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복파장군
마초가 천자 유협을 알현하러 간 것은 그로부터 3일 후의 일이었다. 이번에는 나관중도 함께였다.
유협은 마초를 따라온 나관중을 반갑게 맞았다.
“그대가 마초의 휘하에 있는 마궁수 나관중인가. 기발한 꾀를 많이 낸다고 들어서 한번 꼭 만나고 싶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나관중은 천자를 뵙는 예로 네 번 절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 소년이 헌제, 유협이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치 인물이 아닌 배경처럼 묘사된 소년 천자다.
비록 천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유협의 인생은 인물보다는 배경처럼 흘러갔다. 동탁에 의해 옹립되고, 이각에 의해 핍박받고, 조조에 의해 꼭두각시가 되고, 조조의 아들 조비에 의해 폐위되었다.
망해 가는 제국의 마지막 황제에게 주체적인 결단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사대부나 호족은 물론, 일개 백성들만큼의 자기 결정권도 발휘하지 못했다.
‘백성이라도 농사를 짓거나, 유랑을 하거나, 군대에 들어가는 정도는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년에게는 어떤 선택도 허락되지 않았지. 그저 조용히 살다가 죽는 것뿐.’
지금 천자의 행궁으로 쓰고 있는 건물은 용케 불에 타지 않은 환관의 저택이었다. 유협은 사람이 없어서 을씨년스러운 후원으로 두 사람을 데려간 후 정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쓰는 걸 좋아한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그대는 마치 제자백가의 소설가(小說家)들 같은 사람인가 보구나. 마초가 짐에게 그대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꼭 편의를 봐 달라고 청을 하더군.”
유협은 마초를 보며 씩 웃었다. 나관중은 의외라는 듯 마초를 쳐다봤다. 마초는 민망한지 딴청을 피웠다.
“청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나관중, 그대를 비서랑으로 임명한다. 황실의 문서를 관리하는 관직이다. 장안을 얻으면 그 안에 황실의 서고가 있을 테니 그대가 바라는 옛이야기들을 마음껏 수집하도록 하라.”
“화…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비서랑은 황궁의 문서 관리직이다. 높은 직위는 아니지만, 황실 서고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으니 명문가의 자제들이 처음 출사할 때 흔히 받는 관직이다.
마초의 휘하에서 마궁수로 있던 나관중은 졸지에 조정의 관직을 받고, 황실의 장서에 접근할 권한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제 마궁수 선생이라는 호칭도 끝이군. 졸지에 비서랑 선생이 돼 버렸네?”
마초가 나관중을 놀리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유협은 이내 본론을 꺼냈다.
“마초, 그대는 이제 돌아갈 셈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허까지 폐하를 수행하지 못함을 헤아려 주십시오.”
“그대는 이미 짐을 위해 너무나 큰 공을 세웠다. 허에서 조정을 정비하면서 낙양을 재건하는 정도는 짐이 해낼 것이다. 걱정하지 말고 그대의 일을 하라.”
마초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도 좋지 않다. 난세를 끝낸다는 목적이 같은 이상, 두 사람은 잠시 각자의 길을 걷다가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것은 마초의 뜻이기도 했고 유협의 뜻이기도 했다.
유협이 말을 이었다.
“며칠 안으로 조서를 내겠지만, 그대와는 당분간 볼 수 없으니 직접 말해 둘 것이 있다.”
“하명하소서.”
“정서장군에 대한 인사 문제다.”
이각과 장제를 토벌한다는 천자의 조서가 내린 후, 마등은 이각을 직접 베고 대역죄로 능지형에 처했다. 관중 지역의 백성들은 이각이 산 채로 회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등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5로 근황병의 한 축인 철리길의 아단부를 보낸 것도 마등이다. 장안에 잠입해서 공작을 벌이고 근황부도독으로 하내 전투에서 대승을 이끈 마초 또한 마등의 수하다.
그러니 마등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신의 아비는 대단한 관직이나 포상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다만 관중을 재건해야 하니 관중 지역에 대한 행정권과 군사권을 청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준비했다. 조서는 이렇게 나갈 것이다.”
유협은 조서의 초안을 내밀었다. 초안을 읽어 본 마초와 나관중의 눈이 커졌다.
“정서장군 마등을 무릉후에 봉한다.”
“정서장군 마등을 거기장군 영 관중도독으로 삼는다. 관중도독부에서는 사례교위부 대신 장안, 부풍, 풍익, 홍농 4군에 대한 행정권과 군사권을 가지며, 양주자사부 대신 천수, 안정, 농서, 북지 4군에 대한 행정권과 군사권을 갖는다.”
후한 말의 혼란기에는 각지의 군벌들을 달래기 위해 고위 무관직이 남발되는 경향이 있었다. 마등이 지금 가진 정서장군의 직위도 평화시라면 한 손에 꼽힐 만한 높은 서열의 무관직이다.
그러나 유협은 마등의 벼슬을 더 올려서 거기장군에 봉하기로 했다. 거기장군 위에는 대사마 또는 대장군밖에 없으며, 표기장군과 동급인 최상위 무관직이다.
뿐만 아니라 관중도독이라는 직책을 신설하여 관중과 서량에 걸쳐 있는 8군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통괄하게 했다. 이를테면 관중의 주목(州牧)이 된 것이다.
이는 마가군이 관중을 재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관직이라 진작부터 논의되던 것이었는데, 원래 유협은 옹주를 신설하여 마등을 옹주목으로 제시하려고 했으나 마초가 반대했다.
—이름이…이름이 좋지 않습니다.
—이름이 뭐 어쨌다는 말인가?
—그게 옹주는 이각이 쓰려고 했던 이름이라… 하여튼 좋지 않습니다.
이각은 원래의 역사에서 서량과 관중에 걸쳐 있는 자신의 세력권을 떼서 옹주를 신설한다. 이번에는 마초의 활약으로 빨리 죽는 바람에 옹주를 신설하지 못했지만, 원래의 역사를 알고 있는 마초는 이각이 쓰던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바꿔주기를 청했다.
거기장군이 된 것도 마찬가지다. 원래 유협은 마등에게 표기장군을 내릴 예정이었으나, 마초는 왠지 표기장군이라는 관직명이 불길하게 느껴져서 이름을 바꿔줄 것을 청했다. 표기장군은 곽사의 관직이었으며, 마초 자신이 죽음 직전에서 회귀할 때의 관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등은 표기장군과 동급인 거기장군의 직을 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표기장군 영 옹주목보다는 거기장군 영 관중도독이 훨씬 멋지지.’
여기까지는 유협과 사전에 얘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무릉후는 마초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릉현의 후작이라는 뜻인데, 현 하나를 통째로 떼어 봉토로 내리는 현후로서 황족이 아닌 자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작위였다.
‘게다가 이 무릉현이라는 곳은 우리 집안에 의미가 큰 곳이다.’
마등과 마초의 선조이자 후한의 개국공신인 복파장군 마원이 바로 무릉현 출신이다. 그러니 마등은 조정에 공을 세워서 제후가 되어 선조의 고향을 봉토로 받은 것이다. 유교 사회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성공이었다.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군벌에게는 본인이 어떤 직책을 갖고 있느냐도 꽤 중요하다. 자신의 직책이 높을수록 부하들에게도 높은 직위를 내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장군 관중도독이라면 이각이 죽은 지금, 천하의 군벌들 중 가장 높은 직위다.’
앞으로 원소와 조조의 직위는 그 이상으로 맞춰 줘야겠지만, 원술, 유표, 공손찬, 유언 등의 만만치 않은 군벌들보다는 마등의 격이 높아진 것이다. 게다가 무릉후라는 신분 또한 마등에게 권위를 더해 줄 것이다.
“음, 그 밑에는 마초 그대의 인사 문제도 있다.”
마초는 유협의 말을 듣자 그제서야 조서 초안의 맨 밑에 있는 자신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마초를… 복파장군(伏波將軍), 행 근황부도독으로 명한다. 폐하!”
“하하, 장군호는 짐이 직접 지었네. 백파적 한섬을 토벌했으니 복파장군이라고 해도 되겠지.”
아무 이름이나 붙여서 만들어지는 비상설 무관직을 잡호장군이라고 한다. 후한말의 혼란기에는 각 지역마다 군벌이 있으니 이런 잡호장군도 홍수처럼 쏟아지던 시대였다. 보통 잡호장군의 장군호는 그 사람의 활약이나 의지를 나타내는 미사여구를 붙였기에 다 비슷비슷했다. 분무장군 여포는 무위를 뽐내는 장군, 토역장군 손책은 역적을 토벌하는 장군이라는 식이다.
그런데 복파장군이라는 장군호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백파적을 토벌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면서, 복파장군의 직위에 있었던 과거의 명장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바로 마초와 마등의 선조, 복파장군 마원이다.
마원의 사후 일종의 영구 결번처럼 다시 붙지 않았던 복파장군의 이름이 마초에 의해 부활했다. 사람들은 마초를 영웅 마원의 재림으로 여길 것이다. 게다가 근황부도독의 직위도 아직 가지고 있으니 그 또한 마초의 권위를 더해 줄 것이다.
마초는 유협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복파장군의 이름이 어울리는 장수가 되겠습니다.”
“가상하구나. 짐 또한 천자의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 되겠다. 5년 후, 짐이 낙양으로 돌아왔을 때.”
유협과 마초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때 다시 만나세.”
* * *
황보숭과 유협에게 작별을 고한 마초는 숙소로 돌아와서 나관중과 마주 앉았다.
“주공, 그래도 천자의 마음 씀씀이가 참 고맙군요.”
“맞아. 나 또한 천자가 마음에 들고, 천자도 나를 깊게 의지하는 건 분명하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무엇입니까?”
“천자가 똑똑하다는 거지.”
마초는 나관중을 보며 씩 웃었다.
“내가 천자의 측근이라는 건 이제 천하에 알려질 것이다. 그런 나를 복파장군으로 삼았어. 이게 무얼 뜻하는 걸까?”
“무얼 뜻하다니요? 그야 천자의 측근이 복파장군… 아!”
“그래, 자신은 복파장군을 부리는 천자가 되는 거지.”
한의 역사상 복파장군을 부렸던 천자는 두 명이다.
한 명은 무제 유철, 한 명은 광무제 유수. 무제는 흉노 제국을 사실상 멸망시킨 정복군주이고, 광무제는 역적 왕망이 벌인 난세를 끝내고 천하를 다시 세운 사실상의 창업군주다.
유협은 그 중 복파장군 마원을 부렸던 광무제에게 자신이 겹쳐 보이는 효과를 노리고, 마원의 후손 마초에게 복파장군을 제수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군요.”
“아마 다른 사람이 머리를 빌려줬겠지. 소년 천자가 아무리 영리하더라도 이런 술수는 경험이 없으면 생각하기 어려우니까. 이 정도의 계책을 낼 사람이라면…….”
“역시 그 사람이겠죠.”
마초와 나관중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당번병 마대가 외쳤다.
“형님. 아니, 복파장군! 가 상서께서 오셨습니다!”
“드시라고 해라.”
“마침 가 상서의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때맞춰 찾아왔군요.”
“그러게 말이야.”
마초는 가후가 찾아왔다는 소리를 듣자 다시 한번 마음이 심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