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마등 대 이각 (1)
관중 지방은 보통 삼보 지역(장안, 부풍, 풍익)을 일컫는데, 여기에 홍농군까지 껴서 4개 군을 말하기도 한다. 홍농군에는 관중과 중원을 나누는 관문 함곡관이 있는데, 이 함곡관을 나서서 동쪽으로 가면 황하 유역의 하동, 하내, 낙양(하남)의 삼하 지방이 나온다. 여기서부터가 흔히 말하는 중원이다. 중국 문명이 탄생한 이래, 후한 말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중심지는 삼하 지방과 삼보 지방을 교대로 오갔다.
하내 전투에서 근황병이 승리하고 장수가 사로잡히면서 이각은 삼하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반면 근황병 또한 험준한 함곡관을 돌파해서 삼보 지방으로 쳐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첫 싸움에 승리를 거뒀다지만 그들은 천자를 모시고 있다는 대의명분으로 겨우 유지되는, 일만 남짓한 느슨한 연합군일 뿐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장안의 이각이 직접 나섰다.
“함곡관을 나서서 동쪽의 근황병을 쳐부순다. 내 손으로 천자의 멱살을 잡아서 끌고 올 것이다.”
급하게 결정한 출진이니 보급선이 제대로 확보되어 있을 리 없다. 홍농까지 가면 보급을 받을 수 있겠지만 길 위에서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이각이 선택한 것은 언제나처럼 약탈이었다.
약탈을 하게 되면 지엄하게 작동하는 군율이 일시적으로 정지한다. 병사들이 일단 백성들의 집에 쳐들어가게 되면 질서정연하게 식량만 빼앗고 부엌만 빌리게 되지 않는다. 귀중품을 빼앗고 강간을 벌이고 저항하는 사람을 죽인다. 그 와중에 이성이 마비되면서 더욱 참혹한 짓들도 서슴지 않는 것이 약탈의 생리이다.
“적당히들 하라고 해. 갈 길이 멀단 말이다.”
이각은 휘하 제장들을 모아 놓고 투덜거렸지만, 병사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2만에 달하는 이각군이 한 고을에 다 머무를 수는 없다. 이각군은 선봉대가 먼저 진군하고 이각이 직접 이끄는 중군이 그 뒤를 따르는 형태로 진군했다.
이 날 이각군의 중군이 머무르는 고을은 풍익군의 지양현이라는 고을이었다. 과거에는 곽사의 처남 팽가라는 자가 대호족으로 권세를 누리고 있던 곳이다.
곽사와 팽가가 천자를 겁박하다 의문의 죽음을 맞은 후, 지양현은 오랜만에 살 만한 곳으로 변했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사정이 좀 달랐다.
“아이고, 나으리! 어르신! 내년 봄에 뿌릴 종자만은…….”
“닥쳐라! 감히 대사마의 징발 명령을 거역할 셈이냐?”
이각의 군사들이 약탈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각의 군사들은 성안에 풀 한 포기 남기지 않으려는 듯 양식과 귀중품을 쓸어 담고 사람을 해쳤다. 지양현은 순식간에 인세의 지옥이나 마찬가지인 곳으로 변해 있었다.
천자에 의해 새로 임명된 풍익태수는 이각을 말리기는커녕 먼저 와서 지양현성의 문을 활짝 열고 이각군을 맞이했다.
“풍익태수 장기입니다. 대사마께서 머무시는 동안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으응, 그래. 우리 애들이 좀 거치니까 장 태수가 이해하도록 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사마, 그 대신이라기는 뭐하지만… 소인을 좀 잘 봐주십시오.”
장기는 그렇게 말하며 이각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이지만 어지간히 세상살이에 능숙한 듯했다.
“호호호, 우리 장 태수가 말이 좀 통하네? 알았어, 내 이번 싸움이 끝나면 장 태수의 자리를 좀 알아봐 주지.”
이각은 깔깔 웃으며 장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장기는 이각의 괴력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순식간에 다시 비굴한 표정을 회복했다.
이렇게 약탈을 방조했으니 이각군이 떠난 후 태수의 직무를 수행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각은 장기가 임지를 옮겨 달라고 청탁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장기는 이각을 바라보며 깊이 머리를 숙였다.
“대사마, 오늘 밤은 편히 쉬십시오. 소인은 현성의 문을 활짝 열고 대사마의 군사들이 드나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기특하긴. 내 장 태수의 다음 임지는 괜찮은 곳으로 알아봐 주지. 어디 보자, 부풍이면 되겠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대사마!”
이각은 깔깔거리며 몇 마디 실없는 농담을 더 던졌다. 적당히 맞장구치던 장기는 이내 머리를 숙이고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뒷걸음으로 종종거리며 이각의 침소가 되어 있는 태수의 치소를 빠져나왔다.
덜컥.
미닫이문이 닫히자 비굴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장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그날 밤.
장기가 활짝 열어놓은 현성의 문으로 한 무리의 군사들이 쳐들어왔다. 북쪽의 산악으로, 장평관의 샛길로, 종남산으로 우회해서 풍익 일대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가군이었다.
“야습! 야습이다!”
이각은 군사들이 소란스럽게 외치는 소리에 잠을 깼다. 어느새 마가군 군사들은 자신의 침소까지 육박해 있었다.
“이런 개 같은 태수놈이!”
벌써 속임수에 넘어간 게 몇 번이던가?
이각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
우직!
침소의 미닫이문이 부서졌다. 마가군의 용감한 백부장 하나가 군사들을 이끌고 침입한 것이다. 이각을 잡아서 단숨에 장군직에 오를 것을 기대하고 쳐들어온 게 분명했다.
“이각, 순순히 칼을 받… 크억!”
그러나 백부장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각이 머리맡에 둔 장검을 빼 들어 바로 찌른 것이다.
이각은 그대로 병사들 몇을 베어 넘겼다. 이각의 침소까지 침입한 병사들이니 마가군 중에서도 상당한 정예였을 것이지만, 이각이 휘두르는 긴 장검 앞에 힘을 쓰지 못하고 베어져 나갔다.
이각은 갑옷도 걸치지 못하고 옷만 대충 꿰어 입은 평복 차림으로 장검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머리는 풀어 헤친 채였다.
“이각이다! 잡아라!”
“흥.”
화려한 옷을 입은 이각을 보고 마가군 병사들이 달려들었으나 허사였다. 이각은 크지도 않은 몸집으로 군사들이 쌍수검으로 사용하는 긴 장검을 한 손으로 휘둘렀다.
퍽!
이각의 일격에 맞은 병사들은 예외 없이 몸이 두 조각이 나서 날아다녔다.
이각은 태수의 치소밖으로 나와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풍익태수 장기가 활짝 열어둔 성문으로 마가군이 돌입한 것이다. 태수의 치소 일대는 마가군 병사들이 올린 횃불로 대낮처럼 밝았다.
마가군의 선두에는 두 명의 무장이 서 있었다. 한 명은 자루가 긴 도끼를 어깨에 걸쳤고, 다른 한 명은 활을 맨 채 만도를 뽑아 들고 있었다.
“저놈들은 분명히…….”
서황, 그리고 방덕. 마등이 자랑하는 마가군의 양 날개다.
마등이 이토록 대담한 야습을 기획한 데는 저 두 사람의 존재가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상황을 단위 부대끼리의 싸움으로 몰고 가기만 하면 두 사람을 앞세워서 이길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각은 잠시 분노로 몸을 떨었으나 이내 평정을 찾았다.
“흥, 마수성이의 생각에 장단을 맞춰 줄 수는 없지. 일단 빠져나가서 군사들을 휘몰아 싸워 주마.”
이각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지양현성의 후문으로 말을 달렸다. 후문 쪽에는 자신의 군사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후문에도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어디선가 쳐들어온 병사들이 이각군을 도륙하고 있었는데, 그 선두에 선 두 사람은 이미 서량 시절부터 이각에게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정은, 성의, 네놈들이 감히 나에게 대적할 셈이냐!”
이각의 입에서 평상시의 간드러진 음성이 아닌 벽력같은 호통이 튀어나왔다.
정은과 성의는 이각이 서량에서 날리던 시절,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까마득한 후진들이었다. 연배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과 대적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인물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정은과 성의가 이각을 보고도 겁을 먹지 않았다. 정은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이고, 치연 형님. 화장도 안 하고 오신 걸 보니 어지간히 급하셨나 보오.”
성의는 진중한 성격이었다. 정은과 달리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치연 형님. 어쩌자고 그 많은 악행을 하셨습니까? 형님도 젊은 시절에는 썩어빠진 세상에 의분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각은 잠시 정은과 성의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이내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호호호호!”
이각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이 떠나가라 웃었다. 잠시 그렇게 웃던 그는 웃느라 흐른 눈물을 닦아내고 품 속에서 유리 거울과 붓을 꺼내서 눈꼬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얘, 성의야.”
“말씀하십시오, 형님.”
“이 거울이 얼마짜린 줄 아니?”
“모릅니다. 그 거울 하나 값이면 수십 명이 겨울을 날 만한 곡식을 살 수 있다는 건 압니다.”
이각은 성의가 말하는 동안 여전히 눈꼬리를 그리고 있었다. 드디어 고양이 눈매가 완성되자 이각은 성의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수십 명? 호호호, 너희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우리 어릴 때는 두 사람이 보리 한 석이면 겨울을 났지? 그렇게 따지면 천 명이 겨울을 날 수 있단다.”
이각은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썩어빠진 세상에 대한 의분이라.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얘들아, 세상살이는 마음먹기 나름이야. 이 세상이 그저 썩어빠진 것 같지? 아니야. 칼만 잘 쓰면 이런 부귀를 누릴 수 있단다. 참 좋은 세상이지 않니?”
스르릉.
거기까지 말한 이각은 거울을 집어넣고 장검을 뽑아 들었다. 말 위에 있었지만 장검의 날 끝이 땅까지 닿을 정도로 긴 칼이었다.
“나는 이 좋은 세상에서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이란다. 탓을 하려면 나 말고 세상을 이렇게 만든 옛날 사람들 탓을 하렴.”
“이각.”
그때 누군가가 이각을 불렀다.
정은과 성의는 양옆으로 물러났다. 두 사람이 만든 길로 한 사내가 천천히 말을 몰아서 나왔다.
서역의 명마 위에 올라타서 5척 장도를 뽑아 든 무장이었다. 풍성하지만 결이 고운 수염과 뚜렷한 이목구비가 그가 순수한 한족 혈통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이각은 사내를 알아보고 쿡 웃었다.
“우리 마수성이가 많이 큰 건 아는데, 그렇다고 내 이름을 막 부르는 건 좀 그렇지 않니?”
“동탁과 어울려 다니면서 갖은 악행을 다 저지른 놈이 이제 와서 대형 대접을 바라는 거냐? 우리는 바로 너 같은 놈들을 척살하기 위해 거병했다. 이제 네놈이 죽을 차례다.”
“오호, 마수성이. 제법인데? 그런데 말이야.”
이각은 씩 웃고는 말에 채찍질을 했다.
이각이 탄 말은 마등을 향해 순식간에 달려 들어갔다. 마등도 지지 않고 말을 몰아 이각을 향했다.
쾅!
이각과 마등의 칼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이각의 쌍수검도, 마등의 장도도 본래 두 손으로 쓰는 칼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손으로 너무나 쉽게 긴 칼을 휘두르며 상대를 노렸다.
쾅! 쾅! 쾅!
칼날끼리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몇 차례의 공방이 지나간 후, 잠시 거리를 벌린 이각이 말했다.
“주위에서 떠받들어 주니까 아주 기세가 등등하지? 너는 나를 잠깐 본 게 다라서 잘 모르겠구나. 내가 서량 최강이라고 불렸다는 걸.”
“그래서 결론이 뭐냐? 네놈이 검술 잘한다고 자랑하는 거냐?”
마등은 이각의 말을 듣지 않고 다시 말을 몰아 이각에게 짓쳐 들어갔다. 말 위의 두 사람은 눈 깜박할 새 십여 합을 교환했다.
“나는 네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거야, 마수성.”
쾅!
이각이 장검을 한껏 뒤로 당겼다 크게 휘둘렀다. 마등은 이각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말째로 뒤로 밀려났다.
“풍익태수를 매수해서 나를 야습한다는 발상은 참으로 좋았다. 실제로 나를 거의 잡을 뻔했지. 그런데 너는 분위기에 취해서 실수를 했어. 나하고 생사결을 한다는, 아주 큰 실수.”
이각은 마등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마등이 다시 달려 들어왔다. 두 사람은 말머리가 서로 맞닿을 만큼 가깝게 엉켰다. 이각은 오른손에 든 장검으로 마등의 장도를 쳐내고 왼손을 쭉 뻗었다. 왼손에는 마등의 말고삐가 잡혔다.
“흡!”
이각이 한 번 힘을 썼다. 별로 굵지도 않은 왼팔뚝에 밧줄만 한 굵기의 핏줄 여러 개가 떠올랐다. 이각은 몸을 틀며 마등의 말고삐를 잡은 손을 바깥쪽으로 흩뿌렸다.
“아니!”
“저럴 수가!”
정은, 성의, 마가군 병사들의 눈에 경악과 공포가 떠올랐다.
우당탕!
마등을 태운 서역의 준마는 이각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땅에 쓰러졌다. 잡아채는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옆으로 쓰러진 말이 땅 위에서 미끄러졌다. 마등은 재빨리 몸을 뺐지만, 땅에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이각을 서량 최강의 무사로 만들어준 무기.
그것은 검도 아니고 검술도 아닌 괴력이었다. 무녀들의 화장을 흉내낸 얼굴, 평범한 체격, 경박한 태도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각의 장기였다.
타탁.
이각은 바로 말을 몰아 땅바닥을 굴러 일어난 마등에게 달려 들어왔다. 마등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장도를 세워 이각을 맞이했다.
퍽!
마등의 장도가 세로로 번뜩였다. 장도는 그대로 이각이 탄 말의 머리와 몸통 앞쪽을 두 조각으로 갈랐다. 칼을 종으로 내려치니 말머리는 좌우로 갈라지게 되었다. 마등을 노리던 이각의 장검은 결국 마등의 몸에 닿지 못했다. 타고 있던 말이 두 쪽이 났으니 이각 또한 바닥을 구르게 되었다.
꽈당.
이각은 잠시 얼굴을 찌푸린 후 이내 몸을 털고 일어났다. 이제 두 사람은 땅 위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이게 마가도법인가? 제법이구나. 그러나 나에게 대적할 만큼은 아니야. 나하고 생사결을 하겠다는 건 잘못된 판단이다, 마수성.”
“이각.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나는 너와 생사를 가름할 생각이 없다.”
“뭐야?”
“너를 죽이지 않겠다.”
마등은 그렇게 말하며 목을 양쪽으로 꺾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와 생사결을 하러 온 게 아니다. 호승심을 부리러 온 것도 아니다. 네놈을 꼭 산 채로 잡아야 하기 때문에 부하들에게 맡기지 않고 내가 직접 온 것이다.”
마등은 천천히 이각에게 다가갔다. 말에서 내리니 마등의 체격이 이각의 두 배 가까이 커 보였다.
“마수성이, 계속 헛소리 할 거야? 나를 생포하겠다고?”
“그래. 반드시 산 채로 잡아서 회를 떠 주마.”
가까이 다가오니 마등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잘 생긴 얼굴에 주름이 잔뜩 져 있었다. 푸른 눈은 동공이 수축되어 짐승의 그것처럼 변해 있었다. 마등의 얼굴에는 전투의 흥분이 아닌 격렬한 분노와 원한이 떠올라 있었다.
이각은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마등의 둘째 아들이 미오성 전투에서 죽었다. 그 전투의 총지휘관이 바로 이각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