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암군이 되어보세!
마초와 천자의 회동 이후, 천자 일행의 이동 속도는 훨씬 빨라졌다. 마초가 궁녀와 환관들을 수레에 태우도록 간언한 탓이다. 그렇게 속도를 낸 탓에 천자 일행은 장수보다 한발 빠르게 홍농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제에게 억류된 것처럼 꾸며서 홍농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후가 천자 일행을 영접했다.
“성상 폐하께서 무사히 도착하셨으니 참으로 천하의 큰 복이옵니다.”
그날 밤, 천자의 침소에서 유범, 마우, 충소와 마초, 가후가 마주 앉았다.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좌중을 둘러보며 천자 유협이 입을 열었다.
“경들이 애써 준 덕분에 홍농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허나 이제 곧 장제의 조카 장수가 도착할 것이다. 장제와 장수 또한 본래 동탁의 부하들이니 우리가 길게 의탁할 수 있는 자들은 아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하겠는가?”
상서 가후가 대답했다.
“하동으로 옮기셔야 합니다. 그나마 이 일대에서 식량 사정이 가장 나은 곳입니다.”
하동(河東)은 황하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하동군은 이름처럼 황하를 끼고 있어서 이 흉년에도 그나마 농사가 덜 파한 곳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간의대부 충소가 그 문제를 지적했다.
“가 상서, 하동태수 왕읍은 장제, 장수와 사이가 극히 나쁩니다. 사람됨이 대단히 꼬장꼬장한 인물이라 뇌물을 바치지 않아 장제, 장수가 손을 보려고 잔뜩 벼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하동으로 가시겠다고 하면 장수가 갖은 핑계를 대며 거절할 것입니다.”
“그러니 계책을 써야지요. 장수가 폐하께서 하동으로 가시기를 바라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유협이 말했다.
“어떻게 하면 장수가 짐이 하동으로 가는 것을 바라게 할 수 있는가?”
“폐하께서 암군이 되셔야 합니다.”
일행의 시선이 가후에게 집중되었다. 가후는 내쳐 말을 이었다.
“장수가 비록 재주 있다고 하나 한 세력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장제의 조카에 불과합니다. 폐하께서 어떤 행동을 하시더라도 장수가 단독으로 폐하를 핍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폐하, 암군의 흉내를 내십시오. 홍농도 양식이 넉넉지 않으니 식량을 물 쓰듯 낭비하십시오. 장수에게 아주 귀찮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장수가 하동태수 왕읍에게 떠넘기고 싶을 만큼 귀찮은 존재가 되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신이 장수에게 간언하겠습니다.”
가후가 장수에게 간언하려는 내용은 이랬다.
천자를 하동태수 왕읍에게 보낸다. 천자가 저토록 방탕하니 하동의 곳간이 곧 거덜 날 것이다. 그래서 하동태수 왕읍이 천자의 사치를 다 감당하지 못하면 그걸 빌미로 조서를 받아서 장제와 장수가 왕읍을 치고 하동을 손에 넣는다.
가후의 설명을 들은 일행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장수를 속이고 천자 일행은 하동으로 이동하는 계획이었다.
“가 상서의 지략이 실로 교묘하군. 짐이 제대로 암군 흉내를 내기만 하면 되겠군.”
“사실 그것이 더 걱정이옵니다.”
유협은 어려서부터 방탕하게 살아본 적이 없다. 방탕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 소년이 방탕한 천자 흉내를 내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마초가 끼어들었다.
“폐하, 이렇게 해 보십시오.”
마초는 방탕하게 보이기 위한 계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유협의 눈이 커졌다.
“실로 기발하구나. 마초, 그대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가?”
“신의 수하 중에 나관중이라는 서생이 있는데 기발한 생각을 잘 떠올립니다. 오늘 이런 얘기가 나올 줄 알고 천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추한 행동이 뭐가 있을지 물어봤더니 알려줬습니다.”
“그 나관중이라는 서생을 나중에 만나보고 싶구나. 확실히… 그렇게 한다면 누가 봐도 암군으로 보일 것이다.”
일행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초가 알려준 대로 행동한다면 장수는 유협을 위협적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는 철부지 천자라고 생각하게 될 만한 방법이었다.
* * *
며칠 후, 홍농태수의 치소.
이곳은 임시로 천자가 정무를 보는 대전으로 쓰이고 있었다. 며칠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던 천자 유협은 어쩐 일인지 대전에 나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탕!
유협은 손바닥으로 연신 서안을 내려치며 외쳤다.
“꿀물을… 꿀물을 다오!”
“폐하, 지금은 기근이라 꿀물이 없사옵니다.”
“닥쳐라! 짐이 꿀물을 먹고 싶다고 하지 않느냐!”
유협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환관들은 입장이 난처해졌다. 유협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철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살살 달랬으나 유협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런 환관들을 닦아세웠다.
‘에휴……,’
‘허허, 참…….’
그 모습을 지켜보는 문무백관들은 다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총명하던 소년 천자가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정신이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이 기근에 꿀물을 찾고 있으면 누가 봐도 철부지 천자로 보이겠지. 마초가 참으로 기발한 생각을 했구나. 아니, 마초의 수하 나관중이라는 자의 생각이라고 했던가?’
그때, 삼공의 조복을 입은 한 관리가 앞으로 나섰다.
“폐하.”
눈처럼 흰 수염과 머리가 나이가 지긋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두툼한 어깨선이 조복 위로 드러났다.
관리는 천자 유협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문무백관들은 그가 나서자 모두 하던 생각을 멈추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만큼의 존재감을 가진 인물이었다.
털썩.
그가 부복하자 땅이 들썩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신, 태위 황보숭이 아뢰옵니다.”
깊은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낮고 큰 목소리가 대전을 가득 메웠다. 천자 유협은 그 목소리를 듣자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고 놀랐다.
‘잠깐, 놀라는 척하면 안 되지.’
유협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방탕한 황제다운 자세로 삐딱하게 앉아서 황보숭을 내려다보았다.
“황보 태위가 무슨 일이오?”
“폐하. 지금은 비가 내리지 않아 고금에 짝을 찾을 수 없는 대기근입니다. 사직이 위태로운데 어찌 달콤한 음식을 탐할 생각을 하십니까?”
“뭐야?”
유협은 일부러 큰 소리를 내질렀다. 황보숭에게는 미안했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 암군의 흉내를 내야 했다.
“폐하, 백성들은 입에 풀칠할 양식도 거두지 못하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벌집을 따서 꿀을 만들겠나이까?”
“천자가 꿀물을 먹어야겠다고 하는데 경은 무슨 잔말이 그리도 많소!”
“폐하, 꿀물은 없사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백성들의 핏물뿐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꽝!
황보숭은 그렇게 말하며 대전의 바닥에 머리를 짓찧었다. 이마에서 바닥을 적실 정도로 피가 흘렀다.
유협은 당황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유범, 마우, 충소 모두 예상치 못했던 일인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상서 가후가 고개를 들어 그런 유협을 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끌어내십시오.’
유협은 표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외쳤다.
“뭣들 하느냐! 시위들은 당장 황보 태위를 모셔라!”
황명이 떨어지자 시위들이 일제히 달려와서 황보숭을 둘러쌌다. 그들 중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서서 황보숭에게 무릎을 꿇고 주먹을 포개 군례를 올렸다.
“태위 어르신,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시위들은 황보숭에게 용서를 구한 뒤 양쪽에서 황보숭의 팔을 잡고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황보숭의 몸은 땅에 뿌리를 박은 듯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 고관이 아니라 숱한 전장에서 군공을 세운 무장이기도 했다. 그러니 일신의 무공 또한 만만치 않았다.
“크윽…….”
황보숭을 들어 올리기 위해 힘을 쓰던 시위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황보숭은 개의치 않고 계속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외쳤다.
“폐하, 몸의 고단함을 이겨내시옵소서! 부디 백성을 살피시어 성군이 되어 주시옵소서!”
갑자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자 유협은 당황했다.
‘태위 황보숭… 이제 조용히 은퇴할 날만 기다리는 줄 알았더니, 아직 저런 기개가 남아 있었던가. 실로 충신이로구나.’
그러나 충의를 드러내기에는 때가 좋지 않았다. 애초에 암군의 흉내를 내서 귀찮은 짐덩어리가 되기로 한 유협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감히 천자가 꿀물을 먹겠다는데 토를 달아! 저 늙은이를 당장 끌어내라!”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후는 조용히 시위 중의 한 명을 불러서 귓속말을 했다. 챙이 넓은 투구를 눌러쓰고 눈을 가리고 있는 마초였다.
가후에게 귓속말을 들은 마초는 고개를 끄덕이고 황보숭에게 다가갔다.
“태위 어르신.”
마초는 황보숭의 옆에 서서 황보숭을 불렀다. 그러나 황보숭은 마초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초는 작게 한숨을 쉬고 바닥에 엎드린 황보숭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뻑!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황보숭이 옆으로 쓰러졌다. 무공이 깊어서 시위들이 힘을 써도 꿈쩍도 하지 않던 황보숭이다. 그러나 마초가 힘껏 걷어차자 입에서 피를 뿜으며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백관들의 눈이 커졌다.
마초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보숭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우고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흰 수염이 성성한 얼굴이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황보숭은 그렇게 얼굴이 피로 물들어 가는 와중에도 꼿꼿한 자세로 눈을 부릅뜨고 천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황보숭이 두들겨 맞으면서도 뻗지 않자 마초는 조용히 속삭였다.
“어르신. 폐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적당히 쓰러지십시오.”
그 말을 듣자 황보숭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깊은 뜻이라?”
“장수를 속이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협조해 주십시오.”
마초는 그렇게 속삭이고 황보숭을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60평생 한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황건적의 난을 토벌한 충신 중의 충신이 천자의 시위에게 참혹하게 두들겨 맞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백관들의 표정은 누구 할 것 없이 침통해졌다. 천자를 감시하기 위해 대전에 들어와 있는 장수의 부하들은 숫제 대놓고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털썩.
이윽고 황보숭이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지자 시위들이 그의 양팔을 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실신한 황보숭이 끌려 나간 길을 따라 얼굴에서 흐른 피가 길게 이어졌다.
유협은 그렇게 황보숭이 끌려 나간 뒤에도 꿀물을 가져오라고 계속 난동을 부렸다. 시중 마우가 어디선가 청동 잔에 담긴 액체를 가져와서 유협에게 올렸다.
“폐하, 쌀엿으로 만든 감주이옵니다. 이것도 간신히 구한 것이니 부디 노기를 가라앉히소서.”
“닥쳐라! 꿀물을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마 시중, 그대가 짐을 능멸하는 것인가!”
유협은 감주 잔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날뛰었다.
“감히 천자가 꿀물을 먹겠다는데 양식이 없다는 핑계를 대! 이렇게 넓은 천하에 천자에게 꿀물을 대접할 만한 고을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냐! 이런 쓸모없는 놈들!”
어린 유협의 연기는 실로 근사했다. 누가 봐도 감쪽같은 소년 암군이었다. 평소에 워낙 자신을 억누르고 살아와서 속에 쌓인 게 많았던 탓이었으리라.
유협이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친 후, 가후는 장수를 찾아갔다.
“장군,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아아, 천자가 꿀물이 먹고 싶다고 길길이 날뛰었다는 이야기?”
장수는 피식 웃었다.
그는 변방의 최전선에만 있어서 천자 유협의 됨됨이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니 그에게는 천자 유협이 그저 암군으로만 생각되었다.
“참으로 귀찮은 꼬마로고. 내 맘대로 두들겨 패버릴 수도 없고, 어떻게 할까?”
“하동으로 보내시지요.”
“하동으로? 하동태수 왕읍에게 보내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천자가 저토록 성정이 거칠고, 왕읍은 꼬장꼬장한 자이니 분명히 하동에서도 문제를 일으킬 겁니다. 그때 천자를 부추겨서 왕읍을 토벌하라는 조서를 받아내는 겁니다.”
“으흠… 꿀물 천자를 활용해서 눈엣가시 같은 왕읍을 제거한다?”
장수는 가후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했다.
* * *
그리고 그날 밤, 황보숭의 침소.
천자에게 간언하다 엉망이 되도록 얻어맞은 그를 여러 중신들이 찾아왔다. 중신들의 한탄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황보숭은 밤늦게 그를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낮에 그를 두들겨 패서 끌어낸 천자의 시위, 마초였다.
“태위 어르신,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일이 부득이하여 그랬습니다.”
황보숭은 자신의 앞에 있는 마초의 얼굴을 바라보다 불쑥 물었다.
“폐하께서 장수의 눈을 속일 생각이라 하였지. 그렇다면 하동으로 가실 셈인가?”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늙은이는 꾀가 많다네. 나 또한 한나라의 녹을 먹는 몸으로써 폐하께 충성을 다할 셈이니 걱정하지 말게.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자네는 아마…….”
황보숭은 자신을 때린 시위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직접 그의 공격을 받아 보니 천하에서 적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절정고수가 틀림없었다. 지금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고수 중 스물 남짓한 청년은 단 한 명. 상산에서 장연을 베고 미오성에서 여포를 쫓아낸 그 사내뿐이다.
“정서장군 마등의 아들인가.”
“그렇습니다. 마초, 자는 맹기라고 합니다.”
마초와 황보숭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마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르신의 힘을 빌려주십시오.”
“이 늙은이에게 무슨 힘이 있겠나?”
“태위 어르신께서는, 아니 황보 장군께서는 천하가 다 아는 명장이십니다. 저는 다가올 큰 싸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때 장군의 힘이 필요합니다.”
황보숭은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시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황보숭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와 함께 싸워 주면 자네는 나에게 무얼 줄 것인가?”
“장군께서 가장 가지고 싶어 하시는 것.”
마초의 눈이 빛났다.
“이각의 목을 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