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가후의 모략 (2)
시중(侍中)은 천자의 수행비서 격인 벼슬이다. 천자 유협의 곁에서 시중으로 있는 마우는 자신의 저택을 찾아온 손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군요. 설마 가 상서가 폐하의 편에 설 줄이야.”
가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우에게 대답했다.
“폐하의 편과 그렇지 않은 편이 어디 있겠소? 하늘 아래 폐하의 신하 되지 않은 자는 없소.”
“그건 충의지사들 얘기고, 가 상서에게 그런 충의가 있을 줄은 몰랐다는 말이오.”
마우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마초가 말했다.
“마 시중, 가 상서는 이미 우리와 뜻을 같이하기로 했으니 지난 일은 그만 들추시지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할 것입니다. 폐하께서도 가 상서를 아끼셔서 곁에 두려 하시지 않았습니까?”
“허허, 마 공자의 말이 맞소. 가 상서께서는 그저 속 좁은 선비의 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시중 마우는 좌중랑장 유범, 간의대부 충소와 함께 이각을 제거하기 위해 마등에게 내응하기로 했던 인사였다. 충소는 마초의 계책에 따라 마우가 거사에 동참하지 않은 것처럼 거짓 정보를 흘렸고, 마우는 계속 천자의 곁에 머무르며 천자 유협과 마초 일행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
마초가 다시 말했다.
“그래서, 폐하께서도 이각과 곽사 사이에 내분을 만드는 것을 승인하셨다고요?”
“그렇소. 빈틈없이 일을 진행해서 역적들을 몰아내도록 하라고 격려하셨소. 필요한 일에는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씀도 함께 내리셨소이다.”
이각이 저잣거리에서 천자 유협을 핍박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마초다. 천자는 원래의 역사에서도 오죽하면 장안을 떠나서 피난을 갈 만큼 이각과 곽사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예 시중 마우를 통해서 천자까지 끌어들이려는 게 마초의 계획이었다.
예상대로 천자는 마초의 계획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전해 왔다. 마초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천자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겠지. 이각에게 그토록 핍박을 받고 있으니.’
동탁, 이각, 곽사 같은 서량 군벌들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자라 온 천자다. 그가 일면식도 없는 서량의 마등과 마초를 진정으로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자를 진정으로 신뢰하지 않는 건 마초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목표는 그저 이 난세를 빨리 끝내는 것. 천자가 거기에 도움이 되는 한 함께 가면 그만이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건 그때 생각하고.’
어쨌든 지금은 천자가 이각과 곽사를 무너뜨릴 원군이 되어 줄 것이다. 마초는 시중 마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폐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도와드리라고 고하면 되겠소?”
마초는 대답 대신 가후를 바라봤다. 발상을 떠올린 것은 마초였지만 구체적으로 다듬어서 제대로 된 계책으로 만든 것은 가후였다. 가후가 마우에게 말했다.
“곽사에게 작위를 더해 주고 어의를 보내게 하시오.”
“어의를?”
“그렇소. 곽사가 이번 싸움에서 여포의 손에 크게 다쳤으니 영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천자께서 작위나 귀한 기물을 하사하게 하시고, 어의를 보내서 주기적으로 곽사의 병을 치료하도록 하시오. 어의라면 나라에서 제일가는 의원일 것이고 곽사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반갑게 맞이할 것이오.”
“알았소이다. 일단 천자께서 곽사를 아끼는 듯한 모습을 보이라는 거군요.”
“그렇소.”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곽사가 폐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알겠소? 그는 실로 짐승 같은 자요.”
“상관없소. 중요한 건 천자께서 곽사와 친하게 지내려는 모습을 보이시는 거요. 그렇게 되면 이각도 신경이 쓰일 거요. 그때 내가 나서서 계략을 실행하겠소.”
* * *
며칠 후, 대사마의 치소.
이각은 그날도 결재를 받으러 온 가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 상서, 곽사에게 선물을 보내라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요즘 천자의 동태가 수상합니다. 곽 장군에게 어의까지 보내서 병환을 치료하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혹시나 대사마와 곽 장군의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방책은 아닐까 걱정됩니다.”
“으흥, 설마 천자가 그런 꾀가 있을까? 열네 살 먹은 어린애잖아?”
“사실 별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일 가능성이 클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미리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요.”
“그래서, 선물을 보내려면 뭘 보내야 하나? 사실 지금도 내가 곽사에게 온갖 편의를 봐주고 있다고. 걔는 마누라가 그렇게 무서운지 집에 첩도 못 들이는 애라 내가 대사마 치소에 방까지 만들어 줬잖아? 마음껏 계집질하라고.”
“당귀가 어떻겠습니까? 당귀는 고구려 당귀를 최고로 치는데, 요즘 세상이 혼란해서 먼 동쪽으로 나가는 상행이 거의 끊어졌으니 고구려 당귀는 구하기 어렵습니다. 마침 지금 저잣거리에 요동에서 온 상인이 있다고 하니 당귀를 구해서 보내시지요.”
“당귀라. 하긴 곽사가 요즘 인삼이니 뭐니 하는 약재들을 챙겨 먹는다고 듣기는 했어.”
“천자도 그 사실을 알고 약재를 보내고 있겠지요. 그러니 대사마께서 그보다 더 귀한 약재를 보내시는 겁니다. 어의가 쓴 약재로 곽 장군의 몸이 좋아진다면, 대사마께서 보내신 당귀 덕으로 알고 교분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호호호호, 가 상서는 하여튼 똑똑해. 그러니까 천자가 어의를 보내서 곽사 몸을 챙기는 공을 내가 가로채라고?”
“그렇습니다.”
“하긴 곽사 그 녀석이 보기에는 우락부락해도 그렇게… 실하지가 않아. 뭐라도 보약이 필요할 거야. 이제 계집질을 하기에는 적은 나이도 아니고.”
이각은 잠시 동안 깔깔거리며 곽사의 남성을 비웃은 뒤 흔쾌히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하우. 그 요동에서 왔다는 상인한테 당귀를 죄다 사들여요. 만약 너무 비싸게 부르면 그냥 죽여 버리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후는 그 길로 저잣거리로 나가서 요동에서 왔다는 상인에게 당귀를 샀다. 상인치고는 이상하게 어깨가 떡 벌어진 짧은 수염의 젊은이였다. 가후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마 공자의 측근이시오?”
“그렇습니다. 당귀를 사러 오셨다니 가 상서시겠군요.”
“그렇소. 그나저나 이게 전부 고구려 당귀 맞소?”
“그럴 리가요. 태행산맥에서 나는 물건입니다. 뭐 겉으로 보기에는 감쪽같지요.”
“태행산맥이라고 해도 먼 하북에서 나는 것인데, 용케 이만큼 구했구려.”
“아, 하북에 저희가 잘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마 공자가 장안에 잠입하면서 바로 하북에 사람을 보냈는데 당귀를 있는 대로 잔뜩 구해주더군요.”
방덕은 그렇게 말하며 가후를 바라보고 씩 웃었다. 그들과 막역한 사이인 상산도위 하후란을 통해서 구한 것이었다. 가후도 쓴웃음을 지었다.
“가짜 고구려 당귀인가. 알았소.”
당귀는 고대부터 널리 쓰인 귀한 약재였는데 그중에서도 고구려산을 최고로 쳤다고 한다. 역사에는 조조가 강동의 맹장 태사자에게 이 고구려산 당귀를 보냈던 일화가 남아 있다. 원래 동북쪽 청주 출신인 태사자를 두고 당귀의 명칭을 사용한 언어유희로 ‘응당 돌아와야 하지 않겠는가(當歸)’라는 뜻을 은근히 전한 것이다. 나름대로 멋스러운 제안이지만 태사자는 당연히 이 제안을 묵살했고 강동의 충신으로 이름이 남게 되었다.
가후는 그렇게 중국산 가짜 고구려 당귀를 잔뜩 구해서 이각의 이름으로 곽사에게 보냈다. 이름에 담긴 심오한 뜻은 전혀 없었다. 그는 당귀를 통해 멋을 부리는 게 아니라 뭔가 결과를 만들어 볼 참이었다.
* * *
곽사의 처, 팽 씨는 풍익의 호족 팽가의 누이동생이다. 부패한 호족의 집안에서 나름대로 미색을 가지고 태어난 여인인데, 그런 처지에 걸맞게 기가 세고 욕심이 많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우락부락하게 생긴 중늙은이 곽사와 혼인한 것을 두고 곽사의 권세를 탐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녀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역시 사내라면 우리 영감처럼 덩치가 커야지. 그런데 이 인간이 귀한 약재들은 그렇게 처먹으면서 어디다 힘을 쓰고 돌아다니는 거야?”
이제 곽사는 코도 없고 한쪽 눈도 없지만 팽 씨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근육은 멀쩡히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이 시원치 않은지 요즘 영 힘을 제대로 쓰지 않는 것이었다.
“이게 다 대사마 이각의 치소에서 앵속을 먹인 계집들과 놀아나기 때문이렷다?”
생각하면 할수록 속에서 천불이 나는 일이다. 이각은 곽사가 동탁 밑에서 한낱 무사 노릇을 하던 시절부터 어울려 다니던 동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동탁을 따라 정권을 잡고 고관이 되더니, 동탁이 죽고 나서는 숫제 대사마 자리에 올라서 한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각의 측근인 곽사에게도 표기장군이라는 높은 관직과 부귀영화가 주어졌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이각이 곽사가 마음대로 계집질을 하도록 편의를 봐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팽 씨의 마음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못생기고 나이 많은 서량의 무부와 혼인한 데는 권력의 흐름에 밝은 오라비의 뜻도 있었지만, 어지간한 사내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녀의 육욕도 한 몫을 했다. 곽사의 거대한 육체는 그만큼 매혹적이었다.
“내가 이렇게 젊고 고운데, 우리 영감은 출세하더니 첩질에 맛이 들려서 나를 돌아보지도 않는다는 거지?”
하도 화가 나서 기녀 하나를 매수해서 팽 씨가 스스로 암살 시도까지 꾸몄다. 잠자리에서 암살 시도를 당하면 모르는 여인과 관계하기 저어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곽사는 단번에 기녀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는 그 뒤로 앵속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여인하고만 관계를 갖는다고 하니 팽 씨로서는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천자가 보냈다는 어의가 찾아온 것이 그때였다. 천자는 여포를 쫓아낸 곽사의 노고를 치하하며 주기적으로 어의를 보내서 탕약을 전달해 왔다. 원래 진맥도 하고 가려고 했지만 곽사는 계집질에 바빠서 어의가 올 때마다 집에 없었다.
“부인, 오늘도 폐하께서 하사하신 탕약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요? 거기에 두고 가세요. 내 잘 달여서 장군께 드리리다.”
어의는 오늘은 조수처럼 보이는 젊은이 한 명을 더 데리고 왔다. 얼굴이 희고 스무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서생 같은 젊은이였다. 그 젊은이가 말을 걸었다.
“부인, 소인은 어의 어르신 밑에 있는 의원 나관중이라고 합니다. 아까 당귀가 들어와 있는 것을 봐서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당귀가? 아아, 그거? 멀리서 온 귀한 약재라던데, 그게 뭐 문제가 있나?”
“부인, 사실은…….”
나관중은 한숨을 푹 쉬고 말을 이었다.
“저희들이 만든 탕약은 열을 내는 약이라 당귀와는 그 성질이 상극입니다. 당귀를 먹으면 피가 맑아지고 잘 도는데, 몸에 열을 내는 약과 함께 먹으면 두통이 일어서 오히려 기력이 쇠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당귀는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그게 정말이야?”
“그렇습니다.”
나관중의 말을 들은 흰 수염의 어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자의 어의라면 나라에서 제일가는 의원일 터, 팽 씨는 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의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어의 일행이라는 권위가 그 사실을 가려 주었다.
“고것 참 아쉽네, 모처럼 받은 건데.”
“대신 당귀는 사내보다 부인에게 효능이 더 좋습니다. 부인께서 드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어머, 그래요?”
팽 씨가 반색하며 이것저것 물어보던 중, 갑자기 나관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곽 장군에게 폐하께서 탕약을 내리신 것은 조정의 신료들이 다 알고 있을 터인데, 상극인 당귀를 보내다니요? 고구려 당귀 같은 귀한 약재를 보낼 때는 틀림없이 의원의 말을 듣고 보낼 텐데요. 혹시 이 당귀를 보낸 사람이 누구입니까?”
“응? 누구긴 누구야, 대사마…….”
이각.
팽 씨는 순간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이각은 영감이 천자의 탕약을 먹는 걸 뻔히 알면서 상극인 당귀를 보냈다? 이건 어찌 된 영문이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단순한 실수일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한다면?
‘이걸 영감한테 잘 말하면… 어쩌면 이각과 사이가 틀어지지 않을까? 그러면 약 먹은 계집들하고 노는 것도 그만두겠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은 쾌락을 밤마다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팽 씨는 무릎을 탁 쳤다.
“우리 젊은 의원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큰 실수를 할 뻔했구만!”
팽 씨는 나관중에게 상으로 금붙이까지 쥐여주며 깔깔 웃었다.
‘걸려들었구나.’
원래의 역사에서 곽사의 처는 이각이 곽사에게 첩을 줄 것을 우려하여 자기가 먼저 나서서 곽사에게 이각을 모함, 두 사람의 사이를 틀어지게 한다. 나관중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예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기로 했다.
“그것참 이상하네요, 대사마께서 어째서 상극인 약재를 보내셨을까요? 조정의 일들을 뻔히 아시면서…….”
그때 어의가 나관중의 무릎을 툭 쳤다. 옆에서 보면 영락없이 그만 촐싹이고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보였다. 나관중은 짐짓 놀란 척 더듬더듬 말했다.
“아이고, 이거 제가 괜한 소리를… 송구합니다, 부인.”
“흠, 그렇단 말이지.”
나관중의 말을 듣자 팽 씨의 표정이 더 진지해졌다.
‘그러면 이각이 진짜 헛짓거리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좋아, 어찌됐든 이 기회에 영감을 이각과 갈라서게 만들어야겠어.’
“지긋지긋한 첩질도 이제 끝내 주마. 그의 물건은 온전히 나의 것이야.”
팽 씨의 눈동자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서 활활 타올랐다. 어의의 조수로 변장해서 들어온 나관중은 그 모습을 보고 티 나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