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어가(御駕)는 장안을 떠나고
이각이 이끄는 군사들은 그날로 표기장군부를 들이쳤다.
보통의 경우, 권신 둘이 싸우게 되면 하나가 천자의 조서를 받아 오던가, 아니면 없는 죄명을 만들어서 명분을 세우려고 하지만 이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짜고짜 병사를 이끌고 곽사를 잡기 위해 쳐들어갔을 뿐이었다.
이각은 곽사를 빠르게 쳐 죽이고 그 부하들을 흡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곽사의 저항은 완강했다. 그 또한 팽 씨의 이간질로 인해 이각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표기장군부에서 앵속에 취한 여인들과 관계를 갖던 곽사는 벌거숭이가 된 몸으로 대도를 뽑아 들고 이각의 수하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겼다.
“치연, 네놈이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코도 없고 한쪽 눈도 없었지만, 그런 곽사를 당해낼 수 있는 병사는 없었다. 이각의 기습은 실패하고 곽사도 군사들을 휘몰아 이각의 군사들과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나라 최고의 세력을 갖춘 두 세력가가 맞싸우니 쉽게 승패가 나지 않았다. 원래부터 폭정과 기근으로 활기를 잃은 장안성이었다. 이각과 곽사의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자 성내의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졌다. 거리에는 이미 기근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는데, 그 위로 이각과 곽사의 사병들이 죽어 나가는 시체가 다시 한번 쌓였다. 때는 초여름이라 골목마다 쌓인 시체 더미 위로 지독한 냄새가 떠돌았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이각은 늘 하던 대로 조언을 구하기 위해 대사마의 치소로 가후를 불러들였다.
“가 상서, 곽사가 쉽게 죽지 않네? 어찌할까?”
이각은 마음이 상해서인지 입을 쑥 내밀고 있었다. 가후는 그런 이각을 보며 살살 달래듯이 말했다.
“그렇다고 곽 장군이 대사마를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결국 대사마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그보다 제 걱정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다른 곳? 그게 뭔데?”
“곽 장군을 제거한 이후입니다. 서량의 마등이 계속 세력을 키우고 있으니 토벌해서 후방을 안정시켜야 하는데, 곽 장군을 제거하게 되면 마등을 치기 위해 보낼 만한 장수가 마땅치 않습니다.”
“그건 그래. 마등을 때려잡으려면 나 정도가 직접 가야 하는데, 곽사까지 없애 버리면 장안이 혼란해질 테니까 내가 장안을 비우기 힘들겠지. 이럴 때 쓰려고 챙겨놓은 게 서영이었는데, 봉선이 놈이 멋대로 서영을 풀어줘서 마초한테 죽어 버렸잖아? 에잉…….”
그렇게 투덜거리는 이각을 바라보며 가후가 말했다.
“홍농의 장제 장군을 불러들이시지요.”
“장제를? 흠… 속이 시커먼 녀석인데 괜찮을까?”
장제는 이각, 곽사, 번조와 함께 동탁 휘하의 무장이었던 자이다. 동탁 사후 이들과 함께 난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는데 지금은 동쪽 홍농군에 따로 주둔하고 있었다. 암묵적인 서열은 이각, 곽사보다는 아래고 번조보다는 위인 3위였다. 누가 봐도 속이 시커먼 자였지만 이각에게 속이 시커멓다는 평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길길이 날뛰었으리라.
“장제 장군은 대사마의 곁을 떠나 독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 그러니까 따로 나가 살고 있는 거잖아? 그래서 나도 그놈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 거고.”
“그것을 역이용하십시오. 장제 장군을 끌어들여 곽 장군과의 싸움에 이용하고, 이후 마등을 토벌하고 서량을 기반으로 독립하라고 부추기는 겁니다. 홍농도 지금 기근이 들었는데, 서량의 마등은 백만 석이나 되는 양식을 갖고 있으니 장제 장군도 이 제안을 받을 겁니다.”
“으흥, 그야 마등을 상대하려면 장제 정도가 나서야 하기는 하지. 그런데 장제가 진짜로 마등을 때려잡고 독립해 버리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곤란하잖아?”
“그때는 장제 장군을 견제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장제 장군은 끔찍한 애처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인이 절세미인이라고 하더군요. 싸움터에 부인을 데려가지는 못할 테니, 장제 장군이 마등과 싸우는 사이에…….”
“아하! 장안에서 장제의 마누라를 인질로 잡고 뒤통수를 친다?”
이각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깔깔 웃었다. 며칠 만에 보이는 웃음이던가?
“역시 가 상서는 뭔가 다르다니까? 어쩜 이렇게 똑똑할 수가 있지?”
이각의 앙천대소와 함께 홍농의 장제를 끌어들이는 것이 결정되었다. 장안의 혼란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심해질 것이다.
* * *
이각의 구원 요청을 듣자 홍농의 장제는 나는 듯이 달려서 장안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천자를 알현하러 황궁으로 들어갔다.
“장제가 성상 폐하를 뵙습니다. 강녕하셨습니까?”
“평양후(장제의 작위)께서도 그간 무탈하셨소? 짐이 평양후를 기다린 지 오래요.”
장제는 천자 유협의 강녕에는 아무 흥미가 없었고 유협도 장제가 무탈한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단 그렇게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헌데 황궁 꼴이 왜 이렇습니까?”
장제는 허리에 두 손을 짚고 인상을 찌푸리며 황궁의 대전을 둘러보았다. 기물이 여기저기 부서져서 엉망진창이었다. 장제의 말을 들은 유협이 씁쓸하게 웃었다.
“대사마와 표기장군이 연일 싸움을 하니 이렇게 되었소. 서로 짐을 인질로 잡겠다고 황궁에 군사를 보내서 크게 싸움을 벌여서 그 와중에 이렇게 되었소이다.”
“어허, 이런 불충한 자들을 봤나! 폐하, 신이 두 놈 다 박살을 낼까요?”
“평양후의 마음만 고맙게 받겠소. 그보다 지금은 어떻게든 대사마와 표기장군의 싸움을 멈춰야 할 것이오.”
이각은 장제에게 이런 조건을 내세웠다. 자신의 편을 들어서 곽사를 같이 치고, 대신 이후에는 서량의 경영을 장제에게 맡기는 것이다.
장제는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척 병마를 이끌고 장안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사실 이각의 조건보다는 상서 가후가 제시한 계책이 더 마음에 드는군.’
가후는 이각의 사자로 장제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었다.
“홍농으로 어가를 옮기십시오.”
“어가를 옮기라고? 천자를 홍농으로 모시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천자를 모신다면 문무백관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됩니다. 혼란을 수습한다는 핑계로 천자를 홍농에 모셔서 새 조정을 열고 평양후께서 새 조정의 주인이 되십시오.”
가후가 계속 바람을 넣자 장제도 슬그머니 마음이 동했다.
‘그래, 이각도 나보다 조금 먼저 동탁 휘하에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대사마로 천하에서 가장 귀한 몸이 되었지 않은가? 허수아비 천자만 옹립할 수 있다면 까짓거 내가 대사마 못할 건 또 뭐야?’
그래서 장제는 가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가후,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
“일단 병마를 이끌고 장안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장안에서 큰 싸움이 날 것 같으니 천자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천자를 홍농으로 옮기십시오.”
“천자가 그 말을 따라 줄까?”
“천자께서도 장안의 전란에 신물이 난 지 오래입니다. 이각의 핍박을 피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으니 평양후께서 강하게 권하시면 그리하실 겁니다.”
“그럼 이각은? 이각이 반대한다면?”
“대사마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곽 장군과의 싸움을 끝내고, 이후에 마등과 싸우기 위해서는 평양후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강하게 나가시면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평양후께서는 곽 장군과의 싸움을 끝낸 후 홍농으로 돌아가서 천자를 모시면 됩니다.”
“마등을 치지 않고?”
“그렇습니다. 대사마는 홍농으로 가는 평양후를 쫓지 못할 겁니다. 뒤에는 마등이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장제가 가만히 들어 보니 맞는 얘기였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가후, 네놈은 이각의 사람이지?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속내가 무엇이냐?”
“그저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무슨 속내가 있겠습니까?”
“목숨을 구하고자?”
“그렇습니다. 곽 장군이 이긴다면 저는 그날로 죽은 목숨이고, 대사마가 이기더라도 곽 장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그 세력이 약해질 것이기 때문에 마등의 침략이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도 평양후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저를 억류하십시오.”
가후는 담담하게 장제를 보며 말했다.
“가후… 너를 내가 억류하라고?”
“그렇습니다. 그게 제가 살아날 길입니다. 평양후께서 제 계책을 따라서 어가를 홍농으로 옮기시면 그때 저를 쓰시면 됩니다. 만약 평양후께서 실패하신다면, 그때는 저도 억류당해 있어야 살아날 핑계가 되겠지요.”
장제는 가후를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솔직하구나! 마음에 들었다. 좋아, 너의 계책대로 하겠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장제는 가후를 홍농에 붙잡아 두고 자신이 직접 병마를 몰아 장안으로 달려온 것이다.
장제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천자 유협을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이각과 곽사의 싸움은 신이 말려 보겠습니다. 대신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말씀하시오.”
“장안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됐으니 천자가 머무를 만한 곳이 아닙니다. 가뭄으로 양식이 떨어진 것도 모자라서 대사마와 표기장군이라는 자들이 황궁까지 쳐들어와서 싸움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신의 근거지인 홍농에는 아직 양식이 있으니 홍농으로 이동하시지요.”
유협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짐에게 장안을 떠나라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홍농으로 옮겨서 그곳에서 난리를 피하십시오. 황궁 꼴이 이래서야 천자가 기거할 수 있겠습니까?”
긴 한숨을 쉰 유협은 장제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짐의 뜻이 평양후의 뜻과 같소. 장안을 떠나서 홍농으로 옮길 준비를 하겠소.”
“으하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핫핫하!”
장제는 크게 웃으며 유협의 결단을 칭찬했다. 천자만 아니라면 어깨라도 두드려 줄 듯한 태도였다.
그렇게 장제와의 면담이 끝나고 유협은 황궁 깊숙한 곳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고금의 서책들이 잔뜩 쌓여 있는 곳이었다. 시중 마우만이 그의 뒤를 따랐다.
서재에 자리 잡은 유협은 시중 마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장안을 떠나 풍찬노숙을 해야겠군.”
“신 등이 폐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러나 폐하,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폐하께서 장안성을 떠나시면 곧 역적을 주멸할 기회가 올 것입니다.”
유협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재의 깊숙한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가 사이로 유협의 목소리가 울렸다.
“충 대부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서가의 깊숙한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황궁의 서가에 숨어 있는 간의대부 충소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정서장군 마등과 그 아들 마초는 재주가 뛰어나고 담력을 갖춘 자입니다. 그들을 이용하여 역적들을 주멸하소서.”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짐에게 다른 방책이 없겠지. 허나, 그들이 충신이 아니라면 그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서가의 사이에서 한 명이 더 걸어 나왔다. 그는 얼마 전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이각의 눈을 피해서 충소와 함께 황궁의 서재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신 좌중랑장 유범이 아뢰옵니다. 일단은 동쪽으로 피하시고, 마등을 끌어들여 장안의 이각을 치게 하십시오. 폐하께서는 동쪽에서 사태를 관망하시다 마등이 의지할 만하면 의지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를 끌어들여서 균형을 맞추시면 됩니다.”
“다른 이라. 만약 서량병을 이끄는 마등이 장안까지 얻는다면 그 기세가 자못 대단할 것이다. 마등은 이각과는 달리 명망이 있는 자인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짐은 우려가 된다. 그가 만약 난신적자가 된다면 이각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적이 되지 않겠는가? 그럴 경우, 누가 마등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좌중랑장 유범은 천자를 향해 절을 올리고 말했다.
“그래서 더욱 동쪽으로 가셔야 하는 것이옵니다. 홍농까지 가게 되면 낙양이 지척입니다. 낙양까지 가게 되면 연주가 지척입니다.”
지금 연주를 지배하는 것은 연주목, 조조다.
나이 스물에 십상시의 아재비를 때려죽인 사내. 목숨을 걸고 동탁과 싸웠던 사내. 지금은 휘하에 용장과 강병을 거느리고 제후가 되어 있는 그 조조가 동쪽에 있다.
유협은 유범, 마우, 충소를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그들은 의심할 나위 없는 충신들이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마등을 끌어들여서 이각을 치려고 했던 게 바로 그들이다. 만약 계획이 조금이라도 새어 나갔으면 셋 다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좋다. 짐은 장안성을 나가서 동쪽으로 가겠다. 그리고 마등을 이용해서 역적 이각을 토벌하리라.”
만약 마등이 자신을 핍박한다면, 그때는 조조를 끌어들여 마등을 치리라.
열네 살의 소년 천자는 용포의 긴 소매에 가려 보이지 않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