안에 입성하실 것이다!”
떠드는 마가군 병사들은 무리마다 높은 장대를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장대 끝에는 능지형을 당해 조각난 이각의 시신 한 토막씩이 매달려 있었다.
그런 장제의 옆에 흰 수염을 기른 나이 지긋한 문관 하나가 나란히 섰다. 문관은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저쪽에는 오른팔. 저쪽에는 왼쪽 발. 그리고 저쪽에 매달린 건… 대사마께서 생전에 쓰시던 장검 같군요.”
“이각이 아무리 패장이기로 어찌 이리도 욕보일 수가 있는가? 이 선생, 저 짐승 같은 놈들이 이제 곧 들이닥칠 것이오. 뭔가 방법이 없겠소?”
“허허허.”
이유, 자는 문우.
본래는 명망 있는 학자였다. 그러나 혼탁한 정치판에 뛰어들고 나서 10년,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순간, 자신은 동탁의 꾀주머니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유는 초조해하는 장제를 보며 그저 허허 웃었다.
“평양후께서는 뭘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우리가 그동안 누릴 만큼 누렸으니, 갈 때가 되면 가는 거지요.”
“제기랄! 이제는 방법이 없다는 말이오?”
“글쎄요.”
이유는 성 밖의 마가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성을 지휘하는 서황이라는 적장의 솜씨가 범상치 않았다. 이제 곧 서황은 장안성을 힘으로 열어젖힌 최초의 무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게다가 마등은 미오성에 있는 양식 백만 석을 얻었다. 앞으로 더 강해지겠지.’
동탁이 죽은 후, 이유는 장제와 함께 홍농으로 피해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이유 자신의 손으로 전 천자 유변을 독살했기에 여러 사람에게 정치적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당금 천자 유협이 형의 복수를 위해 이유의 목숨을 요구했지만, 이각이 유협의 말을 듣지 않아 겨우 살아났던 적도 있었다.
홍농으로 피하면서 장안의 일이 걱정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마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이유도 생각하지 못했다. 장안에는 자신 말고도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 그가 있는 한 이각 정권이 안에서부터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설마 그 가후가 배신할 줄이야. 세상살이가 참 마음처럼 되지 않는군.’
이유는 쓴웃음을 짓고 다시 장제를 바라봤다. 억센 서량 사내는 아직 죽기 싫은 듯했다.
“평양후.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그, 그것이 무엇이오?”
“도망치는 겁니다.”
“뭣이? 이 선생, 장안 인근이 죄다 마등의 손에 떨어지려는 상황인데 대체 어디로 도망친다는 말이오?”
미앙궁을 나서서 도망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도망치고 나서 대체 무슨 수로 재기한다는 말인가?
이유는 흰 수염을 쓸며 대답했다.
“마등이 관중도독이 되면서 관할하게 된 곳이 관중에서는 장안, 풍익, 부풍, 홍농의 4군, 그리고 서량에서는 천수, 안정, 농서, 북지의 4군이지요. 그보다 더 먼 곳으로 떠나면 됩니다. 이를테면 평양후의 고향, 무위군 같은 곳이 있겠지요.”
“무위? 이보오, 서량에서 그나마 큰 고을들은 죄다 마등의 손에 넘어갔소. 내 고향 무위는 장안에서 이천 리나 떨어진 곳이오. 하도 척박해서 한인보다 호인(胡人)들이 더 많다는 말이오.”
“그러니 그 정도 먼 곳으로 떠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선생. 하지만…….”
이유는 뭐라고 말하는 장제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만약을 대비해서 제가 무위태수에게 따로 준비시켜 둔 것들이 있습니다. 이삼 년쯤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마등은 당분간 서량까지 원정을 나설 형편이 되지 못할 테니, 그동안 우리도 재기를 노려보지요.”
“으음… 그게 가능하겠소?”
“해 봐야지요. 죽어야 끝나는 게 서량의 싸움 아니었습니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유의 말을 듣자 장제의 얼굴이 조금씩 펴졌다.
“이 선생의 말이 옳소. 일단 무위로 도망칩시다. 마등과 마초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오 년이든, 십 년이든 참고 견딜 것이오.”
이유는 장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년이나 십 년이라.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가 서량에서 꾸미고 있는 계획이 완성되는 건 대략 삼 년.
삼 년 후에는 다시 장안에 입성하거나, 아니면 서량 어딘가에서 백골이 되어 있을 것이다.
* * *
196년 여름, 장안성.
마초가 근황병을 이끌어 하내 전투에서 승리하고 복파장군의 직위를 받은 후 2년이 지났다.
장안성은 194년 그해를 넘기지 않고 함락되었다. 전사한 곽사, 능지형을 받은 이각에 이어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이각군의 잔당 장제는 장안을 내버려 두고 그대로 도망쳤다. 먼 서량 어딘가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장안으로 떠나기 전, 마초는 미오성에서 올해 안으로 장안성을 함락시키겠다고 호언했었다. 그 말이 실현된 것이다.
장제가 도주한 후, 새롭게 장안성의 주인이 된 것은 관중도독 마등이었다.
마등이 관중도독의 인수를 받고 제일 먼저 내린 포고령은 이것이다.
“올해의 세곡을 면제한다. 또한 미오성에 비축된 양식을 풀 것이니 가을걷이까지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이는 마초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어차피 걷히지도 않을 세곡인데 화끈하게 면제시키십시오. 미오성의 백만 석은 그냥 구휼을 위해 풀어 버리십시오. 백만 석짜리 살림을 하려면 제대로 된 관료 조직이 있어야 하니 어차피 우리에게는 무리입니다. 지금 백성을 최대한 많이 살려야 내년, 내후년이라도 세곡을 거둘 수 있습니다.’
사람이 굶어 죽는 판국이었으니 미오성의 백만 석은 예상보다 빨리 바닥을 드러냈다. 다행히 때맞춰 익주에서 보낸 삼십만 석의 양식이 도착했다. 익주목 유언의 세 아들을 구한 대가로 받아 낸 양식이었다.
밀농사를 접고 수수와 조로 강제로 작물을 바꾸게 한 방침도 주효했다. 가뭄에 강한 수수와 조는 대기근에도 적은 수확이나마 건질 수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2년을 버티자 드디어 기근이 끝났다.
지금 관중 평야에서는 여름 보리의 수확이 한창이었다. 이 보리가 걷히면 백성들은 자기가 농사지은 작물로 생계를 꾸릴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보리가 걷혔군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채 소저.”
한참 동안 들판의 보리 수확을 바라보던 비서랑 나관중이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작은 수레에 탄 채염이 있었다. 채염은 나관중을 바라보며 묘하게 웃었다.
“스승님께서는 천하제일의 문필가십니다. 하지만 언제나 시문보다는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채염은 ‘그런 당신을 존경합니다’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 말은 빼기로 했다. 그런 말은 더 적절한 시기가 오면 할 참이었다.
나관중이 멋쩍게 웃었다.
“글쎄요, 얼마 전까지는 저도 평범한 백성이었으니까요. 몇 번 얘기했었죠? 풍익의 호족 집에서 두부를 만들다 복파장군을 만나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이들은 지위가 높아지면 어려웠던 시절을 잊어버리지요. 하지만 스승님은 달라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저야 뭐 관직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진짜 대단한 건 복파장군이지요.”
나관중은 한참 수확 중인 보리밭을 바라보며 마초를 떠올렸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이각과 곽사가 이때까지 살아서 날뛰었다. 농사는 앞으로 몇 년간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관중 평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전쟁으로 죽어 나갔다. 옛 주나라와 진나라, 전한까지 가장 찬란했던 왕조들이 도읍으로 삼았던 관중 평야는 이각과 곽사로 인해 황무지가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 운명은 마초에 의해 바뀌었다. 마초는 조기에 전쟁을 끝내고 여기저기서 문관들을 잔뜩 데려와서 관중의 복구에 투입했다. 이제 2년이 지나 드디어 보리 수확을 하게 되자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희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공이 살린 목숨이 십만 명을 넘을 것이다.’
나관중은 보리밭을 바라볼수록 감회가 새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2년 전, 아우를 잃고 넋 나간 사람처럼 지내던 회귀자는 이제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영웅이 되었다. 특히 이곳 관중에서 마초는 왕이나 다름없는 명성을 갖고 있었다.
감회에 젖어 있는 사이 두 사람은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장안을 다스리는 관중도독부였다.
* * *
장안성, 관중도독부.
관중도독부는 워낙 바빠서 관중도독과 백관들의 회합도 몇 달에 한 번으로 최소화하고 있었는데, 이날이 바로 그 회합이 있는 날이었다.
마등은 원래 사공부로 쓰이던 건물을 개조해서 관중도독부로 삼았다. 황궁이나 미오성, 대사마의 치소 같은 건물을 쓰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서량의 무장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큰 건물이기는 했는데, 내부는 마등의 취향을 반영해서 실용적이고 조촐했다. 지금 백관들이 모여 있는 회합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긴 탁상이 있고 백관들이 둘러앉아 있을 뿐이었다.
상석에 앉은 마등이 입을 열었다.
“지난 2년간 참으로 노고가 많았소. 이제 드디어 제대로 된 수확을 거두게 되었으니 민생이 빠르게 안정될 것이오.”
백관들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할 것 없이 숨차게 달려 온 2년간이었다. 이각군과 싸우고, 장안에 입성하고, 새로 얻은 높은 벼슬에 취할 새도 없이 모두가 관중 재건에 매달렸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드디어 성과가 나오고 있었다.
백관들이 관중도독 마등에게 업무를 보고했다. 중간쯤 비서랑 나관중의 차례가 됐다.
“채옹 선생의 저작들을 복원하는 작업도 8할 정도 진척되었습니다. 여기 있는 채염 소저가 도와주고 있습니다.”
나관중은 본래 마초 휘하의 마궁수였지만, 천자를 호종하며 큰 공을 세운 뒤 황궁의 장서들을 관리하는 비서랑 벼슬을 받았다. 천자가 장안에 남겨 놓고 간 막대한 서책과 자료들이 그의 관할이었다.
장안의 선비들은 처음에는 웬 이름 없는 자가 비서랑이 되었나 하고 뜨악하게 생각했으나, 나관중의 시와 글씨를 몇 점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 나관중의 이름은 장안의 명문장가로 알음알음 중원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마등은 그런 나관중을 보고 물었다.
“학술 쪽은 이제까지처럼 황보 복야, 순 별가와 의논해서 처리하게. 그보다 다른 쪽은 어떤가?”
마등이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관중의 ‘다른 쪽’ 업무, 그가 지닌 미래의 지식으로 원나라 때의 문물을 도입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어린 시절 도를 깨우친 신선에게 배운 것이라고 적당히 둘러대고 있었다.
“안장과 마구의 개발은 이제 끝났습니다. 지금 원정을 떠나 있는 복파장군이 실제로 써 보면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마등이 반문했다. 문관과 무관을 막론하고 자리에 모인 관리들 모두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나관중은 모두의 기대에 찬 시선을 받자 씩 웃으며 품속에서 술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소주의 개발에도 성공했습니다. 탁주를 불로 끓여서 만든, 독하고 향기로운 술입니다. 한 수레를 끌고 왔으니 이 술로 보리가 걷힌 것을 축하하시지요.”
“우와아아!”
“으아아아!”
백관들 사이에서 괴성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격무에 시달리는 것은 참을 수 있다. 칼날과 화살이 빗발치는 것도 참을 수 있다. 배고픔과 추위도 견뎌 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기근이라 먹을 곡식도 모자라니 술 빚을 곡식이 있었을 리 없다. 술 없이 기근을 버티며 잔뜩 독이 올라 있던 관리들은 나관중이 향기로운 술을 잔뜩 가져왔다는 소리를 듣자 다들 환호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