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다섯 명의 문사 (2)
마초는 새로 얻은 배잠에게 어서 신변을 정리하고 오도록 했다. 장안으로 떠날 때 아예 데려갈 참이었다.
배잠이 나가자 나관중이 말했다.
“배잠은 겉모습은 저래도 좋은 인재입니다. 이번에 얻어서 다행입니다.”
“그래. 천하에 좋은 인재야 많지만, 지나치게 명성이 높은 인물은 우리 서량 군벌에게 합류하려고 하지 않겠지. 저 배잠처럼 재주는 있지만, 아직 빛을 못 보고 있는 인재를 미리 선점하는 게 우리에게 적합한 방식일 것이다.”
“마침 그런 사람이 또 한 명 찾아와 있습니다.”
“들라 이르게.”
황보력과 배잠에 이어 세 번째 문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열서너 살밖에 돼 보이지 않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공손한 태도로 마초에게 절을 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왕관, 자는 위대. 연주 동군에서 복파장군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마초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방으로 들어온 소년을 맞았다.
“연주에서 이 낙양까지 오느라 먼 길이었겠구나. 그래, 오는 길에 불편함은 없었느냐?”
“복파장군의 큰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몸의 수고로움을 돌보겠습니까? 지금 연주에는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식량이 부족한데, 복파장군께서 보내주신 식량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복파장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하하, 총명하구만!”
마초는 또박또박 대답하는 왕관을 보며 껄껄 웃었다.
원래의 역사에서 왕관은 조조 휘하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조비의 대에 이르러 탁군태수의 직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선비족의 침입을 억제한 일이 유명하다. 왕관은 검소하고 청렴하며, 훗날 벼슬이 삼공(三公)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렵게 살아가는 소년일 뿐이지.’
마초는 그런 왕관에게 양식을 보내 호의를 베풀고 관중도독부로 출사하기를 권했다. 왕관이 유명해지기 전에 선점하려는 것이다.
“위대(왕관의 자), 네 나이가 아직 어리지만 범상치 않은 그릇이라는 걸 알겠다. 우리와 같이 장안으로 가는 게 어떠냐? 가서 5, 6년간은 공부를 더 하고, 나이가 차면 출사할 수 있도록 현령 자리를 만들어주마.”
마초는 왕관을 현령부터 시작하게 해서 나중에는 태수로 쓸 계획이었다. 마초의 제의를 받은 왕관이 깊이 머리를 숙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복파장군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관은 촌음을 아끼며 공부하여 복파장군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하하하, 이녀석, 하하하!”
마초는 왕관의 등을 두들겨 주고 물러가게 했다.
이제 황보력, 배잠, 왕관에 이어 네 번째 문사를 만날 차례였다.
네 번째 문사는 이미 찾아와 있었는데, 이번에는 마초도 조금 긴장한 듯했다. 마초는 의관을 정제하고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방을 서성이며 말할 내용을 정리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나관중이 물었다.
“주공, 괜찮으십니까?”
“아아, 그래. 지난 생에 인연이 있는 사람을 만나려니 조금 마음이 쓰이는군.”
이번에 만날 사람은 예주 영천군에 머무르고 있는 선비였다. 그리고 그는 지난 생에서 마초가 조조와 싸울 때, 조조의 편에 서서 마초에게 패배를 안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오늘은 그에게 어려운 자리를 제안해야 한다. 마초는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그 인물이 들어왔다. 땅딸막한 체격에 큼직한 얼굴을 가진 서른 살 정도의 남자였다. 그는 약간 어수룩해 보이는 몸짓으로 마초에게 꾸벅 절을 하고 자기를 소개했다.
“두기, 자는 백후. 난리를 피해 영천의 친구 집에서 소일하고 있던 서생입니다. 복파장군께서 부르셔서 왔습니다.”
“두 선생. 참으로 만나고 싶었소.”
마초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두기를 바라봤다.
두기는 어려서부터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선비였다. 장안에서 공조라는 낮은 벼슬을 하면서 지인들에게 ‘나는 태수의 자리라면 잘할 수 있다’고 떠들고 다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조조에게 등용되어 고향인 하동에서 진짜로 태수직을 수행하게 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감한 장수나 뛰어난 책사가 아니라 탄탄한 보급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내가 조조에게 패했을 때, 조조군 최고의 공로자가 바로 이 자다.’
두기는 하동군의 민생을 안정시키고, 조조군의 군량을 마초와의 최전선으로 수송해서 보급을 원활하게 했다. 두기의 뒷받침이 아니었다면 조조는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마초가 거병하자 사례주 일대의 군현들이 마초에게 호응해 반란을 일으키는 가운데, 두기가 다스리는 하동만은 아무도 마초에게 가담하지 않았다.
‘보급선을 아무리 끊어도 어디선가 보급이 왔었다. 뒷공작을 아무리 해도 하동만은 호응하지 않았었다. 이 자가 비록 어수룩해 보이지만 태수로서의 자질은 분명히 천하제일이다. 이 자와 전쟁을 치러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이 시대, 천하제일의 재상이라면 제갈량이 있다. 천하제일의 무장이라면 관우, 장비, 여포 등이 꼽힐 것이다. 그리고 천하제일의 지방관으로 꼽힐 만한 인물은 두기, 소칙, 임준 등이 있다. 마초는 그중에서도 직접 능력을 경험해 본 두기를 첫손으로 꼽고 싶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두기는 그저 미심쩍은 표정으로 마초를 바라볼 뿐이었다.
“복파장군께서는 약관의 나이에 천하에 이름을 떨친 영웅이십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 같은 무명의 서생을 부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초에게는 기이한 재주가 있어서 무명의 선비를 보면 그릇을 짐작할 수 있소이다. 두 선생에 대한 소문을 들었소. 공조의 자리는 너무 작지만 하동태수라면 잘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다니셨다지요?”
“그렇습니다. 하동태수 정도의 자리라면 아마 제가 천하의 누구보다 더 나을 겁니다.”
두기는 솔직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자신의 그릇에 대해 평가했다. 마초는 웃으며 물었다.
“선생의 재주가 뛰어난 것은 나도 익히 알고 있소. 그런데 어째서 하필 하동태수요?”
“저는 외모도 단정하지 않고 가문이 한미하지만,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의 삶을 살피는 재주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습니다. 하동은 황하를 끼고 있고 풍부한 소금 광산이 있으니 저처럼 백성을 살피는 재주가 있는 자가 태수로 적합합니다. 하동은 20개 현으로 이루어진 큰 고을이니 제가 맡아서 황하의 물길만 잘 살피면 십만대군을 먹일 양식도 댈 수 있습니다.”
두기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을 듣자 마초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나 또한 선생의 말에 대체로 동감하오. 그러나 한 가지, 선생이 틀린 게 있소.”
“무엇입니까?”
“선생의 재주는 고작 1개 군, 20개 현을 다스릴 재주가 아니오.”
“예?”
“3개 군, 33개 현을 맡아 보시오. 관중도독의 휘하에서 장안, 풍익, 부풍의 3군 태수직을 동시에 맡는 것이오. 관직 이름은 삼보윤 정도로 하면 좋겠군.”
지금 장안, 풍익, 부풍은 2년째 계속되는 기근에 이각의 수탈 때문에 폐허가 되어 가는 참이다. 이런 곳을 재건하려면 최고의 지방관이 필요하다. 그래서 선택한 게 두기였다.
마초는 그에게 관중 재건의 실질적 책임자 역할을 맡길 셈이었다.
“아니, 복파장군. 저 정도에게 맡기기에는 자리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그래서 못 하시겠다는 거요?”
“저야 하고 싶지요. 그런데 왜 하필 저입니까?”
마초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놀랄 만도 한데 두기는 여전히 남의 일처럼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마초는 두기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선생이 철저한 무명이기 때문이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삼보는 지금 폐허나 마찬가지요. 기근은 아마도 내년까지 이어질 것이오. 그러니 지금 삼보윤으로 부임하는 태수의 고초가 어떻겠소? 명문가에서 정원의 화초처럼 자란 이름난 선비에게 맡길 만한 일이 아니오. 선생처럼 능력은 완벽하게 갖췄으면서도, 철저히 무명이라 큰 자리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선비에게 맡기는 게 가장 낫소이다.”
마초는 그저 솔직하게 말했다.
두기는 이번에도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하긴, 그런 힘든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은 저밖에 없기는 하지요. 하겠습니다, 삼보윤.”
두기는 그렇게 말하고 마초를 빤히 쳐다봤다. 마초는 잠시 두기를 마주보다 이내 그 속뜻을 깨닫고 기가 막혔다.
그러나 두기의 실력을 아는 마초로서는 두기의 바람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마초는 두기의 앞에 포권하고 고개를 숙였다.
“두 선생의 결단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이 초와 관중도독과 관중 백성들의 큰 복이외다.”
두기는 마초가 먼저 감사 인사를 하자 천연덕스럽게 포권하며 답례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기의 재주는 능히 삼군을 안정시킬 만하니 복파장군과 관중도독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할 것입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자신을 두고 ‘비록 재주 없으나…’ 같은 겸양의 말과 함께 인사를 한다. 그러나 두기는 끝내 겸손한 말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역량이면 충분하다고 남 얘기처럼 말하고 떠났다.
두기와의 문답을 지켜본 나관중은 기가 막혀서 마초에게 말했다.
“주공, 저자도 정상은 아니군요.”
“그러게 말이야. 능력이 그렇게 뛰어난데도 삼공은커녕 구경(九卿)도 못 해본 이유를 알겠군.”
“역사서에 따르면 나중에 황제가 된 조비에게도 할 말을 다 했다고 합니다. 조비는 수틀리면 자기 당숙부 조홍도 죽이려고 하던 인간인데 말입니다.”
“능력은 뛰어난데 지나치게 솔직해서 크게 출세하기는 힘든 인물이라. 서량 군벌에 딱 어울리지 않나.”
마초는 두기가 썩 마음에 들었다.
“황보력, 배잠, 왕관, 두기. 역사서에 큰 족적을 남긴 건 아니지만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인물들입니다. 앞으로 관중도독부의 살림을 꾸리려면 문사들이 꼭 필요했는데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래, 왕관은 나이가 어리니까 앞으로 몇 년 묵혀야 하겠지만 다른 세 명은 당장 요긴하게 쓸 수 있겠지.”
마초와 나관중은 그렇게 그날의 일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두 사람은 마지막 다섯 번째 문사를 찾아갔다.
* * *
낙양 외곽의 한 저택.
이 저택의 주인이었던 채옹은 당대 제일의 학자이자 음악 애호가였다. 저택은 채옹의 세련된 취향을 반영하여 단아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채옹의 사후, 이 저택에는 채옹의 두 딸이 기거하고 있었다.
손님으로 채옹의 저택을 찾아온 마초와 나관중에게 채옹의 장녀, 채염이 나와서 마주 앉았다. 그들이 찾던 다섯 번째 문사였다.
“…그래서 같이 장안으로 가자는 말씀을 드리러 온 것이오. 두 분 소저께서 입고 먹는 일은 관중도독부에서 책임지고 돌봐 드리겠소.”
채염은 대답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마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 채염을 본 나관중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인간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인가.’
새까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초승달 같은 눈썹 밑에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콧대는 높지 않았지만, 그 점이 더욱 나관중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나관중은 채염이 말을 하기 위해 분홍색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채염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높고 또렷하고 소리가 풍부했다. 중독된 것처럼 계속 듣고 싶은 목소리로 채염이 말했다.
“왜 저를 데려가려고 하십니까?”
“우리에게 돌아가신 대학자 채옹 선생의 명성이 필요하기 때문이오. 나는 채옹 선생께서 쓰고 계시던 역사서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왔소. 소저께서는 채옹 선생의 진전을 이어받은 분이니 채옹 선생의 저술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고,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더 한다면 소저 본인도 큰 성취를 보실 것이오. 우리가 채 소저를 후원해서 채 소저가 좋은 글을 남기신다면 우리의 명성도 덩달아 높아질 것이오.”
“되게 솔직하시네요.”
“서량 사내니까.”
마초는 채염을 바라보며 씩 웃음을 지었다.
마초에게 흑심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인과 대화할 때 자신의 외모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마초는 얼굴이 가장 잘생겨 보이는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띠고 채염을 바라봤다.
사람은 외모가 뛰어난 이성을 보면서 생기는 본능적인 호감을 신뢰감으로 해석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자라면 누구나 깨닫고 있는 세상의 이치였다.
그러나 채염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복파장군.”
“말씀하시오.”
“저는 여인입니다. 여인이 공부를 하고 글을 쓴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소저께서 그 어려운 일을 해낼 만큼 학문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소.”
마초는 자신만만했다. 그는 채염이 훗날까지 이름이 전해지는 문사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염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초를 바라보며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 말했다.
“제가 장안으로 가려면 복파장군께서 한 가지 청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하하, 말씀하시오. 채 소저의 청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 드리리다.”
“복파장군께서는 이미 혼인하셨나요?”
“그렇소. 그건 왜 물으시오?”
“마침 잘됐네요. 그러면 저를 복파장군의 첩으로 들이시지요.”
“푸압!”
괴성은 마초의 입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나관중이 마시던 차를 허공에 뿜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