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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초연의-74화 (74/306)

74화. 풍익의 불청객

194년 여름, 관중 평야에는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았다. 이미 작년부터 이어진 가뭄으로 황도 장안에서도 아사자가 나오고 있었다. 극심한 가뭄은 이듬해까지 계속되고, 심지어 그다음 해인 196년도 흉작이 들 예정이었다. 그러나 장안에 그것을 아는 사람은 마초와 나관중밖에 없었다.

가뭄 말고도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지금은 아사하는 사람보다 화살과 칼날에 죽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이가 틀어진 이각과 곽사가 장안성에서 큰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연일 팽팽하던 전황은 홍농의 장제가 달려와 이각 편으로 참전하며 급격히 기울었다. 슬슬 사람들의 귀에는 곽사의 군대가 패주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천자 유협은 양식을 구한다는 핑계로 장안을 떠나 동쪽의 홍농으로 향했다. 많은 문무백관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천자를 수행하는 시중 마우는 당연히 유협을 따라 홍농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초와 나관중은 시중 마우의 수행원으로 위장하고 어가를 따라 길을 나섰다.

“이각이 천자를 붙잡지 않아서 다행이군.”

챙이 넓은 삿갓으로 푸른 눈을 가린 채 평범한 말에 올라타 있는 마초가 말했다. 절영은 지나치게 눈에 띄기 때문에 짐수레를 끄는 말과 바꿔놓은 상태였다.

옆에서 같이 말을 몰던 나관중이 대답했다.

“워낙 생각이 없는 자니까 천자가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겠지요. 게다가 가 상서의 계략에 완전히 넘어간 모양입니다.”

“그래. 이각 휘하의 강족과 선비족 부대가 하룻밤 사이 해산됐다지?

“그렇습니다. 가 상서가 몰래 강족과 선비족 두령들에게 금을 주고 밤을 틈타 고향으로 돌려보낸 모양입니다. 이각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민족 부대가 하룻밤 만에 와해되었습니다.”

“실로 앉은 자리에서 천 리를 내다보는 지모로군.”

마가군과의 싸움이 시작된 이후, 이각의 세력은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줄어들고 있었다. 최대 연합세력인 곽사와는 불화가 생겨서 내전을 하고 있는 상태다. 이민족 부대는 가후의 계략으로 그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다. 또 다른 연합세력인 우장군 번조는 이각이 사위를 시켜 목 졸라 죽였다. 장평관을 지키는 이몽과 왕방, 더러운 일을 맡은 송과 등 이각의 측근들이 죽어 나갔다.

강대했던 이각이지만 알게 모르게 세력이 기울고 있었다.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은 마초와 나관중, 그리고 가후였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각이라도 장제의 원군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겠지. 장제는 어떻다고 하던가?”

마초는 말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 아래에는 어느새 삿갓으로 얼굴을 감춘 또 다른 사내가 다가와서 마초와 나관중 옆에서 걷고 있었다. 첩보와 전령을 담당하는 시랑군 대장 이감이었다.

“예상했던 것 이상입니다. 첫 싸움에서 곽사의 부장 최용과 장제의 조카 장수가 붙었는데, 장수가 최용을 대파했다고 합니다.”

이감의 말을 들은 마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수라면 원래의 역사에서 형주 완성을 점거하고 군웅의 위치에까지 올랐던 자다.

형주를 다스리는 유표는 무력이 아니라 조정의 관직과 문사로서의 명성을 기반으로 군웅이 된 자였다. 그러니 전투에 나설 만한 무장을 항상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는 군웅 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 객장들을 끌어들여서 자신을 위한 칼 역할을 하게끔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유비, 황조, 그리고 장수다.

마초가 이감을 보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곽사는?”

“첫 싸움에서 패한 후 장안에서 사라졌습니다. 장안에 남은 곽사군의 잔당은 이각과 장제가 살육하고 있다고 합니다. 장제는 곧 정서장군께 대적하기 위해 서량으로 출병하고, 장제의 조카 장수는 홍농을 지키러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장수가 어가를 곧 따라잡겠군.”

“그렇습니다. 아마 홍농에 도착하기 전에 어가 행렬에 합류할 것입니다.”

그러자 마초는 옆의 나관중을 바라보며 물었다.

“관중, 어떻게 생각해? 곽사는 행방불명이라는데”

“…가 상서의 예상이 그대로 들어맞는군요.”

이각으로 하여 홍농의 장제를 끌어들이게 한다는 계책을 생각한 것은 가후였다. 그는 장제가 장안으로 온 이후의 정세에 대해 이렇게 전망했었다.

—곽사와 이각은 서로의 군세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장의 세력은 이각이 강해 보여도 쉽게 승부를 가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장제는 오랫동안 홍농에서 군사들을 조련했으니 군사들이 모두 날래고 건장합니다. 장제가 이각의 편으로 참전한다면 곽사가 당해내기 어렵습니다. 어가가 홍농에 닿기 전에 곽사의 패배 소식이 들려올 것입니다.

결과는 과연 가후의 예상대로 되었다.

“주공, 가 상서가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고 가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그대로 따라야 되겠습니다.”

“으음…그건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고.”

가후가 알려준 계책대로 행하기 위해서는 곽사가 가후의 예상대로 움직여야 한다. 곽사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는 며칠 후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초는 이감과 몇 가지 계획을 더 논의했다. 마초를 따르는 일곱 명의 부하들은 계획에 따라 각각 흩어져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연락은 전령부대장 이감이 담당했다. 논의를 마친 이감은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천자의 행렬은 느렸다. 마초는 출발 전, 시중 마우에게 신신당부해서 어가 행렬의 속도를 최대한 올리도록 했으나 아무래도 만족스러울 만큼의 속도는 나오지 않았다.

“마 시중, 무조건 빠르게 이동해야 합니다. 이동이 느려지는 이유는 결국 사람의 걸음 속도에 전체 속도를 맞추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 같아서는 말의 속도에 맞추고 싶지만 천자는 수레를 타는 법이니 수레의 속도에 맞춰서 이동할 수 있도록 일행을 꾸리십시오.”

“마 공자,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가 않소. 천자의 수레는 그렇게 급하게 달리는 법이 없소이다. 무리해서 빠르게 가다 폐하의 옥체가 상하면 아니 될 일이고, 궁인들이 걸어서 천자의 수레를 따르는 것도 예로부터 정해진 법도요.”

“아니 열네 살이면 무쇠도 씹어 먹는데 좀 피곤하다고 몸이 상할 리 있습니까? 그리고 궁녀나 환관의 걸음 속도에 맞추면 될 일도 안 됩니다. 그들은 수레에 태워 버리고, 전체 행렬의 속도는 최소한 정예 보병들의 행군 속도에는 맞춰야 합니다. 황실의 호위들은 전부 정예병일 테니 행군도 빠를 것 아닙니까?”

“어허 이 사람, 말을 조심하시오. 황실의 일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처럼 되는 게 아니외다.”

마초는 답답해서 가슴을 치면서 성토했으나 마우는 요지부동이었다. 사실 일개 시중인 그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일이 어그러지면 궁녀와 환관들을 수레에 태우지 않고 걸어서 따르게 한 탓입니다.”

마초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돌아왔다. 심란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가 행렬은 그렇게 며칠을 동쪽으로 이동해서 장안과 홍농의 사이에 있는 한 고을에 닿았다. 장안의 동쪽에 있는 풍익군이었다. 어가가 도착하자 풍익의 관원들과 호족들이 나와 길게 늘어서서 어가를 맞이했다.

‘내가 회귀해서 제일 먼저 달려온 곳이군. 이곳에서 곤경에 빠진 아버님을 구출하고, 관중을 만났지.’

마초가 나관중을 돌아보자 나관중도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고작 일 년 남짓 지났는데 벌써 아주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군요.”

“그동안 워낙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풍익군의 대호족 팽가는 마초, 나관중과 좋지 않은 인연으로 얽혀 있다. 팽가장에 끌려가 두부를 만들던 나관중을 빼내 온 게 마초다. 지금은 정체가 알려져서 좋을 게 없으니 일단 숨어 있기로 했다.

천자는 풍익 태수의 치소로 들고 천자를 따르는 수행원들은 저마다 적당한 집에서 묵게 되었다. 시중 마우의 수행원으로 위장한 마초와 나관중에게 배정된 숙소는 다 쓰러져가는 헛간이었다. 지저분하고 불편했지만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장안에서 홍농으로 지나가다 보면 풍익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마초는 이감의 전령부대를 통해 풍익에 있는 지인에게 미리 연통을 넣어 두었다. 해가 지자 그 지인이 마초를 찾아왔다.

“맹기, 일 년 사이에 부쩍 늠름해졌구려. 상산에서, 미오성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들었소.”

“덕용, 그대가 곽사에게 앵속을 보내서 속여 주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오. 그보다 협객을 삼백이나 모았다고 들었소.”

풍익군 연사 장기와 마초가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장기는 워낙 수완이 좋은 자였다. 마초가 전해준 재물로 삼백 명이나 되는 협객들을 모아서 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아직 직급은 낮아서 풍익군의 연사일 뿐이지만 그렇게 많은 협객을 거느리고 있으니 일약 지역의 명망가 대접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잠시 한담을 나눈 후 장기가 본론을 꺼냈다.

“풍익 호족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소.”

“심상치 않다는 게 무슨 말이오?”

“알다시피 풍익 최대의 호족은 곽사의 처남 팽가요. 팽가가 주도해서 어가(御駕, 임금의 수레)를 탈취하려는 모의를 꾸미고 있는 것 같소.”

어가를 탈취한다는 것은 곧 천자 유협을 억류한다는 뜻이다.

“성상께서 비록 처지가 곤궁하다고는 하나 당금 천자요. 황실의 호위들은 수는 적어도 하나 하나가 다 장사들이오. 호족의 사병 따위가 황실 호위들을 당해낼 수 있겠소?”

“아마 지원군이 있는 모양이오. 팽가가 어딘가로 급히 심부름꾼을 보내는 걸 봤소이다. 어가가 내일까지 머무를 예정이니 내일 밤 군사를 일으켜서 천자를 겁박할 생각인 듯하오.”

천자의 행렬을 습격해서 천자를 사로잡아 인질로 삼는다.

이런 계획은 결코 호족들 따위가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초와 나관중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가 상서의 말이 또 맞았군요. 이제는 무서울 지경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똑똑할 수가 있나? 혹시 이 인간도 회귀한 거 아냐?”

마초는 그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가후는 이렇게 말했었다.

—곽사는 머리가 나빠 보이지만 싸움의 승패를 셈하는 데는 능통합니다. 장제가 참전하여 정면승부로 이길 수 없게 되면 계교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때쯤 천자께서는 장안을 빠져나와 곽사의 처남이 있는 풍익을 지나고 계실 테니, 곽사가 생각할 만한 계교는 뻔하지요.

“풍익에 있는 천자를 인질로 잡고, 자기 처남이 있는 풍익을 기반으로 재기하는 것.”

“지금은 기근이니,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는 장안 같은 대도시보다 농촌인 풍익이 낫지요. 마침 천자도 풍익에 있고요. 실리도, 명분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모든 것이 가후가 예상한 대로였다. 장기가 마초에게 물었다.

“맹기, 그러면 이제 어찌할 셈이오?”

“곽사가 어가를 기습할 것이니 그에 대비할 것이오. 곽사를 천자에게 투항시켜서 같이 이각에게 대항한다면 어떻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소?”

“허… 참으로 대담한 발상이오. 성공할 수 있겠소?”

“한번 시도해 보려고 하오. 여의치 않으면 내 손으로 베어버리고.”

마초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 * *

다음날 밤, 풍익 태수의 치소.

이곳은 지금 천자가 머물고 있는 행궁이다. 그러나 밤을 새며 천자를 지켜야 할 호위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천자가 있는 게 틀림없으렷다?”

“물론입니다, 매부… 아니, 표기장군.”

풍익의 부호 팽가의 안내를 받아 한 떼의 군사들이 행궁에 돌입했다. 그들을 이끄는 장수는 8척 5촌에 달하는 거구였다. 표기장군 곽사였다.

“좋아, 단숨에 천자의 침소로 들어가서 천자부터 확보한다.”

그러나 곽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횃불이 올랐다.

“표기장군,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병장기를 들고 들어온다는 말이오!”

마초의 제보로 인해 곽사의 복병을 미리 기다리고 있던 좌중랑장 유범과 그가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이런 제길, 이렇게 된 이상 모두 베어버려라!”

“우와아아!”

곽사는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유범의 군사들을 들이쳤다.

유범의 군사들은 전부 황실의 호위라서 무예와 용기가 출중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곽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두에 서서 그런 그들을 찌르고 베었다.

“나 또한 서량 최강이라 불리던 몸이다!”

여포를 제외하면 패한 적이 없는 곽사다. 무장으로서는 어쩌면 이각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듣고 있었다. 곽사의 대도가 가는 곳마다 호위들의 피가 흩뿌려졌다.

“모두 힘을 내라! 원군이 왔다!”

그때 곽사군의 뒤에서 함성 소리가 일었다. 장기가 협객들을 모아서 조직한 300명의 사병들이 곽사군의 후방을 들이쳤다. 용맹한 곽사군이지만 양쪽에서 공격을 받자 점점 대열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할 수 없군.”

곽사는 대도를 거두고 잠시 옆으로 물러났다. 옆에 있던 병사의 횃불을 빼앗아 품에 지니고 있던 앵속을 태우고 그 연기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크으으…….”

앵속을 태운 연기를 한껏 들이마시자 기묘하게 감각이 일그러졌다. 일시적으로 피로와 통증이 사라지고 감각이 가속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받아라, 이놈!”

호위 하나가 칼을 치켜들고 곽사에게 달려들었다. 곽사는 하나만 남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 호위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콱!

호위가 칼을 내려치기도 전에 곽사의 거대한 손이 호위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컥, 커억…….”

호위는 제대로 힘을 써 보지도 못하고 곽사의 손바닥 안에서 피를 뿜으며 죽어갔다. 앵속에 취한 곽사에게는 손을 타고 흐르는 피와 뇌수의 감각이 장난스럽게 간질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곽사가 특이한 체질인지, 앵속에 취하니 주변의 모든 것이 느릿하게 보였다. 날아드는 창칼도 너무 느려서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으하하하, 전부 죽어라!”

곽사는 광포하게 웃으며 닥치는 대로 호위들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눈은 게슴츠레 뜨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지금 상대하는 모든 자들의 움직임이 똑똑히 보였다. 대장 곽사가 선두에 서서 활약하자 그가 이끄는 군사들도 조금씩 힘을 냈다.

“곽사, 설마 이 정도의 무위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유범은 당혹스러웠다. 곽사의 무용이 뛰어나다는 것은 충분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설마 황실의 호위 같은 정예병들을 단기로 밀어붙일 정도의 괴력을 가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때 유범의 옆에 있던 간의대부 충소가 곽사를 향해 말했다.

“이제 그쯤 해 두시오, 표기장군.”

“응? 네놈은 충소 아니냐?”

“그렇소. 장제의 조카 장수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다고 하오. 설령 장군이 오늘 싸움에 이겨서 어가를 확보한다고 한들, 장수와의 싸움을 치르려면 군사들이 상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그러니 폐하를 알현하고 우리와 함께 폐하를 모시도록 합시다. 장군의 군사들과 우리가 힘을 합치면 장수에게 대항할 수 있지 않겠소?”

그러나 곽사는 코웃음을 쳤다. 있지도 않은 코에서 콧바람이 나와서 허공에 흩날렸다.

“충소, 네놈은 나를 돌대가리로 아는가? 장수가 오면 네놈들은 장수에게 붙어서 나를 치면 그만 아니냐? 잔소리 말고 천자나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전부 곤죽으로 만들어 주마.”

“표기장군, 우리는 모두 폐하의 신하들이오. 장군이 정 뜻을 꺾지 않는다면 그저 죽기로 싸울 뿐이오.”

“하여튼 글 읽었다는 놈들은 항상 그런 식이지. 지독한 겁쟁이거나, 아니면 현실 파악을 전혀 못 하는 얼간이거나. 왜, 죽기로 싸우다 보면 뭐라도 될 것 같나? 현실을 파악해라. 네놈들은 이름만 조정의 문무백관이지 아무 힘이 없다.”

충소의 얼굴에 은은한 분노가 떠올랐다. 앵속에 취한 곽사는 한껏 웃는 표정으로 그런 충소를 마주 보았다.

“남의 힘을 빌어서 먹고 사는 썩어빠진 문사놈들. 네놈들은 내가 배움이 없다고 비웃었겠지만, 네놈들 머릿속 정도는 나도 꿰뚫고 있다. 너희들은 어차피 서량 군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놈들이 아니냐? 이번에는 마수성이라도 불러들일 생각이겠지.”

앵속에 취하니 오히려 평소보다 혀가 매끄럽게 돌아갔다. 곽사는 한껏 조소를 띤 채 충소와 문무백관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마수성이의 큰아들은 크게 다쳐서 서량으로 돌아갔다고 하고, 둘째라는 놈은 승패도 셈하지 못하는 얼간이라서 여포하고 단기접전을 벌이다 결국 뒈졌다고 한다. 그러니 마수성이는 너희들을 도와주러 오지 못한다. 알겠느냐? 으하하하!”

곽사의 말을 들은 유범과 충소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곽사가 마등의 죽은 둘째 아들을 험담하기 시작하자 표정이 굳었다. 두 사람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한쪽 구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너희들은 표기장군이 말씀하시는데 어딜 쳐다보고 있어?”

“곽사.”

유범과 충소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내는 챙이 넓은 삿갓으로 눈을 가리고 등에 장도를 메고 있었다. 사내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안은 취소한다. 항복하지 마라.”

모두의 시선이 삿갓을 쓴 사내에게 꽂혔다. 사내는 느린 말투로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

“너는 내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죽을 준비나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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