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92화 (92/306)

92화. 다섯 명의 문사 (1)

잠시 후.

담담하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는 가후에게 마초가 되물었다.

“떠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복파장군. 저도 이만하면 어느 정도 쓰임새를 한 것 같습니다. 약조했던 것처럼 이제 먼 곳으로 떠날까 합니다.”

“어디로 떠나실 셈이오?”

“글쎄요. 천하의 정세와는 상관없는 곳으로 가서 끼어들지 말라고 하셨지요? 당분간 천하를 주유해 볼 생각입니다.”

마초와 가후는 말없이 앞에 놓인 차를 홀짝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마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 선생.”

“말씀하십시오.”

“내 아우는 미오성에서 여포와 싸우다 죽었소.”

“알고 있습니다.”

“미오성에 있을 리 없는 여포가 마침 그때 미오성에 있었소. 이각이 마가군을 견제하기 위해 여포를 다시 불러들였다고 하더군. 그 계책을 낸 건…….”

“예, 제가 맞습니다.”

가후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마초는 쓸쓸한 눈으로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다 이내 가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마가군은 이각군을 격파하고 성장하는 세력이오. 우리의 실리도, 우리의 명분도 전부 이각에게 맞서 싸우는 데서 나오지. 그러니 우리는 선생과 함께 할 수 없소. 선생은 이각의 총신이었고, 왕윤이 서량 사람들을 전부 죽일 거라고 헛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니까 말이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선생을 중용하는 순간 우리는 동탁, 이각과 똑같은 제3의 서량 군벌이 되고 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선생의 지모를 천하의 그 누가 탐내지 않겠소? 나도 고민하고 또 고민했소. 어떻게든 선생과 함께 할 방법이 없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방법이 없었소.”

마초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 선생이 아니었으면 내 아우는 죽지 않았을 것이오. 선생 또한 이렇게 될 줄 알고 한 일이 아니니 선생에게 따로 원한을 갖지는 않겠소. 하지만 나는 선생을 매일 마주 대할 자신이 없소.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그때 나와 약조했던 대로 먼 곳으로 떠나든지, 아니면 폐하의 곁에 머무르든지, 선생의 뜻대로 하시오.”

만약 조조라면 어땠을까? 조조는 가후 때문에 자기 아들이 죽었더라도 그의 재주를 탐내 아무렇지도 않게 곁에 두었을 것이다.

만약 유비라면 어땠을까? 유비는 가후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든 개의치 않고 자기 사람의 복수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초는 조조도, 유비도 아니었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마초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가후는 묵묵히 차를 몇 모금 더 마셨다.

“저도 복파장군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복파장군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서 제가 저지른 일들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복파장군, 그러면 강녕하십시오. 저는 전란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나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겠습니다.”

가후는 동탁과 이각의 총신이었기에 조정에도 적이 많았다. 천자는 가후를 신임하지만, 이 상황에서 천자의 신임만 믿고 있다가는 어느 칼에 죽을지 모르는 일이다.

가후는 먼 곳으로 떠나기로 했다.

떠나는 가후를 누군가 붙잡았다. 나관중이었다.

“어르신.”

“아, 새로 임명된 비서랑인가? 축하하네.”

“이제부터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나관중이 직접 만나본 가후는 역사서 속의 가후와는 딴판이었다.

‘가 상서는 처세의 달인도 아니었고, 패도를 돕는 냉혈한도 아니었다. 그저 남들보다 나쁜 환경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지모를 발휘하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린… 평범한 사람일 뿐.’

가후는 여윈 얼굴에 미소를 띠며 나관중을 보았다.

“서쪽으로 가면 관중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겠지. 동쪽과 북쪽은 전쟁터고. 그러니 남쪽밖에 더 있겠는가.”

“남쪽이라고 하시면…….”

“형주로 가서 조용히 살려고 하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세.”

가후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형주라…….”

나관중은 가후의 수척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형주는 먼 곳이다. 그러나 만약 마초가 천하를 평정한다면 언젠가는 형주도 손에 넣어야 할 것이다.

나관중은 왠지 가후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이제부터 필요한 것은 문관이다. 마초는 나관중과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 영입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가 상서를 대신할 만한 책사가 필요합니다. 제가 근근이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대전략을 짜줄 수 있는 뛰어난 책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 가후를 보내준 건 아쉽지만, 천하에 지모 있는 자가 가후밖에 없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생각해 둔 준걸이 두 명 있었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두 명의 준걸이 우리에게 합류할지는 모르겠군요.”

“뭐, 이제 아버님의 명성도 높아졌고 황보 대도독의 추천장도 있으니 기대해 봐야지.”

두 사람은 그렇게 준걸이라고 할 만한 두 명의 뛰어난 책사 후보를 영입하는 방안에 대해 토의했다. 그러나 둘 다 먼 곳에 있어서 영입이 될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두 명의 준걸과는 별개로, 장안으로 데려가야 할 문사들이 다섯 명 더 있지.”

관중도독부에 변변한 문사라고는 올해 스무 살의 부간밖에 없다. 마초는 장안으로 돌아가기 전에 낙양에서 찾을 수 있는 문사들을 최대한 모아서 데려갈 셈이었다.

“첫 번째는 알자복야 황보력 대인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네 번째 인물은 오늘 이곳으로 부르셨지요.”

“그래, 지금부터 한 명씩 만나보자고.”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키가 큰 젊은 선비였다.

의관은 흐트러지고 눈빛은 반항적인 기운이 가득했다. 젊은 선비는 마초를 쓱 훑어보고 툭 던지듯이 말했다.

“배잠입니다.”

“복파장군 마초요.”

“예.”

배잠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자도, 관직도, 가문도 말하지 않았다.

마초는 그 모습을 보고 일부러 입을 떼지 않았다. 마초가 불러 놓고 말이 없자 배잠이 불쑥 말했다.

“앉으라고 안 하십니까?”

마초는 그런 배잠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서서 들으시오.”

“예.”

배잠은 두말없이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마초는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좋아, 좋아. 젊은이가 그런 패기가 있어야지.”

“저보다 복파장군이 더 젊지 않습니까?”

“뭐 그런 건 아무려면 어떤가. 자, 나처럼 어린놈이 관직을 좀 했다고 오라 가라 해서 화가 나셨소?”

“화가 난 건 맞고, 복파장군이 어려서는 아닙니다. 복파장군이 나이가 많았어도 화는 났을 겁니다.”

“으하하하! 걸물이구만!”

마초는 뭐가 재미있는지 손뼉까지 치면서 껄껄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관중은 당혹스러웠다.

“주공, 왜 그러세요! 일단 자리라도 권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버려 둬. 저런 꼴통들이 또 마음 잡고 일하면 열심히 한다고. 내가 익주에 있을 때 많이 봐서 알지.”

“예? 익주에 누가 꼴통인데요?”

“진도, 등지, 위연, 그리고 또 누구더라? 글자 모르던 어린 녀석.”

“왕평이요?”

“맞다, 왕평. 하여튼 유 사군 휘하에는 유독 꼴통들이 많았어.”

아마 유비처럼 품이 넓은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쓰일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마초가 크게 웃는 동안 배잠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져 갔다.

“복파장군, 그래서 이놈을 부른 용건이 뭡니까?”

“이놈이 뭔가? 명색이 선비라는 자가.”

“선비는 무슨. 다리가 아프니 빨리 용건이나 말해 주십시오.”

“좋아, 좋아. 배잠, 자는 문행. 시어사 배무의 얼자(천민 첩의 자식). 평소 예법을 하찮게 여긴다는 이유로 아버지와의 사이는 극히 나쁨. 맞지?”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자네가 재주는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마초는 빙글빙글 웃으며 배잠을 쳐다봤다. 칭찬 아닌 칭찬을 듣자 배잠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흥, 용케도 알아보셨군요.”

“사람들은 얼마나 멋들어진 선비인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지. 고귀한 혈통, 정확한 예법, 품위 있는 행동, 뛰어난 문장력, 뭐 그런 것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 내가 관심이 있는 건 오로지 하나, 일을 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일세.”

배잠은 명문가의 자손이지만 또한 천민 첩의 아들인 얼자이다. 신분에 약점이 있으면서 아버지의 눈에도 들지 못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있던 그는, 나중에 조조에게 등용된 후 정확한 형세 판단으로 조언을 하고 변방의 태수 임무를 잘 수행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지금은 조정의 관리인 아버지 시어사 배무의 슬하에 있었는데, 이 부자는 역사서에 기록될 만큼 불화가 심각했다. 아마 배잠의 반항적인 태도가 배무의 눈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인생 경험이 많은 마초는 부자간 불화의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배잠의 반항적인 태도 때문이겠지. 얼자의 몸으로 태어나서 젊은 시절 반항기를 좀 부리는 게 어떻게 큰 흠이겠는가? 그러나 얼자가 성공하려면 남들에게 책을 잡히지 않게 더욱 예법을 중시해야 하는데, 아예 포기해 버리는 배잠의 모습이 배무는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 사이가 나빴다고 역사서에 남은 이 부자는, 어쩌면 오늘날의 수많은 아버지와 아들들이 겪는 비극을 먼저 겪은 그저 평범한 부자가 아니었을까?

일만 잘하면 된다는 마초의 말을 듣자 배잠의 눈빛이 변했다.

“일이라면 어떤 일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각이 망쳐놓은 관중을 재건하는 것. 상상할 수 있는 일들은 다 널려 있을 것이다. 경지 관리, 수리 사업, 도적 토벌, 창고 건설, 도로 보수, 재판, 구휼, 또 뭐가 있지? 아, 호적부터 다시 만들어야겠군. 하여튼 우아하고 멋진 일 빼고 다 한다고 보면 돼.”

“그걸 저보고 하라고요?”

“그래, 자네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원래의 역사에서 배잠은 패국상, 대군태수, 하남윤, 전농중랑장, 연주자사 등 지방관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관중 재건 같은 거친 일을 맡기기에 딱 맞는 인재였다.

잠시 후, 배잠이 입을 열었다. 말투가 조금 느려졌다.

“대체… 저에게서 뭘 보고 저를 관중으로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거 되게 시끄럽네. 내가 일 잘할 것 같아서 데려간다고 했지? 할 거야, 말 거야?”

마초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배잠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명문가에서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자. 아버지와의 불화, 가슴 속에 품은 야망, 현실에 대한 불만.

이런 사람이 자신을 인정해 주는 이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하겠습니다. 죽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초는 배잠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하라고. 이제부터 관중도독부 종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