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두 명의 준걸
후한 흥평 원년(194년) 늦은 가을, 낙양에서의 일이 마무리되자 마초 일행은 장안으로 향했다.
마초는 장안에 잠입한 후 천자를 낙양까지 데려오며 수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끝내 근황병을 결성해서 장수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공으로 마등은 무릉후, 거기장군, 관중도독이라는 높은 관직을 받고 마초는 복파장군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마가군에 부족했던 문사들을 다섯 명이나 얻었으니 황보력, 배잠, 왕관, 두기, 그리고 채염이 바로 그들이었다.
떠나는 마초를 낙양 외곽까지 전송한 것은 조운이었다. 그는 천자의 목숨을 구하고 하내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일로 천자의 친위대장인 우림중랑장 벼슬을 얻었다.
“자룡, 지금 헤어지면 앞으로 몇 년간은 볼 수 없겠군. 적당한 때가 오면 다시 만나세.”
“맹기, 상산에서 의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나를 폐하께 천거한 것도 자네일세. 항상 자네의 건승을 기원하겠네.”
우림중랑장 조운과 복파장군 마초.
천자의 측근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두 무장은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다.
상산에서, 그리고 하내와 낙양에서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은 석 달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삼십 년간 교분을 쌓은 친구처럼 서로를 신뢰하고 있었다.
조운과 헤어지고 장안으로 가는 길에 마초의 옆으로 나관중이 다가왔다.
“주공, 장안은 아직 공성 중이라고 합니다.”
“지금 장안을 지키는 장제도 만만치 않은 자다. 하지만 서황이 공성하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들리겠지. 아마 우리가 장안에 닿기 전에는 장안성이 떨어질 것이다.”
이각이 죽은 시점에서 승패는 이미 기울었다. 남은 것은 시간일 뿐이다. 그러니 마초는 서둘러 돌아가지 않고 낙양에서 할 수 있는 문사 등용에 집중했었다. 앞으로 관중을 재건하려면 문사들을 모으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필요로 했던 다섯 명의 문사는 전부 얻었습니다. 이제 두 명의 준걸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사실 두 명의 준걸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 너에게는 채 소저가 가장 중요할 것 같은데?”
마초가 놀리자 나관중의 표정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채 소저와는 그냥 같이 글을 쓰는…….”
“으하하, 잘 꼬셔보라고. 이제 비서랑 벼슬을 받았으니 살림도 넉넉하잖아? 시비를 여러 명 들일 테니 채 소저는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고 글만 쓰면 된다고 해 봐.”
마초는 그 뒤로도 나관중의 연애에 이런저런 참견을 했다. 그러나 중년 남자의 연애 참견이 늘 그렇듯 아무 쓸데 없는 말들이라 나관중은 마초의 조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마초가 그렇게 한참 떠들고 나서야 화제는 다시 두 명의 준걸로 돌아왔다.
“두 명의 준걸 중 한 명은 먼 형주에 있는데, 우리 서찰을 받고 움직여 줬으면 좋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황보숭 대도독의 추천장을 그 사람에게 보냈으니 말이지요.”
“그 사람이 우리에게 온다면… 추천장을 써 준 황보 대도독을 정말 은인으로 모실 텐데. 뭐 지금도 은인이긴 하지만.”
* * *
형주 양양군, 수경장이라고 불리는 저택.
후줄근한 농사꾼 차림의 중년 사내가 손수레를 끌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대문 옆의 하인들이 농사꾼 차림의 사내를 알아보고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양옆으로 비켜섰다. 그중 몇몇이 달려 나와 손수레 끄는 것을 도우려 했으나 농사꾼 차림의 사내는 손사래를 치며 직접 손수레를 끌고 저택 안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대청 가까이 오자 동자 하나가 농사꾼 차림의 사내에게 공손하게 절하며 말했다.
“오늘은 순 선생께서 와 계십니다.”
“공달이? 무슨 일이라더냐?”
“작별 인사를 하신다고 합니다.”
“허허, 공달이 마음을 정했군. 알았다.”
농사꾼 차림의 사내는 허허 웃으며 대청으로 향했다. 그를 찾아온 손님은 대청 밖에서 서성이다 농사꾼 차림의 사내를 보자 두 손을 모아 인사를 올렸다.
“수경 선생님. 오늘은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허허, 일단 좀 앉도록 하세.”
수경 선생이라고 불린 중년 사내와 순 선생이라고 불린 사내가 간단한 주안상을 놓고 마주 앉았다. 안주로는 오늘 수경 선생이 밭에서 수확해 손수레에 가득 싣고 온 작물이 나왔다.
사마휘, 자는 덕조.
수경장의 주인인 농사꾼 차림의 사내는 인근에서 수경 선생이라고 불리는 이름 높은 선비였다. 재산도 많고 명성도 높은 그였지만 직접 밭을 가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사마휘가 맞은편에 앉은 사내에게 안주를 권하며 말했다.
“순무일세. 흔하디흔한 작물이지만 이 난세에는 참으로 귀한 작물이지.”
“순무는 뿌리부터 잎까지 다 먹을 수 있으니까요. 맛도 이만하면 훌륭합니다.”
순유, 자는 공달.
사마휘의 앞에 마주 앉아 순무를 안주로 술을 들이켜고 있는 30대 후반의 선비는 원래 낙양 조정에서 황문시랑 벼슬을 지내던 관리였다.
순유는 삼국지연의를 통해 남겨진 흐릿한 인상과는 달리, 원래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죽음의 위기에 처했으나 동탁이 때맞춰 여포에게 죽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된 풍운아다. 이후, 익주의 촉군태수로 부임하려 했으나 익주목 유언에 의해 익주와 형주의 교통이 끊어져서 형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래, 작별 인사를 한다는 걸 보니 공달 자네가 마음을 정했나 보군.”
“그렇습니다. 내일 떠나려 합니다.”
“허허, 천하에 자네의 재주를 원하지 않는 군웅은 없을 걸세. 그래, 원본초인가? 아니면 조맹덕인가? 자네 친척 어르신이 조맹덕 휘하에 있다고 했으니 아마 조맹덕일 것이라고 생각은 하네만.”
“둘 다 아닙니다.”
“오호.”
허허 웃는 상으로 가늘게 뜨고 있던 사마휘의 눈이 번쩍 빛났다.
“관중도독, 마수성입니다.”
“어째서인가? 자네는 마등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 또한 동탁의 벼슬을 받았던 자라고.”
사마휘는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순유를 봤다.
“황보숭 장군의 추천장이 왔습니다. 마등과 그 아들 마초의 재주와 충심을 보장한다고 하는군요. 황보숭 장군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자라면 믿을 만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잘 생각했네. 관중도독 마등이 날개를 달았군. 그에게는 서량의 강병이 있고, 관중의 넓은 땅이 있으나 천하를 아우를 만한 큰선비가 없었네. 이제 자네를 얻었으니 앞으로 천하를 손에 쥐는 건 마등일지도 모르겠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제가 가진 재주는 대단치 않습니다. 당장 수경 선생님 문하에도 총명한 소년들이 한두 명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야말로 천하를 아우르는 큰선비로 자라날 것입니다.”
사마휘의 칭찬에 순유가 겸양의 말을 했다. 그는 남에게 주목받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겸손이 몸에 배 있었다.
사마휘는 그런 순유를 보며 허허 웃었다.
“내가 복이 많아서 문하에 똘똘한 녀석들을 많이 거두기는 했지. 그래도 아무렴 자네에 비길 수 있겠나.”
빈말은 아니었다. 형주 일대의 수재들을 모아서 가르치고 후원하는 사마휘가 보기에도 순유는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단순히 글줄 외는 선비가 아니었다. 조용한 성품과는 달리, 정치와 군략에 밝아서 난세에 더욱 빛날 만한 인물이었다.
‘순공달을 뛰어넘을 만한 인물은 천하를 다 뒤져도 찾기 힘들 것이다. 굳이 찾자면…….’
사마휘는 얼마 전, 서주에서 피난 온 소년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는 사서삼경보다 대장장이나 목수들의 기술에 더 관심을 보이는 괴짜였다. 요즘 괴짜 소년이 푹 빠져 있는 건 농사였다.
순유와 사마휘는 그날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작별의 정을 나눴다.
순유가 돌아가고 난 후, 해 떨어진 수경장에 그 괴짜 소년이 찾아왔다. 소년은 사마휘가 끌고 온 것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순무가 실린 손수레를 끌고 있었다.
“이 녀석아, 이때까지 밭에서 순무를 거둔 거냐?”
“예, 선생님. 순무 농사가 어찌나 재미있는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더군요.”
“순무가 뭐라고 그리 재미있더냐?”
“순무는 두 달이면 다 자라니 어린아이도 기를 수 있을 만큼 농사가 쉽습니다. 그러니 어찌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허허, 원 녀석도 참…….”
괴짜 소년은 사마휘를 향해 씩 웃어 보이고는 손수레를 내려놓았다.
소년은 어두운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등에는 오늘 수확한 순무 한 망이 들어 있었다. 소년은 순무를 씹으며 혼잣말을 했다.
“의원들의 말에 따르면, 군사들이 오랫동안 채소를 먹지 않으면 탈이 난다. 만약 둔전마다 채소를 키운다면 군문의 병을 막을 수 있겠지. 두 달 만에 거둘 수 있는 이 순무가 가장 적합하다.”
소년의 관심사는 입신양명이나 출세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소년은 농사일을 하면서 군량을 생각하고, 대장간 일을 하면서 병기의 개량을 생각하고, 목수들의 일을 하면서 험로에서 군량을 수송할 수 있는 수레를 생각했다.
마치 나중에 승상이라도 될 것처럼.
“언젠가는 그와 싸워야 하니까.”
소년의 고향을 폐허로 만든 자.
15세의 제갈량은 조조를 생각하며 다시 한 입 순무를 베어 물었다.
* * *
사례주 부풍군, 법가장이라고 불리는 저택.
본래 이곳의 주인은 관중의 대학자 법진이었다. 법진은 스승을 두지 않고 공부했으나 고금의 수많은 서책에 통달했으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들어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법진의 사후에도 이 저택은 문객들로 북적거렸으나 동탁과 이각의 서량 군벌 정권을 거치며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선비들도 당장 내일 먹을 양식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으니 학문을 탐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법가장에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복파장군 마초올시다.”
마초를 맞이한 법가장의 지금 주인은 법진의 손자로 이제 스무 살 정도의 젊은이였다. 마초가 지난 생에서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법정, 자는 효직. 복파장군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무사히 흉년을 견디고 있습니다.”
법정은 공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태도로 인사했다. 마초는 진지하게 법정에게 답례했다.
“만약 내가 양식을 보내지 않았으면 어쩌시려고 했소?”
“익주로 피난을 갔겠지요. 돌아가신 할아버님께서 유 익주와 교분이 좀 있으셨습니다.”
“익주가 살기는 좋지. 그래, 효직은 오늘 내가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시겠소?”
“임관을 제의하러 오셨겠지요.”
“이제부터 우리 마가군은 관중을 재건해야 하오. 이각이라는 놈 때문에 관중이 하도 엉망진창이라 엄청나게 힘든 길이 될 것 같더군. 그래서 효직의 도움이 필요하오.”
“도움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도움이오. 관직은 파격적으로 높은 관직을 드리겠으나 그게 의미가 없을 만큼 힘든 과업이오. 그러니 이것은 제의가 아니라 나의 부탁이오. 효직께서 수고로움을 사양하지 말고 관중을 재건하는 것을 도와주시오.”
법정은 머리가 비상하지만, 성격이 까탈스럽다. 마초는 지난 생에서의 경험을 통해 법정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놈은 성질이 더러워서 협상이 잘 안 통한다. 하지만 이렇게 먼저 은혜를 베풀고 부탁하는 척하면…….’
넘어올 것이다. 예상대로 법정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법가는 은혜도 원수도 잊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복파장군께서는 저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개와 말의 수고를 피하지 않고 그 은혜를 갚겠습니다. 관중도독부에 출사하겠습니다.”
법정은 은혜와 원한을 세세하게 따지는 성격이라고 역사서에 기록이 남았다. 마초가 기억하는 법정의 모습도 어지간히 까탈스러운 성격이었다.
하지만 자존심을 세워 주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이런 자들의 특징이다.
‘하여튼 세상 피곤하게 사는 놈이군.’
마초는 속으로 픽 웃었다.
“잘 생각하셨소. 이제부터 군사장군으로 거기장군부의 사무를 맡아 보시오.”
“군사장군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 당분간은 내정에 주력할 수밖에 없겠지만, 결국 내가 효직에게 기대하는 것은 군략이오. 군문에 빠르게 익숙해져서, 언젠가 우리가 중원에서 큰 싸움을 하는 날…….”
마초와 법정의 눈이 마주쳤다.
“그대의 군략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