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탄정전감국화(歎庭前甘菊花)
“소저를 내 첩으로 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마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채염은 계속 심드렁한 표정을 한 채 대꾸했다.
“저보고 계속 글을 쓰라고 하셨지요.”
“그렇소.”
“그러니까 첩이 되겠다는 겁니다.”
“무슨 소리요?”
“복파장군은 사내입니다. 그것도 높은 재주와 귀한 신분을 가지고 태어난 사내입니다. 그러니 제 처지를 짐작하실 리 없지요. 한의 여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내의 딸, 어떤 사내의 누이, 어떤 사내의 내자로만 이름을 남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혼처가 필요하다는 건가. 혼처라면 나중에 좋은 선비를 물색해 드리겠소. 채 소저의 의향을 가장 크게 반영해서 말이오.”
“저 때문에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는 싫습니다.”
“왜 불행해진다는 거요?”
“저는 평생 책 읽고 글 쓰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정실부인으로서 도리를 다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명성을 이용해서 적당한 혼례 상대를 구할 수야 있겠지요. 그러면 그 상대는 집안일을 하지도, 아이를 갖지도 않는 정실과 함께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자식도 서자밖에 가질 수 없겠지요. 정실은 책 읽고 글 쓰는 일에만 빠져 있으니까.”
채염의 말을 듣자 마초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이 시대의 사회 통념상 여인이 혼자 살아가는 것은 극히 어렵다. 그러니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 줄 남편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사도, 출산도, 육아도 할 생각이 없으니 정실부인이 된다면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 주는 남편을 불행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남은 방법은 한 가지. 첩으로 사는 것이다. 이 시대에 여인의 몸으로 학문을 하겠다는 건 그 정도의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채염이 이어 말했다.
“저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학자 채옹의 딸을 첩으로 들일 만한 지위와 재산이 있는 자, 제가 학문에만 몰두해도 괜찮을 만큼 형편이 넉넉한 자가 천하에 복파장군 말고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채염이 가진 고뇌는 사내들의 그것과는 또 다른 묵직한 것이었다. 마초는 할 말을 찾기 어려워서 그저 차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역사에서 채염은 내년에 흉노 선우의 아들, 표에게 납치당해 흉노의 땅으로 가서 흉노 족장의 첩으로 12년간 살게 된다.
그것은 단지 불행한 우연이었을까? 어쩌면, 유력자의 첩이 되지 않으면 꿈을 펼칠 수 없는 채염이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은 아니었을까? 지금에 와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때는 음력 9월이라 어느새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차는 그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채 소저에게도 딱한 사정이 있었구려.”
“복파장군께서 먼저 솔직하게 말해주셨으니 저도 솔직하게 얘기하지요.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복파장군께서 저를 첩으로 들여 주시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무엇을 주겠다는 말이오?”
마초가 물었다. 대답하는 채염의 표정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미색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안지도 못하는 첩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단, 자식은 안 됩니다. 저는 글을 써야 하니까요.”
너무나 무거운 얘기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채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초가 입을 열었다.
“거절하오.”
“예?”
채염의 눈썹이 꿈틀했다. 표정이 처음으로 변한 것이다.
“나는 첩을 들일 생각이 없소. 그러니 소저의 청은 들어드릴 수 없소. 말을 바꿔서 미안하군. 그러나 그 외에는 모든 편의를 봐 드리겠으니 부디 장안으로 같이 가 주시길 바라오.”
고대의 귀족들에게 두세 명의 첩은 흔했다. 게다가 지금은 전란의 시대다. 숱한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죽었으니 첩이 되는 경우는 더욱 많았다.
그러니 채염도 마초가 첩을 들일 생각이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복파장군, 뭐가 문제죠?”
“내가 혼인한 지 불과 1년이 조금 넘었고 아직 아이도 없소. 이 상황에서 첩을 들였다가는…….”
정실부인이 철퇴로 우리들의 머리통을 깰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여튼 소저를 위한 일이니 그런 줄 아시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장안으로 가는 건 무리겠군요.”
솨아아아—
잔뜩 흐려 있던 하늘은 이윽고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여름에는 그토록 내리지 않던 비가 농사가 다 파하고 가을이 되니 종종 쏟아졌다. 축축한 한기가 몸을 파고들었다.
마초와 채염의 대화를 지켜보던 나관중은 마음이 급해졌다. 마초에게 몸을 기울여 작은 소리로 물었다.
‘주공, 채 소저를 이대로 두고 갈 생각이십니까?’
‘어쩔 수 없잖아. 본인이 가기 싫다는데.’
‘채 소저를 이대로 두면 흉노에게 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원래의 역사에서처럼요.’
‘흉노에게 끌려가는 게 태양부인에게 철퇴로 맞는 것보다는 낫겠지. 내 마누라 성질머리 알잖아? 혼례 1년 만에 첩을 들이면 가만히 있겠나?’
‘으음…….’
채염은 흉노의 땅에서 거친 삶을 살며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과 같은 처연하고 아름다운 명시를 남긴다. 그녀가 남긴 시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인생이 불행했다는 것이다.
나관중은 그 사실을 바꿔주고 싶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채 소저가 일단 장안으로 가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아무 남자의 첩이나 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채염과 마초가 쏟아지는 가을비를 바라보며 침묵에 빠진 그 잠시 동안, 나관중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이 사람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애초부터 무관심한 사람은 설득할 수 없다.’
나관중은 먼저 채염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기로 했다. 각양각색의 꽃들로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에 스산하게 가을비가 내리는 장면을 보자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채 소저, 듣기로 채 소저께서는 칠현금의 명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채염은 그제서야 나관중 쪽을 돌아봤다.
“그런데요?”
“지금 한 곡을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시문을 조금 할 줄 아는데, 채 소저의 말씀을 들으니 시가 한 수 떠올랐습니다. 칠현금 가락에 맞춰서 한 수 남기고 가겠습니다.”
“나 선생께서는 뭐 얼마나 대단한 시를 읊으려고 그러시나요?”
“일단 듣고 판단하시지요. 칠현금을 타는 수고가 아깝지는 않으실 겁니다.”
나관중이 전에 없이 단호하게 말하자 마초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나관중이 왜 그렇게 자신감에 차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관중, 예전에 들려줬던 그 미래의 유명한 시인들 시를 읊으려는 거지? 누구 시를 읊을 생각인가? 도연명? 소동파?’
‘두보입니다.’
채염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피식하고 비웃는 듯 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귀찮은 손님을 어서 보내려는 듯, 채염은 칠현금을 가져와 앉아서 현을 튕겼다.
“자, 그럼.”
나관중은 채염이 타는 칠현금의 가락에 맞춰 시를 읊었다.
처마 앞의 감국화는 옮겨 심을 시기가 늦어(簷前甘菊移時晩).
중양절에도 푸른 꽃술을 꺾지 못하네(靑蘂重陽不堪摘).
내일 아침 차가운 날씨에 취흥이 깨면(明日蕭條盡醉醒).
남은 꽃 만발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殘花爛漫開何益).
울타리 너머 들판에 여러 꽃들 많은데(籬邊野外多衆芳).
가늘고 작은 꽃 꺾어 중당 위로 오르네(采擷細瑣升中堂).
생각하면 감국화는 공연히 크고 무성하여(念玆空長大枝葉).
뿌리 내릴 곳 잃고 풍상에 얽히는구나(結根失所纏風霜).
“오호.”
나관중의 시를 듣자 마초는 씩 웃었다. 그는 시문을 잘 모르지만 그런 그가 들어도 멋진 시라는 것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나관중은 시를 다 읊고 채염을 바라봤다. 채염은 마지막까지 칠현금을 튕겨 아름다운 가락으로 후주를 넣고 연주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나관중은 그런 채염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은 시성(詩聖) 두보다. 채 소저 또한 이 시대의 이름난 시인이니, 두보의 시를 듣는다면 놀라지 않을 리 없다.’
두보는 시인 중의 시인이다. 시를 쓰는 자가 두보의 시를 처음 들었다면 태도가 바뀔 수밖에 없다. 지금 채염의 머릿속은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분야는 다르지만 나관중 또한 글을 쓰는 자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다.
나관중은 이렇게 채염의 주의를 자신에게 잡아끈 후, 다시 한번 조곤조곤 설득할 셈이었다.
‘채 소저는 아마 나를 천재 시인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면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런데 채염의 반응이 나관중의 생각과 좀 달랐다.
채염은 말을 잊은 듯 멍한 눈으로 가을비가 내리는 정원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채 소저?”
나관중이 부르자 채염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니, 채 소저!”
나관중과 마초가 당황하여 서로 마주 보았다. 채염의 눈에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던 눈물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채염은 몇 번 눈물을 닦아내다 이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울리면 어떻게 해!”
“아니, 제가 이럴 줄 알았습니까!”
두 남자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어찌할 줄 모르고 서로에게 버럭 소리만 지르는 동안 채염은 계속 눈물을 쏟았다.
나관중이 읊은 시는 두보의 탄정전감국화였다. 두보는 이 시를 통해 중당 안으로 드는 가늘고 작은 꽃들을 당나라 조정의 소인배들에, 아름답지만 가지가 크고 잎이 무성하여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감국화를 군자의 풍모를 가진 선비들에 비유했다고 여겨진다.
펼칠 수 없는 재능은 가진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채염은 ‘지나치게 크고 무성한’ 감국화에서 자신의 처지를 본 것이 아닐까.
잠시 후 눈물을 그친 채염이 그새 퉁퉁 부은 눈을 들어 나관중을 바라봤다.
“나 선생.”
“아, 말씀하십시오, 채 소저.”
나관중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젖은 눈을 한 채염의 모습은 심드렁한 표정을 했을 때보다 더 아름답게 보였다.
채염은 처음의 도도한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말했다.
“어떤 시라도 좋으니 한 수를 더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나관중은 그 뒤로 두보의 시 몇 편을 더 읊었다.
시로서 성인의 반열에 오른 자, 고금 제일이라고 불리는 시인의 문장이다. 채염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시 속에 빠져들었다.
나관중이 시를 끝맺자 채염은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눈으로 나관중을 바라봤다.
“이제까지 저는 제가 대단한 재능을 가진 줄 알았습니다.”
“채 소저의 재능은 충분히 훌륭합니다.”
“나 선생의 시를 들어보니 제 재능은 별것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나 선생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 제 청을 들어주신다면 선생을 따라 장안으로 가겠습니다.”
채염은 이번에는 마초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나관중만 바라보고 말했다.
“어… 그… 무엇입니까?”
“저를 제자로 삼아 주십시오.”
“예?”
이번에는 나관중이 경악했다.
“제자라고 대단한 것을 요구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제 글을 보고 평가해 주시고, 선생의 시를 들려주십시오. 시를 들어보니 알겠습니다. 선생께서 아직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틀림없이 천하제일의 시인입니다. 아니, 어쩌면 고금 제일의 시인으로 남을지도 모르지요.”
“그, 그건…….”
사실은 사실이다. 오늘 나관중이 읊은 시들은 진짜 고금 제일 시인이 지은 시였으니까. 다만 그 시인이 나관중 자신이 아닐 뿐이다.
“선생의 시를 들어보니 저도 욕심이 생겼습니다. 선생과 교류하면서 좀 더 나은 문장을 갖고 싶습니다. 선생께서 계신 곳으로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측실 자리는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지요. 저를 첩으로 삼을 만한 사내는 찾다 보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 스승이 되어 줄 만한 시인은 천하에 선생밖에 없으니까요.”
나관중은 잠시 고민했다. 이렇게 남의 작품을 자신의 것처럼 발표하는 짓을 해도 될까?
그러던 그는 채염의 눈망울과 입술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살면서 이렇게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채 소저의 문장이 대성하는 것을 돕겠습니다.”
채염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관중을 향해 꾸벅 절을 올렸다.
“채염이 스승님을 뵙습니다.”
나관중은 당황해서 맞절을 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마초는 뭐가 그렇게 웃긴 지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