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하내 전투 (1)
철리길은 이천에 달하는 강족 기병대를 이끌고 근황병에 참여하기 위해 하내까지 달려왔다. 관중의 장안, 풍익, 홍농을 지나지 않고 병주의 산악 지대를 통과하는 길이었다. 마초가 양하원을 구하기 위해 상산으로 달려갔던 바로 그 길이었는데, 다행히 그때 상산 원정을 함께 한 병사들이 길잡이가 되어 비교적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이때 마초의 두 당번병, 마대와 맹획도 철리길과 함께 왔다. 마초가 천자에게 전포와 보검을 하사받고 근황부도독의 직위에 오르자 마대와 맹획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신이 나서 더욱 열성적으로 전투 준비를 했다.
그러나 장수의 군사들과 싸우기 위해 출진하는 당일, 마대와 맹획 사이에는 내분이 일어나고 있었다.
“맹획, 네가 한눈을 팔아서 이렇게 된 거 아냐!”
“흥, 멍청한 소리 집어치워라. 마대 너야말로 말에 익숙할 텐데 말이 그 지경이 되도록…….”
“둘 다 닥치지 못해! 이런 쓸모없는 놈들!”
마초가 노호성을 터뜨리자 마대와 맹획은 눈치를 보며 잠잠해졌다.
“당번병이라고 있는 것들이 말 하나 제대로 관리를 못 해서 이런 사태를 만들어!”
마초가 분노하는 이유는 이러했다.
하내로 향하는 길 위에서 마대와 맹획이 합류하자 마초는 말과 장비의 관리를 두 당번병에게 맡겼다. 그런데 맹획이 꾸벅꾸벅 조는 사이 절영이 줄을 풀고 탈출해서 어딘가 다녀왔다.
“으응? 그새 줄이 풀렸나?”
어딘가 다녀온 절영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맹획은 알아서 줄이 풀린 줄 알았다. 마대에게 이 이야기를 했으나 마대 또한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과연 영특한 말이라 그런가, 줄이 풀렸는데도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두 당번병은 절영이 기특해서 칭찬해 줬는데, 그날 이후로 이상하게도 매일 밤 절영을 묶어 둔 줄이 풀렸다.
사건의 진상은 하내에 도착한 이후 밝혀졌다. 절영이 마구간을 탈출해서 천자의 행궁에 잠입한 것이 환관들에 의해 목격된 것이다. 절영의 목적지는 조황비전이 있는 마구간이었다.
“네놈들은 말을 관리하라고 했더니 절영이 밤마다 조황비전과 놀아나는 걸 방치해!”
“아니, 발정기도 아닌데 설마 절영이 그런 짓을 할 줄은…….”
아마도 늘씬한 몸매에 백금빛 털을 가진 조황비전의 아름다운 자태에 끌려서 발정기도 아닌데 교접을 하러 간 모양이었다. 절영은 적병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영리한 머리를 활용해서 밤마다 마구간을 빠져나가 조황비전과의 밀회를 즐겼다.
그런데 절영은 암말이었다. 그래서 지금 절영의 뱃속에는 조황비전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임신 중이니 마초를 태우고 출진할 수도 없게 되었다.
마대가 마초의 눈치를 보며 입을 뗐다.
“형님, 그래도 사정을 들은 천자가 조황비전을 빌려줬지 않습니까? 조황비전도 대단한 명마인데 괜찮지 않을까요?”
“조황비전은 달리는 것만 빠르지, 황궁에서만 살아서 꾀가 없단 말이다! 이 멍청한 놈들!”
마초가 울분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호통을 들은 마대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마초는 마대와 맹획이 질릴 때까지 큰소리를 친 다음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조황비전에 올라탔다. 임신한 절영 대신 전장에 나가게 된 조황비전은 절영이 누린 쾌락의 대가를 왜 내가 치르냐는 듯 뚱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그도 피해자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람과 말의 기분과는 관계없이 마초와 조황비전의 자태는 몹시 잘 어울렸다.
은빛 갑옷에 사자 투구를 쓰고 품이 큰 비색 전포를 두른 마초와 온몸이 백금색으로 빛나는 조황비전의 조합은 군사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장양, 단외, 어부라 같은 군소 군벌들 휘하의 군사들이 보기에 조황비전을 탄 마초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처럼 보였다. 잔뜩 구겨진 표정은 잘생긴 얼굴과 결합되니 꼭 굳은 의지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5로 근황병의 군사들이 넋을 잃고 마초의 모습을 구경하는 사이, 근황대도독 황보숭이 말을 몰아 마초의 옆으로 다가왔다.
“부도독, 심기가 불편한가?”
“대도독. 그렇지 않습니다. 다소의 문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적군을 섬멸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초의 말을 들은 황보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네가 이끄는 선봉대일세. 혹시라도 기회가 온다면 내가 말한 것을 잊지 말게.”
“적장은 될 수 있으면 사로잡는다는 것 말씀이시지요? 알겠습니다.”
지금 낙양과 장안 일대의 형세는 이러했다.
장안, 부풍, 풍익, 홍농으로 이어지는 관중 평야는 이각과 장제가 점유하고 있었다. 이각과 장제는 장안성에 있고, 원래 장제의 근거지였던 홍농에는 장제의 조카 장수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빠져나온 천자는 하내에 머무르고 있었다. 천자가 하내에서 근황병을 모으고 이각과 장제를 역적으로 선언하자 홍농의 장수는 격분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근황병을 격멸하기 위해 하내로 진격하고 있었다.
황보숭이 이끄는 근황병은 안읍의 벌판에서 장수의 군사들을 맞이했다.
“아군과 장수군의 군사 수는 1만 남짓으로 비슷합니다. 하지만 군사의 질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내 생각도 부도독과 같네. 장수군은 통일된 지휘체계와 풍부한 실전경험을 갖춘 서량의 정예병일세. 반면 우리 근황병은 장양, 단외, 어부라 같은 군소 군벌들의 군사들을 긁어모은 군대에 불과하지.”
“그러니 모두가 승패는 뻔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근황대도독 황보숭과 부도독 마초는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허를 찌른다. 평지에서 회전(會戰)을 벌일 것이다. 이 한 번 싸움으로 장수를 사로잡는다.”
황보숭은 장수를 인질로 삼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초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로잡은 장수를 미끼로 장제와 협상한다. 그렇게 되면 남는 역적은 오직 한 사람.’
장안의 이각뿐이다.
한편, 안읍 벌판으로 군사를 이끌고 온 장수는 1만 군사를 길게 펼쳤다. 근황병과 숫자는 비슷해도 장수의 군사들은 기병 비율이 훨씬 높았고, 억센 서량기병과 선비족들이 주축이기 때문에 병력의 질에서는 비교할 수 없었다.
“좌우익의 선비족 궁기병들로 압박을 가한 후 서량기병을 돌격시킨다. 근황병은 반나절이면 버티지 못하고 흩어질 것이다!”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라면 누구라도 장수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포진이었다.
하지만 읽는 것과 대처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병종의 우위를 앞세워 궁기병으로 압박하고 창기병으로 돌격하는 전술에는 마땅한 대처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근황대도독 황보숭과 부도독 마초는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여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전체적인 역량은 결국 상대가 우위에 있다. 그러니 우리는 한정된 정예병들을 한 점에 집중시켜서 작은 곳에서 먼저 우위를 만든다. 그곳에서의 우세를 기반으로 상대의 본진을 바로 들이쳐서 지휘체계를 마비시킨다.”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수는 좌우익에 배치한 기병대를 천천히 전진시켰다. 선비족 기병대와 서량기병이 섞여 있는 혼성군이었다.
상대의 포진에 대한 척후들의 보고가 연신 들어왔다. 마초는 잠시 생각한 후 공격 방향을 정했다. 상대의 좌익, 아군의 우익 방향이었다.
“좋아. 견수군, 준비해라!”
마초가 이끄는 부대는 황보숭이 수많은 실전을 거치며 친히 육성한 정예부대, 견수군 일천이었다.
천하의 용장과 강병들은 수도를 지키는 금군(禁軍)으로 모여든다. 견수군은 그런 금군 중에서도 황건적의 난에 출진해 공을 세운 병사들을 황보숭이 가려 뽑은 정예부대였다. 황건적 수만을 참살하고, 최고 간부 장량과 장보의 목을 베서 황건적을 와해시킨 것이 황보숭과 견수군의 업적이었다.
그런 견수군이 지금 마초의 지휘를 받고 있다. 마초의 호령을 들은 견수군 병사들이 일제히 창으로 바닥을 내려치며 함성을 올렸다.
“가자!”
“와아아아!”
함성을 올리며 견수군이 뛰어나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장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들은… 보병이잖아?”
정련한 갑옷과 육중한 방패로 무장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장수군의 좌익 기병대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오는 근황병의 우익 선봉대는 분명히 보병이었다.
“보병으로 기병대에 돌격한다고? 저놈들은 머리가 돌았나?”
장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견수군을 이끄는 마초는 여느 때와 달리 대열의 선봉에 서지 않고 중간쯤에 있었다. 병사들을 지휘하기 위함이었다. 황보숭이 맡긴 견수군은 직접 이끌어 보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대단했다.
‘참으로 정연한 병사들이구나. 황보 대도독의 실력을 알겠군.’
무거운 갑옷과 방패를 들고 달려갈 수 있는 거리가 통상의 보병들보다 두 배는 더 길었다. 견수군은 그렇게 달리면서도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고 정확히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눈에는 전쟁터다운 적당한 긴장감이 떠올라 있을 뿐, 눈앞에 보이는 이민족 기병들에게 겁을 먹은 병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달려간 견수군과 선비족 기병대가 50장(125미터) 거리로 접근했다. 숙련된 궁수라면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거리다.
그때 마초가 영을 내렸다.
“1열, 달려라!”
“와아아!”
함성과 함께 견수군의 1열이 속도를 올려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휘이이잉.
때맞춰 선비족 궁기병들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한인 궁병이라면 이 거리에서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어렵겠지만 선비족 중에는 이 거리에서 마상사격으로 사람을 겨냥해서 맞출 수 있는 명궁들이 있다.
날아드는 화살에 맞은 견수군 병사들 몇몇이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뒤따르는 병사들은 개의치 않고 전진했다.
“이 거리에서는 치명적인 타격은 입지 않는다. 좀 더 전진해!”
일부 솜씨가 뛰어난 자들이 맞출 수는 있겠지만 전쟁터는 병사 개인이 무용을 겨루는 곳이 아니다. 마초는 일부 피해를 감수하면서 적의 일제사격이 가능한 지점 직전까지 군사들을 전진시켰다.
견수군은 마초의 지시를 정확하게 수행했다. 화살을 버텨내며 15장을 더 전진하고 나서야 땅에 방패를 내리꽂았다.
쿵!
쿵!
선비족 궁기병들의 전방 35장 거리에서 방패의 벽이 형성되었다. 중갑을 입고 방패를 들고 먼 거리를 달려온 견수군 1열 보병들은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기 눈앞의 방패를 단단히 쥐었다.
퍼퍼퍽!
선비족들이 날린 화살은 그대로 방패의 벽에 꽂혔다. 좁은 틈을 파고든 화살 몇 대가 견수군 보병 몇몇을 쓰러뜨렸지만 그 자리는 2열의 군사들이 전진해서 메웠다.
싸움에서는 자신의 거리에서 싸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 선비족 기병은 50장에서 100장의 거리를 가장 선호한다. 거리를 더 좁혀서 화살을 쏘고 다시 거리를 벌리는 게 그들이 가장 강력하게 사용하는 전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초가 이끄는 견수군은 보병이 먼저 돌격한다는 전법으로 상대 기병의 허를 찔러서, 상대가 당황하는 동안 상대가 가장 선호하는 거리를 통과해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좋아, 우리의 거리를 잡았다.’
적이 일제사격이 가능한 거리가 되자마자 방패의 벽을 쌓았으니 이제부터는 보병의 영역이었다.
“전진한다!”
다시 한번 호령이 떨어지자 견수군 1열은 방패를 앞세운 채 일정한 박자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척. 척. 척.
쿵!
견수군은 세 걸음에 한 번씩 방패를 땅에 내려찍으며 전진의 박자를 맞췄다.
“아니, 이놈들이…….”
선비족 기병대는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도 상대가 두려움 없이 전진해 오자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충분하다면 옆으로 크게 돌아서 활을 쏘는 전법을 사용했겠지만 견수군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서 기병이 달릴만한 거리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보병들이다. 돌격으로 쓸어 버려라!”
선비족들은 돌격을 선택했다. 선비족은 말도 작고 무기도 장창이 아닌 만도를 쓰지만, 보병과 기병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무력의 격차가 있다. 작은 말이라도 타면 보병대의 어떤 거인보다도 높은 곳에서 상대를 향해 떨어뜨리듯 칼을 휘두를 수 있다.
두두두.
선비족이 돌격해 오자 견수군 1열은 자세를 낮추고 방패를 곧추세웠다. 만도를 뽑아 든 선비족들이 10장 안으로 접근했을 때, 대열의 중간에서 전장을 지휘하던 마초가 다시 한번 호령했다.
“2열!”
마초의 호령과 함께 2열이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1장이 넘는 긴 극이었다. 극을 든 2열은 방패를 쥔 1열의 뒤에서 극을 곧추세워 기병 돌격을 맞이했다.
퍼억!
“크아악!”
정확한 시점에 튀어나온 극에 찔린 선비족 기병들이 낙마해서 땅을 구르기 시작했다. 1열의 피해도 적지 않았으나 선비족 기병들의 피해가 더욱 컸다.
“내려찍어라!”
돌격이 한 번 저지되자 2열의 극병들은 극을 일제히 하늘 높이 치켜들고 내려찍기 시작했다. 속도를 상실한 기병들은 극에 맞아 피를 뿜으며 쓰러져 갔다.
선비족 기병들이 예상보다 고전하자 뒤쪽에서 장수군 보병들이 구원하러 왔다. 창을 든 보병들이 달려오자 다시 대형 방패를 쥔 견수군 1열이 전면에 나섰다.
퍽! 퍽! 퍽!
장수군 보병들이 내지르는 첫 창을 견수군 1열이 막아내자 마초는 다시 한번 호령했다.
“3열!”
1열의 병사들이 몸을 옆으로 틀어서 틈을 벌렸다. 이제까지 뒤에서 대기만 하고 있던 3열의 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 틈으로 튀어 나갔다.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두 손으로 쥐는 큰 칼, 쌍수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