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하내 전투 (2)
견수군 방패병들이 간격을 벌린 사이로 쌍수검병들이 튀어 나갔다.
적과의 거리가 완전히 근접했다. 진을 짜서 싸우는 게 아니라 엉망으로 뒤엉켜 싸우는 난전이 벌어질 거리였다.
그러니 창보다 쌍수검에 더 유리했다. 쌍수검을 든 견수군 3열의 군사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상대 보병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으아악!”
“으억!”
쌍수검에 맞은 장수군 보병들은 비명과 함께 쓰러져 나갔다.
황보숭이 육성하고 마초가 이끄는 견수군의 활약으로 장수군의 좌익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수는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전령에게 물었다.
“완전히 미친놈들이군. 보병으로 기병에게 돌격해서 우세를 점하다니. 하지만 우리의 좌익 쪽에 저토록 전력을 집중시켰으니 우익 쪽은 허약할 것이다. 우익의 상황은 어떠냐?”
“우익은 아군 우세, 그러나 적이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뭐야? 그쪽은 장양과 단외 같은 잡장들의 부대가 아니더냐? 아군의 우익에는 서량기병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적군 총대장, 황보숭이 직접 아군 우익 방면을 지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좌익 방향에는 이름 모를 장수가 정예병을 지휘해서 아군 좌익을 밀어붙이고 있다. 우익 방향에는 아군이 우세하지만 명장 황보숭이 지휘하면서 잡병들을 데리고 아군 정예의 공격을 버티고 있다.
장수는 선택해야 했다. 아군이 약한 곳을 내어주고 아군이 강한 곳을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강한 곳을 내버려 두고 아군이 약한 곳을 메울 것인가?
“예비대를… 좌익으로 보내라! 적의 정예병을 막는다!”
“존명!”
장수의 선택은 후자였다. 황보숭이 잘 버티고 있다고 한들 병력의 질 차이는 메울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 우익의 서량기병대는 장양, 단외의 잡병들을 돌파할 것이다.
문제는 적군이 정예병을 집중시켜서 뚫어낸 좌익이었다. 그쪽을 그대로 두면 근황병과 장수군이 서로 한 쪽씩을 뚫어내서 혼전의 양상으로 흘러갈 것이다.
‘전체 전력은 우리가 앞선다. 우리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이 안정 지향적으로 운영하면 결국 승리할 수 있다.’
사람의 체력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정예병이라 해도 계속 새로운 부대를 투입하면 지칠 수밖에 없다. 예비대를 보내서 좌익에서 얼추 균형을 만들어 놓으면 그사이 우익에서 우위를 점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장수가 준비한 예비대는 얼마 전 귀부한 백파적들이었다. 백파적 한섬은 원래 근황병에 참여해서 한몫을 잡으려고 했으나, 천자 납치 계획이 실패한 후 장수 쪽으로 붙는 것을 택했다. 아무리 봐도 그쪽이 승산이 더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백파적 부대가 전장으로 접근하는 모습이 마초의 눈에 들어왔다. 선두에는 적장, 한섬이 서 있었다.
“좋아. 다시 만났구나, 백파적. 너는 천자를 능멸했으니 산 채로 잡아서 회를 떠 주마.”
마초는 씩 웃으며 조황비전을 몰아 대열의 앞으로 나섰다.
사실 천자에 대한 충성심은 딱히 없다. 그러나 지난번에 배신한 한섬이 하도 괘씸했기에 꼭 생포해서 끔찍한 악형을 당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백금색의 아름다운 말, 은빛 갑옷과 품이 큰 비색 전포,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사자 모양의 투구.
화려한 차림의 마초를 보고 백파적들이 저마다 떠들기 시작했다.
“저놈은 뭐지?”
“저렇게 눈에 띄는 차림을 하고 어쩌자는 거야? 죽여 달라는 건가?”
백파적들의 웅성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초는 조황비전을 살살 달랬다.
“조황비전, 너도 여기까지 끌려 나온 게 유감이겠지만 나도 내 애마 대신 너를 타는 게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그러니까…….”
마초는 창을 비껴 쥐고 적진을 노려보았다. 목표는 적진의 선두에 서 있는 대장, 한섬이었다.
“빨리 끝내자.”
철썩.
채찍 소리와 함께 조황비전이 땅을 박찼다.
부우우웅!
곧이어 엄청난 가속이 시작됐다. 안장 위의 마초는 누군가 뒤에서 등덜미를 잡고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자가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한 마리 명마는 비현실적인 속도로 눈앞의 적장을 향해 질주했다.
“큭…….”
마초의 눈앞에 보이는 시야가 극단적으로 좁아졌다. 그 끝에는 적장 한섬이 있었다. 처음에는 주먹만 하게 보이던 한섬의 모습은 눈을 한 번 깜박이는 동안 말머리만 하게 커졌다. 다시 한번 눈을 깜박이자 당혹스러운 한섬의 표정이 시야에 가득 들어올 만큼 거리가 좁혀져 있었다.
퍽!
마초는 창을 거꾸로 잡고 들어 올렸다. 한섬은 창대의 뭉툭한 밑부분에 배를 직격당하고 공중에 붕 떠올랐다. 일그러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한섬은 죽이지 않고 생포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창 촉이 아닌 창대로 한섬을 가격했다. 그러나 상황은 마초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두두두두!
“끄아아악!”
창끝에 맞고 낙마한 한섬을 조황비전이 그대로 짓밟고 지나갔다. 달려오는 속도가 하도 빨라서 마음대로 멈춰지지도 않았다. 명마의 발굽에 짓밟힌 한섬은 그대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모습으로 변했다.
“이런 제길! 죽어버렸잖아! 나는 죽일 생각이 아니었다고!”
마초는 의도치 않게 적장을 짓밟아 죽이게 되자 당황했다. 한섬은 괴롭힐 새도 없이 눈 깜박할 사이에 죽어버렸다.
‘에이… 할 수 없지. 한섬은 살려 봐야 어차피 쓸모가 없어. 차라리 액땜일 수도 있다. 장수를 잡을 때는 집중해서 꼭 살려서 잡자.’
마초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으로는 고함을 쳤다.
“근황부도독, 마초다! 죽고 싶은 자는 덤벼라!”
백파적은 애초에 도적 집단이다. 두령 한섬이 한 방에 짓밟혀 죽는 것을 보자 덤비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주춤거리던 백파적들은 견수군이 육박해 오자 이내 병장기를 거꾸로 쥐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초는 태연하게 한섬의 목을 잘라서 군사들에게 넘기고 다시 한번 조황비전에 올라탔다.
“자, 이제 적군의 좌익이 완전히 무너졌다. 장수라는 놈이 현명한 지휘관이라면 여기서는…….”
좌익을 구하러 오는 선택을 할 것이다. 마초는 그렇게 생각하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견수군도 패주하는 백파적들을 무리해서 쫓지 않고 제자리에서 숨을 골랐다.
잠시 후, 마초의 생각대로 적의 본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수가 이끄는 본대가 좌익을 구원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 * *
장수는 전령의 보고를 듣자 본대를 이끌고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급보! 백파적 한섬이 낙마해서 죽었습니다. 적장은 근황부도독, 마초라고 합니다!”
“마초라고? 마등의 아들 말이냐? 그놈이 왜 이곳에 있어?”
장수는 처음에는 전령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말이 잘못 전해졌거나 동명이인일 것이다.’
그러나 전령이 말하는 근황부도독의 인상착의가 익히 알려져 있는 마초의 모습과 비슷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제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미심쩍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석연치 않은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풍익에서는 곽사 장군이 누군가의 손에 죽었다. 천자의 시위들이 힘을 합쳐서 했다고 하지만 그는 시위 몇몇이 죽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동에서는 정찰하러 보낸 호거아가 천자를 다 잡게 되었다가 갑자기 어느 장수의 손에 죽었다고 했지. 설마… 마등의 아들 마초가 천자와 행동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마초가 몰래 서량을 떠나서 천자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다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장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마초는 나이는 어리지만 극히 난폭하고 용맹하다고 이름난 자다. 그자가 적진에 있다면 정면으로 맞서 싸울 필요 없다. 천천히 전진해서 적군을 압박해라!”
장수는 서두르지 않았다. 대형을 갖추고 본대를 천천히 전진시키며 조금씩 적진을 향해 다가갔다.
마등의 아들 마초는 선봉에 서서 적장을 노리고 돌격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벌써 몇 번이나 이름난 무장들을 잡았다. 그만큼 일신의 무용에는 자신이 있을 테니 정면 대결을 피하고 부대와 부대의 힘 싸움으로 전황을 끌고 갈 참이었다.
“마초가 이끄는 군사들이 제아무리 대단해도 어차피 보병이고, 이미 여러 시간 싸움을 해서 지친 상태다. 천천히 압박하면 승기는 우리 쪽에 있다!”
장수는 자신의 지휘 능력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전력상 우세한 건 자신의 군사들이다.
‘근황병에는 황보숭과 마초 외에 전황을 뒤집을 만한 무장이 없다. 황보숭이 직접 나선다면 모르겠지만 그랬다가는 황보숭의 지휘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우익 방향이 무너지겠지. 서두르지 않으면 승리는 나의 것이다.’
그때, 장수군 우익 방향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황보숭에게 장수군 본대의 움직임이 전해졌다.
“장수의 본대가 부도독이 있는 쪽으로 이동 중이라?”
“그렇습니다, 대도독! 장수는 대열을 갖추고 느린 속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부도독이 이끄는 견수군과 장기전을 준비하는 듯한 움직임입니다.”
“과연 용병(用兵)을 할 줄 아는 자로군.”
장수의 움직임은 전투 개시 전 황보숭이 예측했던 그대로였다.
‘어쩌면 숙부 장제보다 더 뛰어난 무장일 수도 있겠군.’
그러나 지금은 장수 입장에서 상대가 너무 나빴다. 황보숭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장수의 그 뛰어난 용병술이 자신의 발목을 잡겠구나. 뿔피리를 불어라!”
황보숭의 말을 들은 전령이 볼을 한껏 부풀리고 산양의 뿔로 만든 피리를 입에 가져갔다.
부우우우—!
뿔피리가 울었다. 돌격의 신호였다.
5로 근황병의 마지막 부대.
근황대도독 황보숭이 장양과 단외의 잡병들을 이끌고 악전고투하는 동안, 한켠에 비켜서서 결코 전투에 끼어들지 않았던 기병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숫자는 500기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긴 창을 들었고, 얼굴에는 굳은 의지가 떠올라 있었다.
그들의 선두로 백마를 탄 청년 장수가 치고 나왔다.
“가자, 의종!”
청년 장수, 조운은 철창을 한 바퀴 돌려서 비껴 잡고 장수군 본대를 향해 전장을 가로질러 달렸다. 그 뒤로 상산의 의종이 조운을 따랐다. 의종은 가장 중요한 일격을 위해 이제까지 전력을 온존하고 있었다.
마초가 이끄는 견수군은 다시 방패를 든 1열을 앞에 세우고 장수의 본대를 맞이했다. 우세를 점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장수군의 발을 묶어 두고 있었다.
그렇게 견수군이 모루가 되어 있는 동안, 우익에서 좌익으로 전장을 가로지르며 의종 500기가 달렸다. 황보숭이 준비한 강력한 망치였다.
“저… 저놈들은 뭐냐!”
달려오는 의종을 보며 장수는 경악했다.
상대 기병대는 전장을 길게 가로지르며 기동할 수 있는 속도와 대담성을 갖고 있었다.
더욱 대단한 것은 저만한 기병대를 쓰지 않고 숨겨둔 황보숭의 배짱이었다. 그는 마지막 일격을 위해 저 500기를 숨기고 또 숨겼다. 기병 없이도 장수군 우익의 공세를 버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근황병에 뛰어난 무장은 황보숭과 마초뿐이다! 저 기병대를 이끄는 놈은 잡장일 것이다! 그놈을 잡아!”
장수의 외침을 들은 병사들이 의종을 요격하기 위해 뛰어나갔다. 의종의 선두에는 온통 흰 옷을 두르고 백마를 탄 조운이 달리고 있었다.
장수에게 잡장 취급을 받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운은 묵묵히 철창을 들어 맨 앞에서 장수군 본대에 충돌했다.
쾅!
흙먼지가 일어나며 창으로 찌르는 소리, 말발굽으로 짓밟는 소리, 군사들의 구슬픈 비명 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죽고 죽이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한바탕 일어난 흙먼지가 걷혔을 때, 흰옷을 입은 조운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이십여 기의 병사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우와아아!”
그런 조운의 뒤를 따라 의종이 돌격했다. 긴 창에 찔린 장수군 병사들은 저마다 비명을 토하며 쓰러졌다.
“아니, 저놈은 또 뭐란 말이냐! 황보숭과 마초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장수는 기가 막혔다.
적장들이 생각보다 너무 뛰어나다. 기껏 본대를 전진시켜서 견수군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나 했으나, 때맞춰 달려온 의종에 의해 측면이 기병돌격을 받으며 대열이 완전히 무너졌다. 대열이 무너지자 견수군의 극병과 쌍수검병들이 튀어나와서 장수군을 닥치는 대로 베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패배한다. 장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퇴각한다!”
일단 목숨을 부지해야 다음 싸움을 기약할 수 있다. 장수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한참 달리는 그의 옆에서 누가 그를 불렀다.
“이보시오, 장수 장군.”
“웬 놈이냐!”
장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의 옆에는 사자 투구를 쓴 청년 장수가 어느새 전장을 가로질러 와서 장수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그는 장수가 대답하자 푸른 눈을 빛내며 씩 웃었다.
“역시 네놈이 장수로군.”
‘마초인가!’
장수는 상대의 정체를 짐작하고 바로 고삐를 당겼다.
이히힝!
말이 앞발을 들고 울음소리를 내며 제 자리에 섰다. 장수가 서자 마초도 조금 더 가서 정지하고 장수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두 사람은 말을 탄 채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
“네가 마등의 아들 마초냐?”
“마등이라니, 정서장군이 네 친구냐? 건방진 놈.”
마초는 일부러 장수를 약 올리며 빙글빙글 웃었다. 장수가 격분해서 달려들면 그대로 사로잡을 셈이었다.
그런데 장수의 반응이 예상과 조금 달랐다. 장수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침착하게 말했다.
“지휘 능력이 대단하고, 그리고 용감하구나. 그러나 그것이 마초 너의 약점이다.”
“무슨 헛소리야?”
“병사들을 잘 이끌어서 승리를 취하면 마치 그것이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 같지. 그러나 틀렸다. 창을 들고 적장과 싸우는 것은, 부대를 이끌고 적병들과 싸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마초는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아아, 그러니까 일신의 무예에는 꽤 자신이 있으시다?”
“진짜 전장의 창술을 가르쳐 주마. 덤벼라, 마초.”
장수는 그렇게 내뱉고 창을 세워 마초를 겨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