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근황병
그날부터 유협의 별명은 꿀물 천자가 되었다.
걸핏하면 백관들을 들들 볶으면서 꿀물을 가져오라고 패악질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런 유협에게 쓴소리하는 관리가 없었다.
‘천하의 황보숭 장군마저 시위를 시켜서 두들겨 팼는데, 우리 정도라면 그냥 참수당할 수도 있다.’
마침 난입한 황보숭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는 바람에 모두가 유협을 암군으로 보게 되었다. 황보숭은 의도치 않은 고육계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홍농에는 천자가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머리가 돌았다느니, 가정교육을 동탁에게 받아서 그렇다느니 하는 흉흉한 말들이 떠돌았다.
“짐은 꿀물이 있는 곳에 머무를 것이다!”
유협은 그렇게 외치며 백관들을 이끌고 하동으로 길을 떠났다. 가후에게 사전에 언질을 받은 장수는 유협의 하동행을 만류하지 않았다.
‘꿀물 천자는 곧 하동의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하동태수 왕읍과 천자의 사이가 벌어지면, 나는 가후를 통해 천자를 구슬려서 왕읍을 토벌하라는 조서를 받아내는 것이다.’
장수는 그렇게 하동을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꿀이나 잔뜩 구해 놓아야겠군.”
그런 장수를 뒤로하고 천자 유협은 동쪽으로 길을 떠났다. 가후와 마초, 나관중도 함께였다.
일행은 하동군에 도착하기 전, 어느 작은 마을에 머물렀다. 숙소로 쓸 건물이 모자라니 수행원들은 자연스럽게 노숙하게 되었다. 시중 마우의 수행원으로 위장하고 있는 나관중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한 천막을 쳐 놓고 노숙하는 나관중에게 마초가 찾아왔다.
“괜찮겠어, 관중? 너 하나 정도는 마 시중이나 충 대부에게 말해서 잠자리를 얻어줄 수 있다고.”
“괜히 눈에 띄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으니까요. 어차피 오늘은 여기서 만날 사람들도 있고요.”
잠시 후, 오늘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마초와 나관중을 찾아왔다. 이감과 월길이었다.
네 사람은 자리에 둘러앉아서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마초가 먼저 월길에게 물었다.
“월길, 아버지 쪽 상황은 어때?”
“만반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장안성 남쪽 종남산으로 비밀리에 사람과 물자를 옮겨 두었고, 장평관 인근 샛길도 여러 군데 확보해 두었습니다. 이각이 장안성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요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마등은 미오성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근거지인 서량 천수군에 틀어박힌 것처럼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실은 이각이 장안을 나섰을 때 바로 회전을 벌일 수 있도록 비밀리에 장안 근처에 병력과 기동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 한 번 싸움에 마가군의 모든 핵심 전력을 투입할 생각이었다.
“좋아. 이제 우리가 이각을 장안성 밖으로 끌어내면 된다.”
“그런데 주공, 어떻게 이각을 끌어내실 생각입니까?”
월길이 묻자 마초가 씩 웃었다.
“천자가 우리와 뜻을 같이한다. 이각과 장제를 역적으로 선포하고 천하에 이각 토벌의 조칙을 내려야지.”
“지금이요? 장제의 조카 장수가 바로 지척에 있는데, 그랬다가는 장수가 달려오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아니고 얼마 후에. 그리고 장수가 달려오면 짓밟아야지.”
“어떻게요? 군사가 없지 않습니까?”
“근황병을 결성한다.”
마초의 말투는 단호했다. 같이 계획을 짠 나관중과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있는 이감도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를 움직일 때 제일 중요한 건 식량이지. 하동에는 식량이 있어. 이 일대에 천자를 도와줄 만한 군웅들을 식량이 있는 하동으로 불러 모은다. 그들을 모아서 근황병을 결성하고, 조서를 내려서 이각과 장제를 역적으로 선포한다.”
“으음… 그러면 장수가 난리를 치면서 달려오겠군요.”
“그래, 그때는 근황병들을 이끌고 장수와 맞서 싸울 것이다.”
월길의 입이 벌어졌다.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여튼 한인들 문화는 배워도 배워도 아리송해요. 근황병? 그러니까 여러 부족을 모아서 칸을… 아니, 황제를 지키겠다는 거죠?”
“뭐 그런 거지.”
“그런데 누가 그렇게 달려오는 건가요?”
“다섯 명이 있지. 첫째는 하내태수 장양. 우리가 상산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그 사람이다. 둘째는 영집장군 단외. 화음현에 주둔하고 있지. 셋째는… 에휴.”
말하다 말고 갑자기 한숨을 내쉬는 마초 대신 나관중이 대답했다.
“셋째는 백파적 한섬입니다.”
“예? 백파적이요?”
“그렇습니다. 백파적의 힘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상황이 아쉬우니까요.”
한섬은 원래의 역사에서도 장안을 탈출한 유협을 호종했던 자다. 물론 충성심이 아니라 두둑한 보상이 목적이었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하, 주공께서는 도적들의 힘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안타까워서 한숨을 쉬시는 거군요? 캬, 역시 우리 주공은 의기가 있으셔. 싸움도 잘해서 그 유명한 곽사까지 베셨는데, 이렇게 의롭기까지 하시다니…….”
“아니, 뭐…….”
마초는 말을 흐렸다. 월길은 엉뚱하게 추측하고 마초를 칭찬했지만 사실 마초가 한숨을 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원래 천자를 호종했던 건 한섬 혼자가 아니라 양봉과 한섬이다. 그런데 양봉은… 내가 박살 내 버렸지.’
양봉이 이끌던 무리가 무려 삼천에 달하니 이럴 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봉군은 마초 자신의 손에 의해 해산되었다.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으니까.’
마초가 그렇게 양봉군의 삼천 병력을 아쉬워하는 동안 나관중이 월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장양, 단외, 한섬 말고 또 다른 인물도 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남흉노 선우, 어부라입니다.”
흉노라는 말을 듣자 월길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흉노가 온답니까?”
“올지 안 올지는 모릅니다. 주공께서 직접 가서 설득하실 예정입니다.”
“예? 조정의 관리들은 다 무얼 하기에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는 주공이 직접 가십니까?”
마초가 끼어들어 대답했다.
“내가 자원했어. 나만큼 이민족과 협상을 잘하는 인간은 없을 테니까.”
“음, 근데 흉노는 좀…….”
월길을 비롯한 아단부의 강족들은 오래전부터 흉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마초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걱정 마라, 월길. 그놈들이 아단부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할 테니까. 마지막 다섯 번째 근황병은 우리 마가군에서 달려오는 원군이야. 그런데 결국 누가 오기로 한 거지?”
“철리길 족장입니다.”
방덕이나 서황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들은 마등의 휘하에서 대 이각 전선에 투입돼 있었다. 이각과도 총력전을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방덕과 서황에게 미치지 못할 뿐, 철리길도 어지간히 싸움에 능한 자였다.
“예상대로군. 서량에서 하동까지 먼 길을 오려면 강족 기병대가 제일 적합할 테니까. 그러면 5로 근황군이 다 정해졌군.”
장양, 단외, 한섬, 어부라, 철리길.
전부 합치면 군사들이 1만이 훌쩍 넘을 것이다. 나름대로 싸울 만한 숫자가 갖춰지는 셈이었다. 이각과 장제 토벌의 조서를 내리고 이 군사들로 장수와 맞서 싸울 것이다.
월길은 그 말을 듣고 순수하게 감탄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감은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주공, 군사 수는 갖췄다고 하나 지휘 체계가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실제 전장에서 위력을 발휘하기는 힘들 겁니다. 장수가 이끄는 군사는 서량의 강병들이고 장수 본인도 용병술이 신묘한 자입니다. 근황병이 당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명장을 하나 끌어들였지. 각기 다른 곳에서 온 근황병들을 장악할 만한 위엄과 능력을 갖춘 자.”
“명장이라면 누구 말입니까?”
“태위 황보숭.”
“허…….”
이감은 감탄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황보숭은 본격적인 삼국지의 시대가 열리면서 무장으로서 은퇴했기 때문에 그 업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야말로 서량에서 숱한 반란을 진압하고, 황건적의 난을 토벌하며 쓰러져 가는 한나라를 떠받쳐 온 명장이었다.
그런데 황보숭을 잘 모르는 월길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면 그 황보숭이라는 사람이 근황병 대장이에요? 왜 주공이 대장이 되지 않고요?”
“나는 조정에서는 철저한 무명이야. 나이도 21살밖에 안 됐고. 내가 지휘한다고 장양, 단외 같은 사람들이 따를 리 없잖아? 그래서 일부러 대장을 맡을 만한 사람을 끌어들인 거라고.”
“에이, 그래도 실력은 주공이 최고잖아요?”
“황보숭도 명장 중의 명장이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싸움이 벌어지면 어차피 나도 총대장만큼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해.”
마초는 그렇게 월길을 다독이고 이감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감, 내가 알아보라고 했던 서주의 동향은 어떤가?”
“서주 자사 도겸이 죽었습니다.”
“그래?”
마초의 표정이 굳었다. 나관중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주공, 그렇다면 이제 곧 도겸이 올린 표문이 조정에 도착하겠군요.”
“그래, 이제 별로 시간이 없다.”
지금쯤 서주는 조조의 침공을 받아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조조는 두 차례에 걸쳐 서주에 침공해서 수십만의 백성들을 학살한다. 서주자사 도겸은 이때쯤 수명을 다하며 자신의 후임으로 서주자사를 천거한다. 바로 유비였다.
“유 사군이 서주에 기반을 잡았다. 이제 자신이 하북에서 쌓아 놓은 인맥들을 서주로 불러들일 것이다.”
유비가 황건적의 난에 의용군으로 참여하며 거병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청년기의 유비는 변변한 기반 없이 한직만 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비는 맨바닥에서 시작했지만 이때 이미 하북에서 명성이 높았다. 유비의 나이는 올해 서른 넷인데, 이 나이에 주자사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비교 대상이 원소, 조조, 공손찬, 원술처럼 쟁쟁한 군웅들이다 보니 속도가 느리게 느껴지는 것뿐, 이들보다 배경도 한미하고 나이도 예닐곱 살 적은 유비는 나름대로 최선의 길을 걷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유비가 드디어 서주에 큰 기반을 잡았다.
‘이제 유 사군을 존경하던 많은 인재들이 그의 밑으로 몰려들 것이다.’
그들 중 마초가 빼앗기기 싫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월길, 너는 이 길로 상산으로 달려라.”
“상산이라면… 조자룡을 만나고 오라는 말입니까?”
“그래, 가서 자룡에게 이 서찰을 전해. 늦으면 안 된다. 유 사군이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더 빨리 상산에 도착해야 한다.”
“흠… 그런데 서찰은 왜요? 조자룡은 주공의 등용 제의를 거절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 제의는 거절했지. 하지만 이 서찰을 쓴 사람의 등용 제의는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데요?”
마초가 월길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감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자.”
“예? 천자요?”
“그래, 천자에게 조서를 하나 써 달라고 했지. 지금 어가가 이동하고 있어서 호위 무사가 필요하니 상산의 의종을 이끌고 달려오라는 내용으로. 내 부탁은 거절했지만 천자의 어명은 들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마초는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악당 같은 웃음을 지었다.
“마가군에 들어오기 싫다면 천자 옆에 호위로 붙여 둬야겠어. 보나 마나 천자도 자룡을 보면 흠뻑 빠져서 중용할걸. 자룡은 내 친구고 나에게 빚을 갚을 게 있으니, 천자 옆에 붙여두면 언젠가 유용하게 쓸 날이 있을 거야. 하하하하!”
마초는 그렇게 말하고 흡족하게 웃었다. 나관중은 회귀자의 계산적인 우정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공이 치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이상 유 사군도 경쟁자가 아닌가.’
조운을 그대로 두면 경쟁자 유비의 세력에 들어갈 테니, 차라리 천자에게 붙여 두는 것이 낫다. 천자는 믿음직한 호위대장을 얻어서 좋고, 마초는 천자 곁에 자신의 인맥을 심어 놓아서 좋은 것이다. 조운 본인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천자가 옥새를 찍어서 조서를 보낸 이상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행은 다시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헤어졌다. 월길은 그대로 상산으로 달려가서 조운에게 천자의 조서를 전하기로 했다. 이감은 시랑군을 움직여서 계속 전령 활동을 수행하기로 했다. 일부는 원군으로 달려오고 있는 철리길과 연락을 하고, 일부는 장안에 잠입해서 첩보 활동을 한다. 다른 일부는 하동 일대를 정찰하기로 했다.
마초와 나관중은 천자 유협에게 조서를 받아서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우리는 남흉노 선우 어부라를 설득해서 5로 근황병의 하나로 끌어들인다.”
“5로 근황병이 다 모이면, 천자는 조서를 발표해서 이각과 장제를 역적으로 선포하겠지요. 그러면 홍농의 장수는 근황병을 치기 위해 하동으로 달려올 테고요.”
“그래. 그때 내가 근황병의 선봉에 서서 장수를 꺾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각은 근황병과 싸우기 위해 장안성을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