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노장의 후회
사례주 낙양.
200년 전 광무제가 후한의 도읍으로 정한 후 지속적인 번영을 누린 곳이다. 그러나 5년 전, 조정의 혼란을 틈타 정권을 장악한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옛 수도 장안으로 천도했었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 을씨년스러운 도시에 주춧돌만 남아서 과거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었다.
천자 유협은 그런 낙양에 다시 입성했다. 그는 맨 먼저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는 종묘에 참배한 후, 백관들을 모아 놓고 선언했다.
“낙양은 선황들께서 피와 땀으로 일구고 지켜 내신 곳이다. 짐이 미욱하여 낙양이 역적의 손에 유린당하게 되었으나, 이제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짐은 이제부터 낙양을 다시 세울 것이다! 그리고 5년 후, 낙양에 다시 황궁이 서는 순간, 돌아오리라!”
유협의 선언은 곧 천하로 퍼져나갈 것이다. 허수아비인 줄 알았던 천자가 당당하게 낙양에 재입성한 사건은 각지의 군벌들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하다.
‘이제 조정의 간섭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패도를 추구하던 군벌들도 조정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낙양의 일이 정리되고, 천자가 허로 떠나기 위해 채비를 하던 어느 날.
마초는 한 집에서 황보숭과 마주하고 있었다. 폐허가 된 낙양에서 그나마 멀쩡한 축에 속하는, 그래서 근황대도독의 치소로 쓰이고 있는 허름한 초가집이었다.
황보숭은 마초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도독. 며칠 후, 정서장군부로 돌아간다고?”
“그렇습니다. 대도독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자네가 나에게 신세를 진 게 뭐가 있겠나. 나야말로 자네에게 큰 은혜를 입었네.”
황보숭은 마초에게 깊이 머리를 숙여서 절을 했다. 마초도 당황해서 맞절을 하며 인사를 받았다.
“어찌 이러십니까? 대도독께서는 황건적의 난을 평정한 영웅이시고, 이번에 다시 장수를 쳐서 천하를 평안케 하셨습니다. 대도독께서 조련하신 견수군이 활약하지 않았다면, 대도독께서 직접 병마를 이끌고 장수군 주력의 공세를 막아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그 전에 대도독 같은 존경받는 원로가 없었다면 근황병을 모으지도 못했겠지요.”
“이 늙은이도 눈치가 있네. 폐하를 이곳으로 모신 것도, 근황병을 제안한 것도, 가후의 지모를 빌려 상황을 타개한 것도, 전장에서 선봉에 서서 활약한 것도 자네일세. 만약 자네가 없었다면 나는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며 늙어 갔겠지.”
“대도독이 안 계셨으면 어차피 이뤄지지 않았을 일들입니다.”
“아니. 만약 내가 없었다면, 자네는 또 다른 황보숭을 찾아내서 역적들과 싸웠겠지.”
황보숭은 담담한 말투로 마초의 공을 치하했다.
마초는 가만히 노장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머리도, 수염도, 눈썹도 눈처럼 하얗고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지만 노장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황보 대도독은 내년에 병사한다. 그러나 지금 보니 병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구나. 그를 괴롭히던 가장 큰 고민이 해결되고 있는 참이니, 어쩌면 더 오래 사실 수도 있겠군.’
그때 황보숭이 불쑥 물었다.
“자네의 부친과 나는 전장에서 싸운 적이 있네. 알고 있는가?”
마초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들어서 대강 알고 있습니다.”
마등과 황보숭의 속사정은 이러했다.
서량에서 양주 자사 경비가 폭정을 일삼자, 한수를 비롯한 지역의 유력자들이 양주 자사의 폭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양주 자사 휘하의 군관이었던 마등은 고심 끝에 한수의 편에 서서 양주 자사 경비에게 대항하는 길을 택한다. 군관으로 살던 마등이 군벌이 되는 길을 걷게 된 것은 이때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토벌군으로 두 사람의 무장을 보낸다. 황보숭과 동탁이었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일세. 그때 싸웠던 마수성의 아들과 이렇게 힘을 합쳐서 역적을 주멸하다니.”
“난세에는 각자의 사정이 있게 마련이니까요. 저도 과거의 적수에게 등을 맡기고 있습니다.”
마초는 서황을 떠올렸다. 지난 생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싸웠던 상대다. 지금은 가장 신뢰하는 수하이자 동료였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후회가 되네.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걸세.”
“후회라니요? 대도독께서 제 아버지와 싸우신 일은 조정의 명을 받아서 하신 일이 아닙니까? 반면 아버지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서량을 포기했고, 양주 자사의 수탈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따르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 길밖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런 문제가 아닐세. 그때, 나와 같이 출진한 게 누구인지 아는가?”
“동탁…이지요.”
“나에게는 그때 동탁을 벨 기회가 있었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지.”
황보숭과 같이 서량의 난 진압을 명받아 출진한 것은 당시 병주목이었던 동탁이었다.
그와 잠시 같이 싸워 본 황보숭은 이내 동탁이 어떤 자인지 깨달았다. 그는 조정으로부터 받은 병권을 이용해서 자신이 조정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동탁의 야망을 알게 된 황보숭의 조카 황보력이 동탁을 제거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황보숭은 그 상황에서도 관리로서의 직분에 충실했다. 동탁을 베는 대신 조정에 표를 올려 동탁의 탄핵을 주장했다. 조정에서는 동탁을 문책했지만, 동탁은 조정을 따르지 않으며 군세를 키우다 끝내 정권을 장악하고 천하를 혼란에 빠뜨리게 된다.
“대도독께서는 그때, 한의 관리로서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길을 택하셨지요. 아니, 그때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황건적의 난을 토벌했을 때도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셨지만, 묵묵히 따르셨지요.”
“누군가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네. 조정이 썩었더라도, 힘 있는 누군가가 그런 조정의 명에 따르며 조정의 권위를 존중해야 더 큰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말일세. 그러나 자네를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네.”
“어떻게 바뀌셨습니까?”
“지금은 난세일세. 나처럼 원리원칙을 지키는 것에만 능한 사람은 이런 난세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네. 자네처럼 속임수와 변칙을 서슴지 않는, 맹목적인 충성이 아니라 천자와도 거래를 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천하를 평안케 하려는 굳은 뜻을 가진 사람만이 이 난세를 끝낼 수 있을 걸세.”
만약 그때 동탁을 벴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일은 60 평생 원리원칙에 충실하게 살아 온 황보숭의 마음에 뼈아픈 후회로 남아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마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천하에는 이 마초도 필요하고, 황보 대도독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초를 더 필요로 하지. 오늘 자네를 보자고 한 것은 그래서일세.”
황보숭은 그렇게 말하며 한 꾸러미의 죽간을 내밀었다.
“대도독, 이것이 무엇입니까?”
마초는 죽간 꾸러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확인해 보게.”
황보숭이 대답하자 마초는 죽간을 들춰 보았다.
“이것은… 병서로군요.”
“이 늙은이가 60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며 배운 것들을 정리한 병서일세. 자네가 받아서 써 줬으면 좋겠네.”
마초는 황보숭이 내민 죽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또한 천하에 이름을 떨쳤던 무장이다. 그저 몇 구절을 읽었을 뿐이지만 이 병서의 가치를 알 수 있었다.
“천하의 명저로군요.”
“과찬일세. 그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대도독… 육도(六韜)나 손자(孫子)가 물론 훌륭하지만, 옛글이라 지금의 처지에 잘 맞지 않습니다. 또한 육도나 손자에서 다루는 것은 왕의 전쟁, 대장군의 전쟁이라 실제 전장에 세밀하게 응용하기에는 너무 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병서는 실제 전투력의 근간이 되는 교위들, 소교들, 오장들의 전쟁에 대한 기록이군요. 분명히 천하의 명저입니다.”
고대 중국의 병서들이 공유하는 특징이 몇 개 있다. 거시적인 전략 개념의 중요성 강조, 정치의 연장으로서 전쟁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 함축적이고 시적인 표현, 전쟁을 넘어서 세상살이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오늘날의 중대장이나 소대장급의 현장 인력들을 위한 자세한 교범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고대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반면 황보숭의 병서는 일체의 미사여구를 배제하고 그동안 자신이 깨달은 것들을 세세하게 적어 놓았다. 행군의 속도를 맞추는 법, 솥을 거는 법, 매복을 잡아내는 법, 본대와 치중대 사이의 연락법 등 아주 미시적인 내용들에 대해 쉽고 자세하게 설명한 저서였다.
마초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병서는 처음 봅니다. 이 병서가 있으면 신병을 정예로 만드는 속도가 두 배는 빨라지겠군요.”
“자네를 보고 이 늙은이가 깨달은 바가 크네. 어떻게 하면 자네를 도와줄 수 있을지 고민하다 찾아낸 방법일세. 받아서 어떻게든 써 주면 고맙겠네.”
“대도독, 반드시 이 병서를 통해 정병을 만들어 천하를 평안케 하겠습니다.”
마초는 황보숭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다. 흰 수염을 쓰다듬던 황보숭이 다시 물었다.
“병서도 병서네만, 이제부터 관중을 재건하려면 문사가 필요할 걸세.”
“맞습니다. 사실 정서장군부로 데려가고 싶은 인물들을 몇 명 찾고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네. 그렇다면 나도 자네에게 추천하고 싶은 인물이 한 명 있네.”
“누구입니까?”
황보숭은 대답 대신 큰 소리로 외쳤다.
“들거라!”
황보숭이 외치자 미닫이문을 열고 한 선비가 들어왔다. 나이는 마흔 살 정도, 기골이 있어 보이는 문사였다. 마초도 근황부도독으로서 통성명을 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황보 복야가 아니십니까?”
황보숭의 조카, 알자복야 황보력이었다. 황보력은 마초에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읍을 했다.
“부도독. 이 황보력이 비록 재주 없으나 부도독과 함께 천하를 평안케 하고 싶습니다.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아니, 황보 복야께서 저를 따르신다는 건 좀… 괜찮으시겠습니까?”
“큰 뜻을 펴는 데 노소가 어디 있고 지위고하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부도독이 가진 밝은 재주와 큰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황보숭에게 동탁을 주살하도록 권했던 사람이 바로 조카 황보력이다. 그는 명문 황보가의 인물이고, 천자의 의례를 주관하는 알자복야라는 높은 벼슬을 하고 있으며, 마초보다 스무 살가량 나이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마초를 따르겠다는 의지를 표하고 있었다.
마초는 깊이 고개를 숙여 황보력의 의지에 화답했다.
“황보 복야의 뜻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원래의 역사에서 황보력은 말솜씨가 뛰어나고 기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천자를 인질로 잡은 이각을 꾸짖은 일화가 유명하다.
‘지금은 나의 개입으로 역사가 바뀌어 그런 활약을 할 기회는 사라졌지. 하지만 황보력 정도의 인물이면 내 휘하에서 다른 식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지켜보던 황보숭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마초에게 한 권의 비단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자네에게 주고 싶은 게 더 있네.”
“이것은 무엇입니까?”
“추천장일세. 자네가 얼마나 뜻이 크고 재주가 뛰어난지 내가 보증한다는. 앞으로 얻고 싶은 선비가 있는데 그가 서량 군벌의 휘하로 들어오기를 망설이거든 이 추천장을 활용하게.”
황보숭의 추천장은 큰 의미가 있었다.
그는 사람됨이 지나치게 깨끗해서 인맥이나 세력은 없지만, 청류와 탁류를 가리지 않고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황보숭의 추천장은 마등이 서량 군벌이라는 이유로 의심하는 사족들에게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대도독,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말했다시피 은혜를 입은 것은 자네가 아니라 나일세. 정 이 늙은이를 위하고 싶다면 뜻을 이루도록 하게.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건 나처럼 원리원칙을 따지는 관리가 아니라, 자네처럼 과감한 행동력을 가진 젊은 호걸일세. 이 늙은이의 후회를 되풀이하지 말고… 자네의 과단성으로 이 난세를 끝내 주게.”
난세를 끝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너무 오래 살아서 이제 와서 방식을 바꾸기에는 늦었다. 그러니 다른 방식으로 난세를 끝낼 수 있는 후진에게 자신이 가진 자산을 물려주려는 게 황보숭의 생각이었다.
황보숭과 황보력, 마초는 그날 밤이 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