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마초가 흉노 선우를 만나다
흉노(匈奴)는 기원전부터 중국 북부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강역을 가진 거대한 유목 제국이었다.
흉노 제국이 남긴 앞선 철기와 화려한 금 세공품은 그들이 단순한 북방 유목민족이 아니라 강력한 제국이었음을 말해 준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한나라도 수백 년에 걸쳐 흉노 제국과 싸움을 벌였으며, 초기에는 전황이 불리하여 한의 천자가 흉노 선우(單于, 대족장)의 동생임을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흉노 제국의 영광은 한 무제의 원정과 함께 막을 내린다. 흉노 제국의 심장부 몽골 초원에서 대학살이 일어난 후, 흉노는 다시 예전의 영광을 찾지 못했다. 이후 흉노는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열되었다. 계속 초원에 남아서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하는 이들을 북흉노, 중국 대륙에서 한나라 정부와 화친하며 살아가는 무리들을 남흉노라고 불렀다.
어부라는 그런 남흉노의 선우였다.
과거에는 백등산에서 고조 유방을 무찌른 묵돌이나, 왕소군을 데려간 호한야 같은 잘 나가는 선우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했다. 흉노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서, 이제 어부라 선우가 갖고 있는 고민은 그저 먹고 사는 것이었다.
“지난 5년간 별짓을 다 해 봤는데 살림살이가 나아지질 않는구만.”
5년 전, 천자 유굉이 죽고 동탁이 정권을 잡았다. 어부라는 그때부터 백파적과 함께 약탈을 해 보기도 하고, 반동탁연합에도 참여해 보고, 원소와도 싸워 보고, 조조와도 싸워 봤다. 그리고 매번 졌다.
“이제 유목과 약탈만으로는 살 수 없는 시대다. 한인들이 정신없이 권력다툼을 하고 있으니 여기에 잘 끼어들어서 한몫 단단히 잡아야 해. 그래야 후손들이 발 뻗고 살아갈 수 있다.”
문제는 항상 상대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었다.
유목민이 한인들보다 싸움을 못 할 리 없지만, 어부라가 최근 싸웠던 상대들은 동탁, 원소, 조조였다. 상대를 잘못 만나서 판판이 깨졌으니 그가 보기에 요즘 한인 군벌들은 죄다 곽거병이요, 위청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자신감을 상실해 버린 어부라에게 마초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천자의 조서까지 들고 있었다.
“그래서… 근황병이 돼서 당금 천자와 함께 이각과 싸우라고?”
“그렇소. 선우께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오.”
“이봐, 젊은 친구.”
어부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초를 보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제 어부라도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욕망에 휘둘려서 무모한 결정을 내릴 상황은 아닌 것이다.
“이기면 우리에게 이득이 크다는 건 알겠네. 그런데 말이야. 지면 어떻게 되지?”
“지면 남흉노의 세력은 더 쇠퇴하겠죠.”
“그걸 아는 사람이 나보고 파병을 하라는 건가?”
“선우께서는 어째서 질 것부터 걱정하시오?”
마초는 그렇게 말하며 어부라를 쳐다보았다. 어부라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봐, 우리가 옛날 묵돌선우 시절의 흉노제국인 줄 아는가? 지면 지금보다 세력이 더 쪼그라들 걸세. 그 상태에서 갑자기 천하통일이 돼서 한인 권력자가 원정이라도 오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야. 알겠는가?”
“그건 졌을 때 얘기지요. 우리 근황병은 지지 않소.”
“어째서인가?”
“내가 선봉이 될 것이기 때문이오. 선우께서도 이 마초의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것이오.”
상산 전투에서 흑산적을 대파하고 장연의 목을 벤 자. 미오성 전투에서 여포군을 쫓아내고 미오성을 손에 넣었던 자.
마초의 이름은 중원의 명사들보다 초원의 유목민들에게 더 빠르게 퍼져나갔다.
“으흥, 좋아 좋아. 이길 확률이 높다는 건 잘 알겠네.”
“선우께서도 세상 이치를 잘 아실 것이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위험을 계속 감수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오. 이 난세에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면 천천히 죽어갈 뿐이오.”
“허허, 그런데 말이야 젊은 친구. 만에 하나라도 근황병이 진다면? 이각과 장제에게 남흉노가 대학살을 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나? 그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위험이 아니야. 그러니 무리를 지켜야 하는 자로서 내 대답은 거절일세. 나는 그저 어디에도 끼지 않고 조용히 살면서 남흉노를 지킬 셈이야. 자, 더 설득할 말이 남았나?”
어부라는 그렇게 말하고 마초를 바라보았다. 더 내놓을 게 없으면 협상을 결렬시키겠다는 뜻이었다.
마초는 쓴웃음을 지었다.
“선우 어르신. 만약 근황병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디서 사실 생각이오?”
“그야 뻔하지. 지금처럼 병주를 떠돌며 유목 생활을 하는 거지.”
“그럴 줄 알았소. 그런데, 계속 그렇게 한다면 남흉노는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마초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에게도 씁쓸한 얘기였다.
“하북의 주인이 누가 될 것 같소?”
“그야… 공손찬도 있지만, 원소가 가능성이 높지 않겠나?”
“앞으로 5년이면 원소가 하북을 평정할 것이오. 원소가 유주, 기주, 청주를 손에 넣으면 병주가 무사할 것 같소? 흑산적 장연이 살아 있었다면 원소가 병주를 얻는 데 시간이 좀 걸렸겠지. 그런데 그 장연은 내가 죽여 버렸소.”
어부라는 말이 없었다. 마초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남흉노가 병주에서 얌전히 유목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앞으로 5년이오. 선우 어르신께 어디에도 끼지 않고 조용히 살면서 남흉노를 지키는 선택지는 없소. 근황병에 참여하거나, 이각에게 붙거나, 하다못해 조조에게 귀부하거나, 아니면 멸망하거나. 그것뿐이오.”
게다가 다른 문제도 있었다. 천하제일의 기병대장, 여포가 원소에게 합류한 것이다.
원래부터 강대했던 원소다. 회귀한 마초가 역사를 바꾸면서 원소는 더욱 강대해지고 있었다. 원래의 역사에서 원소가 하북을 평정하는 데는 앞으로 5년이 걸렸었다. 장연이 죽고, 여포가 합류한 지금이라면 아마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어부라는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고 마초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이내 픽 하고 웃음을 보였다.
“똑똑한 친구로군.”
“서량에서 강족들하고 협상하면서 단련된 덕분이지요. 자, 이제 피차 솔직하게 얘기합시다.”
“알겠네. 자네가 말한 원소의 팽창은 우리도 경계하고 있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어차피 병주가 원소에게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요. 그러니 서량으로 이주하시는 것이 나을 것이오. 북지군 정도가 좋겠지요.”
“북지군이라면… 장안의 북쪽이로군.”
“맞소. 그곳에서 잘 지내려면 장안의 주인과 우호 관계를 쌓아야만 할 것이오. 장안의 주인이 계속 이각일지, 아니면 근황병에 참여한 정서장군으로 바뀔지 잘 판단해서 결정하시오.”
“허허…….”
어부라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초를 바라봤다. 참으로 대담한 청년이었다.
“자네의 말이 맞네, 젊은 친구. 우리는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원소의 등쌀에 버틸 수 없을 거야. 하북을 평정한 원소에게는 딱히 남흉노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그들에게 이민족 기병이라면 오환족이 있고 말이야. 그러니 우리도 근황병이든, 이각이든 하나 선택해야만 하지.”
“그렇소. 그런데 근황병에는 나도 있고, 명장 황보숭 장군도 있고, 천자를 모시고 있다는 명분도 있소. 게다가 전쟁에 이긴 후, 서량으로 이주했을 때가 더 중요하오. 이각보다는 정서장군이 훨씬 얘기가 잘 통할 것이오. 어디를 택해야 하는지 자명하지 않소?”
“으허허, 똑똑하구나, 똑똑해. 이봐,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네.”
“무엇이오?”
“자네들이 제시한 금은보화의 양이 부족해. 이각은 장안성의 금은보화를 마구 뿌리고 있어서 그쪽에 귀부하면 훨씬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남흉노 전체의 운명을 생각하면 마초의 말을 들어서 근황병에 참여하는 게 맞다.
그러나 큰 무리를 이끄는 자는 항상 복잡한 내부 문제와 싸워야 하는 법이다. 선우 어부라 입장에서는 근황병 참여가 전체를 위한 최선의 결정일지라도, 그 휘하의 족장들에게는 이각의 편을 들었으면 받을 수 있었을 금은보화를 제대로 얻어내지 못한 호구 같은 협상을 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사정을 다 알면서도 그 핑계로 선우의 입지를 흔드는 족장들도 나올 것이다.
마초 또한 이런 이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수하들 입을 다물게 할 만한 조건을 약속하지요.”
“으흥, 그게 무엇인가? 비단 일이천 필을 더 얹어 준다고 메꿀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네.”
“양식.”
양식이라는 말을 듣자 어부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양식이 있는가?”
“당장은 입에 풀칠할 만큼밖에 없소. 그러나 서량으로 이주한다면 정서장군이 확보하고 있는 양식을 지원하겠소. 미오성에 쌓여 있던 양식들을 정서장군이 얻었소이다.”
인구가 늘어나면 양을 키우는 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유목민도 무리가 커지면 직접 농사를 짓거나, 농사짓는 사람들을 약탈해야 한다. 가장 흔한 경우는 한인 지방관들과 협상을 해서 마을을 약탈하지 않는 대신 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교역을 통해 곡식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가뭄이 들면서 곡식의 수확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한인들 먹을 곡식도 부족한 상황이니 유목민들과 교역할 곡식은 더 부족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흉노를 비롯한 유목민들의 약탈이 부쩍 늘었다.
그러나 애초에 곡식이 없어서 교역이 안 되는 것이니 약탈을 해도 성과가 시원치 않았다.
“과연, 양식을 받는 조건이라면 다들 찍소리 못하겠군. 알았네, 젊은 친구. 자네의 조건을 받지.”
협상은 타결되었다. 어부라는 남흉노 선우의 이름으로 근황병에 참여하고, 3천 군사를 하동으로 보내기로 했다. 싸움이 끝난 후 서량으로의 이주와 정착에 대해 정서장군부에서 편의를 봐준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어부라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마초를 전송했다. 군막으로 돌아온 그에게 아들 표가 찾아왔다.
“아버지. 결국 근황병에 참여하는 거요?”
“그래, 근황병에 참여하는 우리 남흉노군 대장은 표 네가 맡아라.”
“알았수다. 드디어 나도 중원에서 무공을 세울 수 있겠구만요.”
“아서라, 이 녀석아. 그저 몸 성히 살아 돌아오는 게 최선이다. 요즘 한인 놈들이 보통내기가 아니야. 행여나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일단 살아서 돌아와라.”
“흥, 알았소. 그런데 괜찮겠소? 연주목 조조하고도 귀부 얘기가 오가고 있었지 않소? 조조도 싸움은 잘하는데…….”
어부라는 아들 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 모자란 녀석아. 그건 원소의 기세가 하도 강성하니 어쩔 수 없이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재작년에 조조하고 싸움을 벌인 장본인이 이 애비인데, 조조에게 귀부한 상태에서 이 애비가 죽어버리면 네가 선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야…….”
“네 숙부 호주천을 선우로 세우라고 압력을 넣겠지. 전쟁의 책임이 있는 나의 직계 대신에 말이다. 알겠느냐? 이게 다 너를 선우로 세우려는 애비의 깊은 뜻이다.”
“으음… 고마워해야 하는 거지요?”
“그래, 이번에 출정을 나가면 한인 문사라도 하나 잡아 와라. 너는 공부를 좀 해야겠다.”
“공부요?”
“그래, 네놈은 보나 마나 한인 여자를 보쌈해 와서 신부로 삼을 생각만 꽉 차 있겠지만 그보다 선비를 잡아 와. 이제 시대가 변했다. 요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한인들하고 대화가 잘 통해야 해. 그러니 신부 말고 공부를 가르쳐 줄 선비를 데려와라.”
“에이, 한인 신부도 얻고 싶었는데… 알았수다.”
표는 잠시 툴툴거리다 아버지 어부라를 보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저 마초라는 놈은 어찌 보셨소? 내 또래밖에 안 돼 보이던데.”
“아주 가끔 있지, 저 나이에 저렇게 영리하고 대담한 놈이. 그런 자들의 최후는 둘 중의 하나다.”
어부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칼날과 화살 아래 죽거나, 아니면 영웅이 돼서 그 이름이 천 년 동안 전해지거나.”
마초가 어느 쪽이 될지는 어부라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일단 마초에게 걸어 보기로 했다.
‘어차피 한인 군벌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이다. 그런데 조조를 선택하면 차기 선우 자리를 아들놈에게 물려주기가 쉽지 않아.’
다만 휘하의 족장들을 납득시킬 명분이 필요했다. 근황병이 승산이 높고, 전쟁 후의 친선관계에도 유리하고, 양식도 받기로 했다는 정도면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말고 어부라에게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선우의 위엄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놈과 척을 지면 상당히 골치가 아플 것 같거든.’
마초와는 싸우기 싫다.
그것이 어부라의 마음을 움직인 또 하나의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