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회가 된 남자
방덕이 마등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직 지양현성에 남아 있는 적병의 숫자가 꽤 많습니다. 주공, 여기서 이각의 목을 내걸면 남은 군사들을 쉽게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만…….”
“아, 그건 안 된다. 내가 이각과 개인적인 용무가 있으니 어쩔 수 없구나. 미안하지만 이해해 주게.”
“알겠습니다.”
방덕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을 달려 전장으로 떠났다. 그가 자리를 이탈한 동안 외롭게 싸우고 있을 서황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방덕이 떠나자 마등은 부하들을 시켜 이각과 남은 개인적인 용무를 처리하기로 했다.
“의원은 데려왔는가?”
“예, 풍익태수부에서 솜씨 좋은 의원과 상처에 잘 듣는 약을 지원받았습니다.”
“앵속(罌粟, 아편)은?”
“그것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좋아. 매달아라.”
병사들은 이각을 장대에 칭칭 묶어서 들어올렸다.
장대와 의원과 마약이 동원되는 것을 본 이각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설마, 설마…!’
도덕군자 흉내를 내 온 마등이 쓰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던 방법이었다. 이각이 마등을 향해 짓던 비웃음은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이런 씨발, 위선자 새끼…!”
거침없이 쌍욕이 튀어나오는 이각의 입에 병사들이 재갈을 물렸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참, 내가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게 있군.”
마등은 장대에 매달린 이각의 앞에 호상을 펴고 앉았다.
“내 둘째 아들이 미오성 전투에서 죽었다. 그런데 미오성 전투의 총대장이 네놈이더군. 그러니까 이각…….”
마등은 호상에 앉은 채, 장대에 매달린 이각과 눈을 맞췄다.
입꼬리가 광대뼈에 걸릴 것처럼 치솟아 올라갔다. 반면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마등의 눈은 동공이 잔뜩 수축되어 마치 사람의 것이 아닌 듯했다. 자식의 죽음 앞에서까지 억눌러 온 분노가 푸른 눈동자 속에서 조용히 타올랐다.
“이건 내 개인적인 용무다. 이제부터 너도 자식 잃은 아비의 심정을 조금은 느껴 보아라.”
마등은 주변의 병사들에게 말했다.
“회를 떠라. 아주 얇게, 죽지 않을 만큼, 천천히.”
능지형(凌遲刑).
고대의 잔혹한 형벌 중에서도 가장 야만적인 형벌이 이각에게 선고되자 명을 받은 병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끄흐흐…….”
이각은 과연 한 시대를 풍미한 군벌이었다. 산 채로 살점이 발라지는 고통 속에서도 낮은 신음 소리만을 내며 마등을 쏘아보고 있었다.
마등은 호상에 앉은 채 이각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진동하는 피 냄새를 씻으려는 듯 술까지 마시면서 이각의 몸이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몇 시진이 지난 후.
몸통의 살이 끔찍하게 발라지자 칼날은 이각의 다리 사이를 향했다. 생식기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어지간하던 이각도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풍익의 하늘에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마등은 원수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 * *
하내군, 하내도위의 치소.
근황병의 본거지 근황대도독부로 쓰이고 있는 이곳에 이각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소식을 들고 온 것은 정서장군부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월길이었다. 나관중은 월길을 만나서 그 이야기를 듣자 나는 듯이 마초에게 달려갔다.
“이각이… 능지형을 당했다고?”
“그렇습니다. 하루 밤낮을 꼬박 살아서 몸부림쳤는데, 정서장군께서는 이각의 바로 앞에 앉아서 식사까지 해결하시며 이각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꼬박 지켜보셨다고 합니다.”
능지형은 살아 있는 사람의 살을 수백 번 얇게 저며서 죽이는 형벌이다. 죄인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지 않도록 의원과 마약이 동원된다. 전근대 사회의 악형 중에서도 짝을 찾을 수 없는 끔찍한 형벌이었다.
마초는 그 소식을 듣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도 참, 온갖 도덕군자인 척은 다 하시더니 산 채로 회를 떠 버렸군. 하긴 원래 나보다 아버지가 더 불같은 성정이지.”
“어쨌든 관중 일대의 민심은 정서장군 쪽으로 결정적으로 기울었다고 합니다. 이각이 워낙 분탕질을 많이 쳐 놨으니까요. 공식적으로는 천자를 능멸한 죄로 능지형을 당한 것이기도 하구요.”
“백성들이 보기에는 통쾌해 보이겠지. 이각이 죽었으면, 장안성은?”
“이각은 죽었지만 아직 장제가 이끄는 잔당이 장안에서 농성하고 있습니다. 워낙 큰 성이라 떨어뜨리려면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하더군요. 방덕 교위가 이각군의 잔당을 추격해서 격멸하고, 서황 사마가 장안성 공성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아, 잘 돌아가고 있군. 그나저나 내가 부탁했던 건?”
“아, 이각의 목 말입니까? 소금에 절여서 잘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월길이 말하자 마초는 옆에 있는 이감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기분이 어때, 이감? 지난번 곽사의 목은 훼손이 너무 심해서 보여주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보여줄 수 있겠군.”
“주공을 따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감은 쑥 들어간 눈을 가늘게 뜨고 허허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보통 사람 같지만, 사실 그는 전직 금군 교위이자 낙양 대겁탈을 실행한 주역이다. 그저 군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했던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동탁, 그리고 이각과 곽사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는 이감이다.
나관중이 마초를 보며 말했다.
“주공, 그러면 이제 천자를 뵙고 정서장군께서 보내신 표를 올리실 거지요?”
“그래. 그 전에 우리끼리 논의할 게 좀 있지. 이감, 하북의 동향은 어떻다고 하던가?”
“그자가 업에 도달했습니다. 원본초는 그자에게 병주의 흑산적 잔당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길 것 같습니다.”
그자란 여포를 말한다.
이감은 일부러 마초의 심기를 살펴서 여포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마초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어부라 선우는 정말 나에게 감사해야겠군. 근황병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곧 여포를 상대해야 했을 테니까.”
나관중이 말을 받았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그자가 작년에 원소에게 합류했다가 상산 전투를 치른 후, 원소와의 불화로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으니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두 사람은 잘 지낼 거야. 여포도 달리 갈 데가 없을 것이고, 원소도 여포를 잘 대하겠지. 여포가 나를 이겼으니까.”
미오성 전투에서 죽은 마휴의 두 원수, 이각과 여포.
하나는 아버지 마등에 의해 산 채로 살점이 발라지며 죽었다. 이제 남은 원수는 여포 하나다.
“하지만… 아직은 하북으로 쳐들어갈 때가 아니다. 일단 관중을 안정시키는 것이 먼저다.”
장안성을 얻은 후, 관중을 안정시키면 마가군 또한 천하에서 손꼽히는 강대한 세력이 된다.
‘강력한 서량 기병대, 관중 평야의 생산력, 그리고 천자의 편에 서서 황도 장안을 수복했다는 막강한 정치적 명분. 이 정도면 앞으로 천하의 누구와도 패권을 겨뤄볼 수 있을 것이다.’
관중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마초가 정서장군부로 돌아가야 하고, 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이곳의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마초는 바로 천자에게 알현 신청을 넣었다.
* * *
천자 유협은 마초의 알현 신청을 반갑게 맞이했다.
정서장군 마등의 표문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천자의 행궁에는 유범, 마우, 충소, 그리고 가후가 모여 있었다.
표문을 직접 읽는 유협의 얼굴이 환해졌다.
“드디어 역적 이각이 죽었구나!”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좌중랑장 유범과 간의대부 충소가 유협을 바라보며 손을 모았다. 시중 마우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유범, 마우, 충소가 처음 마등을 끌어들이기로 했을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마등의 세력은 그렇게 강대하지 않았고, 조정에 대한 그의 충성심도 썩 믿을 만하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대안이 없으니 마등을 선택한 것이었다.
‘만약 마등이 실패한다면, 우리 셋은…….’
‘천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그냥 죽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마등 장군이 끝내 이각의 목을 얻었구나!’
일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최고의 공신들은 이 자리에 같이 있었다.
“가 상서, 그리고 마 부도독이 애써 준 덕분이오.”
유협은 천자의 단상에서 내려와서 가후와 마초를 향해 길게 읍을 했다. 가후와 마초는 당황해서 바닥에 엎드려 천자의 인사를 받았다.
축하의 말을 주고받은 후, 여섯 사람은 본격적으로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가후가 먼저 말했다.
“하내에도 이제 양식이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계속 머무르시기는 어렵습니다.”
마초도 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하내는 원소의 세력권과 너무 가깝습니다. 원소는 조정에 충성할 인물이 아닙니다.”
원소는 당금 천자 유협을 인정하지 않았다. 동탁이 세운 천자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동탁이 소제(유협의 형 유변)를 폐위시키고 폐하를 허수아비 천자로 세운 것이니까.’
원소는 동탁이 유변을 폐위시키기 전부터 누구보다 용감하게 동탁과 맞서 싸웠다. 원소가 천자로 밀었던 것은 유주자사 유우였는데, 유우가 유주의 군벌 공손찬에 의해 죽음을 맞은 후에는 조정에 대해 이렇다 할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황실을 인정하지 않는 원소의 세력이 근처에 있으니 언제 조정이 위협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마초와 가후는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마초가 먼저 말했다.
“일단 폐하께서 마음이 가는 대로 하십시오.”
“마음이 가는 대로라.”
유협의 마음이 가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이 자라온 곳, 후한 200년의 사직이 이어진 곳, 지금은 동탁이 불태워서 잿더미로 변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짐의 마음이 가는 곳은 낙양이지. 하지만 낙양은 지금 폐허일 것이다.”
“폐허라도 괜찮습니다. 일단 낙양에 입성하십시오.”
낙양을 재건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일단 낙양에 입성해서 천자가 직접 재건의 의지를 보이는 게 중요하다.
근황병을 이끌고 이각군과 싸워서 승리한 천자가, 폐허가 된 낙양에 재입성하여 직접 낙양 재건을 선포한다. 천하에 천자의 건재함을 알리는 강력한 정치적 선언이 될 것이다.
“알았네. 그러면 낙양으로 간 이후에는 어찌하면 되겠는가? 행궁이 없는 것은 짐이 견딜 수 있겠으나, 식량이 없는 것은 견딜 방법이 없네.”
이번에는 가후가 말했다.
“식량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단, 낙양을 재건할 때까지 시한부로 옮기는 것임을 명확히 하십시오.”
“식량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
마초는 한숨을 쉬었다. 자기 입으로 얘기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후와 논의해 본 결과, 아무리 봐도 그게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았다.
“허로 가십시오.”
“허라… 예주 영천군 허현 말인가?”
“그렇습니다. 허는 이 난리에 그나마 양식을 구할 수 있는 땅입니다. 그곳에서 난리를 피하고, 낙양이 재건되는 시점에 낙양으로 돌아와서 새 조정을 선포하십시오. 신은 그동안 관중을 안정시킨 후, 폐하께서 낙양에 새로 여시는 조정에 입조하겠습니다.”
유협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마초가 자세히 설명했다.
“폐하께서 폐허가 된 낙양에서 머무르시려면 결국 연주목 조조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대에 조정을 운영할 만한 세력과 재원을 가진 것은 원소와 조조뿐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그를 먼저 불러들이시는 모양새가 된다면 결국 그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맞는 말이다.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폐하께서 먼저 근황병을 이끌고 그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자신의 세력권과 인접한 허에 폐하께서 먼저 들어가시면 조조는 자기 발로 입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폐하가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먼저 드러내지 마시고, 그가 먼저 폐하를 모시러 올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그가 오겠는가?”
“그는 반드시 옵니다.”
마초는 단호하게 말했다.
허는 조조의 세력권과 가깝고 양식이 풍부하며, 또한 조조와 연합해서 조조군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영천 호족들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조조가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 조조군 내부의 영천 호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천자가 먼저 허로 이동한다면 조조는 스스로 입조를 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조가 아닌 천자가 명분을 쥐는 것이다.’
또한 지난 생의 유협은 빈털터리 상태에서 조조에게 보호를 청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허수아비 천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달랐다. 그의 곁에는 일만에 달하는 근황병이 있고, 마등이라는 외부의 지원 세력이 있다. 그러니 조조와의 관계도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필요한 만큼 이용하는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후도 마초의 말에 동의했다.
“허는 임시 수도로 적합합니다. 조조가 입조하면 그에게 무거운 벼슬을 내리고 그가 가진 재물과 양식을 활용해서 조정을 꾸려 가십시오. 단, 허에 계속 머무르다 보면 결국 조조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됩니다. 낙양 재건을 선포하시고, 낙양이 재건되는 대로 낙양으로 돌아오십시오. 허는 어디까지나 시한부 임시 수도임을 명확히 하는 겁니다.”
마초도 거들었다.
“예전 같은 번화한 낙양을 기대하지 마시고, 적당히 행궁이 만들어지면 돌아오십시오. 낙양은 실로 절묘한 위치입니다. 동쪽으로 조조, 북쪽으로 원소, 서쪽으로 신의 아비 마등의 세력권 사이에 있습니다. 폐하께서 어느 한 군웅에게 휘둘리지 않고 천하의 중심을 잡으실 수 있는 위치입니다.”
마초는 지금 자신을 포함한 군웅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천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었다.
유협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말대로 하겠다. 짐은 낙양으로 가서 한실의 재건을 선포할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허의 행궁에 머무르겠다.”
결정이 떨어졌다. 마초와 가후, 그리고 천자의 심복들이 유협을 향해 손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