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구름은 용을 따르고(雲從龍) (2)
호거아가 이끄는 선비족 기병 삼백 명이 단 한 기를 막지 못하고 길을 열었다.
청년은 은빛 갑옷을 입고, 흰 투구를 쓰고, 흰 전포를 두르고 백마에 올라타서 나는 듯이 호거아를 향해 질주했다. 그의 손에 들린 묵직한 철창이 호거아를 향해 곧추세워졌다.
“웬 놈인가요! 이 호거아가 상대해 주겠습니다!”
호거아는 그렇게 소리치며 철극을 꼬나 쥐었다. 빗맞아도 상대를 절명시킬 수 있는 무거운 철극이었다. 그런 호거아를 바라보던 마초가 빈정거렸다.
“또 한 명이 송장이 되겠군.”
“닥치세요! 저 하얀 옷 입은 놈을 해치우고 나면 당신 차례입니다!”
호거아가 기세 좋게 외치며 철극을 들고 청년을 향해 달렸다. 양쪽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가자 청년과 호거아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호거아는 외국어 능력이 뛰어난지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발음은 어색하지만 유창한 한인 말로 외쳤다.
“이놈, 죽으세요!”
호거아의 철극이 청년을 향해 날아들었다.
청년은 호거아의 철극 끝이 자기 몸 가까이 올 때까지 꿈쩍하지 않았다. 철극이 청년의 어깨를 스치는 순간, 청년은 몸을 핑그르 하고 반 바퀴 회전시키며 철창을 뻗었다.
퍽!
병장기가 한 번 맞부딪기도 전에 청년의 철창이 호거아의 몸을 꿰뚫었다. 호거아는 일격에 절명하고 청년의 철창 끝에 걸린 채 허공에 붕 떴다. 호거아의 시신은 그대로 창에 꽂혀 한참을 달려오다 청년이 한 번 창을 옆으로 휘두르자 그제야 땅을 굴렀다.
우당탕!
단 일 합에 호거아가 꿰뚫리자 선비족 기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청년의 뒤를 따라 저마다 긴 창을 비껴든 한 무리의 기병대가 나타났다. 의(義)자 깃발을 높이 올리고 있었다.
“상산의 의종이다!”
하나같이 소년에서 청년 사이의 젊은이들이었다. 의종은 두려움 없이 선비족 기병들에게 돌진했다. 이미 우두머리를 잃은 선비족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흩어져서 도망쳤다.
청년은 그대로 백마를 몰아 마초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초는 그를 보며 씩 웃었다.
“상산창술 절기 일신시담인가. 일 년 사이 더욱 빨라졌군.”
“창만 빨라진 게 아니라 말 타는 속도도 빨라졌다네. 이제 자네를 따라 달려도 뒤처지지 않을 걸세.”
“허세 부리기는. 어쨌든 반갑네, 친구여.”
갑자기 나타난 백마를 탄 청년, 조운은 말에서 내려 마초와 굳게 손을 맞잡았다. 마초가 조운에게 말했다.
“역시 용을 모시고 있으니 구름(雲)을 보는군.”
“용이라. 맹기, 그러면 설마 자네 뒤에 계신 저 공자가…….”
“그래, 당금 천자이시네.”
조운은 그 말을 듣자 성큼성큼 유협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폐하. 어명을 받들어 달려왔나이다. 어가를 지키기 위해 남은 이들은 상산의 의종이 구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라. 짐은 오늘 그대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협을 마주 보았다. 짙은 눈썹 아래 큰 눈이 강렬하게 눈빛을 발했다.
“그대가 바로 상산의 조자룡인가?”
“그렇습니다. 조운(趙雲), 자는 자룡(子龍). 그저 의롭게 쓰일 곳을 찾고 있던 무사입니다.”
‘마초가 말한 그 사내인가. 과연 듣던 대로구나.’
유협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실로 흠잡을 데 없는 영용한 모습이었다. 조운은 8척의 키에 건장한 체격, 잘생긴 얼굴을 가진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그렇게 용모가 멋지니 은빛 갑옷과 흰옷이 기막히게 잘 어울렸다. 무공 또한 절륜하여, 선비족을 이끄는 호거아도 나름대로 이름난 무장인 듯 보였지만 조운과 창을 겨루자 단 일 합에 송장이 되었다.
마초는 유협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폐하, 신이 폐하께 추천하고 싶은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를 불러들이기 위해 조서를 써 주시기를 청합니다.
—인물을 추천하는 건 고마운 일이네만, 무슨 조서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대가 추천하는 자라면 짐이 가장 먼저 만나볼 것인데.
—그것이… 그자가 보통 까다로운 자가 아니라서 조서를 통해 어명을 내리지 않으면 신이 청해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초가 해 달라는 대로 조운과 그가 이끄는 상산의 의종을 불러들이는 조서를 내렸다. 조서를 받고 달려온 조운은 과연 마초의 추천이 어울릴 만한 모습이었다.
—조운을 불러들여서 근처에 두십시오. 그는 무공이 뛰어나고 또한 충직하며, 난세를 바로잡겠다는 뜻을 가진 자이니 반드시 폐하를 위해 큰 공을 세울 것입니다. 그를 얼마간 지켜본 후 중용해도 될 것 같으면 중용하십시오.
유협은 마초의 말을 떠올리고 조운에게 말했다.
“상산의 조자룡. 짐은 이제 근황병을 만들어 역적 이각, 장제를 토벌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대도 봤다시피 지금 짐의 처지가 빈궁하니 항상 목숨이 위험하구나. 그러니 짐의 호위가 되어다오.”
조운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유협을 올려다봤다.
‘할 수 있다면 유 대인과 함께 서주에서 싸우고 싶었다.’
조정이 무너지면서 시작된 난세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난세를 끝내려면 새로운 조정을 열 수 있는 자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바로 유비였다. 황실의 종친이면서 실력을 갖추고 있고, 뜨거운 대의를 품고 있는 자. 난세가 시작됐을 때 기반을 잡을 만큼 나이가 있으면서도 난세가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젊은 자. 그보다 더 적합한 인물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마초가 천자의 조서와 함께 보낸 글이 조운의 마음을 돌렸다.
[자룡, 난세를 끝내는 것이 꿈이라면 천자의 곁에 있게. 무너진 조정을 다시 세우는데 그보다 더 적합한 인물이 어디 있겠는가? 천자께서는 앞으로 수없이 많은 생명의 위협을 맞이하실 테니 자네가 그것을 막아내게. 창으로 할 수 있는 일들 중 그만큼 보람된 일은 없을 걸세.]
마초는 그러면서 천자가 나이는 어리지만, 성군의 자질을 갖췄다고 추천했다.
[만약 불인하고 불의한 군웅들이 성군이 되려는 천자를 핍박한다면 내가 그들을 짓밟겠다. 만약 천자께서 길을 잘못 드신다면 내가 그것을 바로잡겠다. 그러니 자네는 걱정하지 말고 천자께 충성을 다하게. 반드시 천하를 위해 크게 쓰임새가 있을 걸세.]
그렇게 먼 길을 달려와서 천자를 만났다. 조운은 호위가 되어 달라고 말하는 천자 유협에게 대답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구름은 용을 따르고(雲從龍), 바람은 범을 좇는다(風從虎) 하였습니다. 이 운(雲)은 가진 힘을 다해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조운은 천자에게 예를 올린 후, 마초를 향해 다가갔다. 마초는 어지럼증이 좀 나아졌는지 나뭇등걸에 기대어 호리병에 담긴 뭔가를 마시고 있었다.
“그건 뭔가?”
“아, 자네도 마셔 봐. 전투 후에는 이게 최고지. 땀을 흘리고 나서 이걸 마시면 피로가 가신다고.”
조운은 마초에게 호리병을 건네받고 한 모금 마셨다. 마셔 보니 조운도 익히 아는 맛이었다. 누구나 좋아하지만 자주 먹을 수는 없는 귀한 재료로 만든 것이었다.
“이건 꿀물이잖아?”
“얼마 전에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꿀물을 좀 모으게 됐지. 그런데 폐하께서는 또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꿀물을 안 드시니 우리 같은 수하들만 먹을 복이 터졌다네.”
마초는 그렇게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유협은 꿀물 천자 흉내는 장수의 곁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계략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정작 꿀물이 모인 후에는 꿀물을 입에 대지 않았다. 문무백관들도 그런 유협의 마음가짐에 감복하여 같이 꿀물을 탐하지 않았다.
그러니 기껏 구한 꿀물들은 매일 마초와 나관중의 뱃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지… 짐이 꿀물이 싫어서 멀리하는 것은 아니니라!”
유협이 그렇게 말하자 마초는 빙글빙글 웃으며 꿀물이 든 호리병을 건넸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이곳에는 백관들의 보는 눈이 없으니 이 꿀물을 좀 드십시오. 폐하와 신들만의 비밀입니다.”
“으음…….”
열네 살의 나이로 방금 전까지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던 유협이다. 달콤한 음식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소년 천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호리병을 세워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달콤한 꿀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맛이 어떠십니까?”
“…천자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피난길에서 먹는 꿀물은 그만큼 맛있었다. 이 정도면 피난길에서 꿀물을 찾다가 부하에게 면박을 당하는 천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협과 마초는 서로 마주 보며 씩 웃었다.
* * *
마초의 서찰을 받은 조운은 그날로 의종의 단원들을 이끌고 나는 듯이 달려서 하내에 이르렀다. 오는 길에 선비족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어가를 구해냈는데, 어가를 지키는 호위무사 상홍에게 천자가 군졸의 복장을 하고 몸을 피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호거아를 죽이고 천자를 구해낸 것이다.
잠시 후, 의종에 의해 목숨을 구원받은 상홍과 호위들이 다시 천자를 알현했다.
“폐하! 으흑흑흑!”
상홍은 유협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큼지막한 어깨를 들썩이며 목 놓아 울었다. 화살을 몇 대나 맞아서 중상을 입었지만, 이 튼튼한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다음 날이 되자 하내에서 출발한 황보숭이 천자 일행과 합류했다. 황보숭이 도착하자 백관들의 표정에서 비로소 불안감이 사라졌다. 황건란을 평정한 이 노장에 대한 신뢰는 그만큼 깊었다.
천자 일행은 다시 이틀을 더 가서 하내군에 이르렀다. 원래대로라면 닷새 정도 걸릴 거리였지만 천자 유협은 어가를 버리고 명마 조황비전에 올라타서 길을 재촉했다.
“지금은 수레 위에서 천자의 위엄을 보일 때가 아니다. 말 위에서 이각에게 빼앗긴 천하를 되찾아야 할 때다.”
장안을 떠나 풍익에서, 홍농에서, 하동에서, 하내에서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긴 유협의 얼굴에는 어느새 늠름한 기품이 생겨 있었다. 백관들은 그런 유협을 보며 조금씩 희망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망할 날만 기다리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천자께서 이토록 의젓하시니 어쩌면…….’
‘이 싸움만 이기면 희망이 있다.’
5년 동안 동탁과 이각의 폭정을 겪어 온 사람들의 머릿속에 조금씩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천자가 하내태수의 치소가 있는 온현에 도착하자 5로 근황병의 대장들이 일제히 나와서 도열했다.
“하내태수 장양이 성상 폐하를 뵙사옵니다.”
“영집장군 단외가 성상 폐하를 뵙사옵니다.”
“에, 저는 남흉노 어부라 선우의 아들 표입니다. 남흉노를 대표해서 왔습니다.”
“강족, 아단부의 철리길입니다. 정서장군 마등을 대신해서 성상 폐하를 뵙습니다.”
갑주까지 갖춰 입은 유협은 4로 근황병에게 군례로 예를 표시했다. 원래는 백파적 두목 한섬도 근황병의 인물이었지만 중간에 배신하고 도망쳤다. 그러나 마침 하내로 향하는 길 위에서 5번째 근황병 대장을 구했다. 그가 유협에게 예를 올렸다.
“백신(白身, 벼슬이 없는 몸) 조운입니다. 비록 재주 없사오나 고향의 벗들과 함께 근황의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유협은 일개 의용군 대장인 조운에게도 정성껏 군례로 답례했다.
그런 유협을 향해 시중 마우가 도끼를 내밀었다. 작은 날이 달린 의식용 도끼, 부절이었다. 유협은 부절을 받아들고 좌중의 백관들을 향해 말했다.
“역적들이 조정을 어지럽혀서 천하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지 오래다. 짐이 역적을 칠 뜻을 품은 지 오래이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때를 기다리고 있었노라. 다행히 하늘이 대한의 사직을 버리지 않으셔서, 다섯 갈래 의로운 군사들이 이처럼 짐을 돕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모두의 빛나는 눈빛이 유협에게 모였다. 유협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태위 황보숭.”
“예, 폐하.”
“그대를 근황대도독으로 임명한다. 짐을 대신해 5로 근황병 전체를 그대가 통솔하라. 근황병에 참여한 자로서 그대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곧 짐을 거역하는 것이니, 그런 일이 생기면 이 부절로 그대가 짐을 대신해 목을 쳐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근황대도독 황보숭은 두 손으로 천자가 하사하는 부절을 받아들었다. 이제 5로 근황병은 전원 황보숭의 지휘를 받게 될 것이다.
유협은 뒤이어 또 다른 한 명의 인사를 발표했다.
“마초.”
유협이 이름을 부르자 마초가 유협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더 이상 검은 옷과 삿갓 차림이 아니었다. 그가 입은 갑옷은 잘 손질되어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머리에는 사자 모양을 본뜬 투구를 쓰고, 투구 끝에는 풍성한 흰 술이 매달려서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유협은 앞으로 나온 마초에게 곱게 접힌 비단 전포를 내밀었다.
“폐하, 이 전포는…….”
“짐의 형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물건이다. 일찍 돌아가셔서 전장에 나갈 일은 없었지만. 형님께서 체격이 크셨으니 그대에게는 좀 클 수도 있겠구나. 입어 보아라.”
천자 유협의 형님이라면 동탁에 의해 폐위되어 죽음을 맞이한 소제, 유변이다.
마초는 유협의 눈을 바라봤다. 유협의 눈에 단호한 의지만이 떠올라 있는 것을 확인하자 마초도 사양하지 않고 전포를 펼쳐서 몸에 둘렀다.
“오오…….”
마초가 전포를 걸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전포는 천자가 쓰려던 물건이니 당연히 최상등품이었다. 비단 전포는 녹색과 청색의 중간쯤인 은은한 비색이었다. 비취의 빛깔을 닮은, 훗날 청자의 색으로 더 유명해지는 그 색이다.
펄럭.
마초는 무장치고는 체격이 날씬한 편이라 비색 전포가 약간 컸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전포가 크게 휘날리는 모습이 오히려 멋을 더했다. 지켜보는 백관들은 전포 자락을 휘날리는 마초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유협은 비색 전포를 걸치고 사자 투구를 쓴 마초를 바라보며 검을 한 자루 내밀었다.
“마초, 그대를 근황부도독으로 임명한다. 근황병의 선봉이 되어 이 검으로 역적을 쳐라.”
마초는 천자의 보검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신이 선봉에 서서 역적을 치겠나이다.”
근황대도독 황보숭의 휘하에 장양, 단외, 표, 철리길, 조운으로 이루어진 5로 근황병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하내의 벌판에서 장수가 이끄는 군사들과 회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 선봉에는 근황부도독 마초가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