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속죄
“놀라지 않으시는군.”
마초는 가후를 쏘아보며 말했다. 가후는 담담하게 그 눈빛을 받으며 대답했다.
“마 공자께서는 이미 여러 번 저를 놀라게 하셨으니까요. 오늘 이렇게 불쑥 찾아오신 건 참으로 무모합니다만, 공자께서 하시는 일은 대체로 다 그랬으니 저도 이제 둔감해졌습니다.”
“그런가.”
“공자야말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제가 공자의 정체를 바로 맞췄는데 말입니다.”
“선생은 앉은 자리에서 천 리 밖을 내다보는 지모를 갖췄으니까. 그건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소.”
마초가 지난 생에서 조조에게 패했을 때, 계략을 써서 마초가 이끄는 서량 군벌들을 와해시킨 것이 바로 가후였다. 그리고 마초는 그때 당했던 계략을 그대로 활용해서 여포와 곽사의 사이를 이간시켰다.
“좋습니다.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하러 오셨습니까?”
“선생이 원하는 것 두 가지를 주려고 왔소.”
“하하하.”
가후는 낮게 웃었다.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그다. 그러나 이 마초라는 청년의 행동은 매번 그의 통찰을 벗어났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청년이었다.
“흥미롭군요. 제가 원하는 첫 번째는 무엇입니까?”
가후는 마치 남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물었다. 마초가 대답했다.
“첫 번째는 생존.”
“생존이라면 지금도 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려울 것이오.”
“어째서입니까?”
“앞으로 마가군이 이각을 물리치고 장안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오. 이각과 곽사를 권좌에 올린 장본인이 바로 선생이오. 그러니 이각과 곽사가 패망하면 선생은 대역죄인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오. 나는 마가군이 이기더라도 선생이 목숨을 부지하도록 도와줄 생각이오.”
“일리가 있군요. 미오성의 양식을 마가군이 얻었으니 앞으로 삼사 년간 장기전을 벌인다면 마등 장군에게 충분히 승산이 있지요.”
가후는 태연했다. 거기까지는 자신도 생각했던 바다.
“그러나 공자, 저는 제 한 몸을 지키는 계책에는 천하의 누구보다도 능합니다. 그러니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마음이 동하지 않는군요. 제가 두 번째로 원하는 건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속죄.”
태연하던 가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속죄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선생이 벌인 짓으로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소. 이 죄를 조금이라도 씻으려면 천하에 공을 세워서 씻는 수밖에 없소. 나는 선생의 힘을 빌려 앞으로 죽을 사람들을 죽지 않도록 막아서, 선생의 죄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도록 도우려 하오.”
가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처세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는 가후. 그러나 그의 행적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그는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구하지도 않았고 누리지도 못했다. 그는 누구보다 영리했고, 누구보다 오래 살면서 높은 자리까지 올랐지만 그런 것치고는 큰 업적도, 명성도, 악명도 남기지 않았다. 가후는 그저 살아남았고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계속 조심하면서 살다가 죽었다.
영웅이 되기에는 겁이 많았고, 간신이 되기에는 모질지 못했던, 그는 어쩌면 아주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공자.”
한참을 말이 없던 가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고통스럽게 내뱉는 게 느껴졌다.
“제 죄를 씻기 위해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올해 안으로 이각과 곽사의 목을 벨 것이오.”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마가군이 장안을 당장 공략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 두 역적의 세력이 너무 크다는 것과 장안성이 황도이기 때문에 공성하기 어렵다는 것이오. 그래서 첫째로 둘 사이에 내분을 만들어서 둘의 힘을 약하게 할 것이오. 둘째로는…….”
어차피 머리싸움을 건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마초는 가후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그 틈에 천자를 옮겨서 장안성을 황도가 아니게 만들 것이오. 그래서 정서장군께서 올해 안으로 장안성에 입성하시도록 할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장기전은 없겠군요.”
“그렇소. 싸움을 빨리 끝내고 장기전에서 소모될 목숨들을 살려서 관중을 재건할 것이오.”
“공자께서는 항상 제 예상을 뛰어넘으시는군요. 속죄, 그것을 공자께서 먼저 말씀하실 줄이야.”
가후는 그답지 않게 시원스럽게 결단했다.
“공자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이각이, 그리고 천자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간언해 주시오. 그대는 양쪽의 신임을 받고 있으니 가능할 것이오.”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벌인 일을 수습하고, 일 년 안으로 장안성을 얻을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하면 그다음에는요?”
“알아서 하시오.”
마초는 담담하게 말했다.
“선생의 지모가 탐나긴 하지만 선생은 이각과 곽사를 권좌에 올린 대역죄인이니 계속같이 할 수는 없소. 재물은 필요한 만큼 챙겨드릴 테니 일이 끝나면 어디로든 떠나서 조용히 사시오. 단, 천하의 패권과는 상관없는 먼 곳으로 떠나서 중원의 일에 다시는 관여하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가후는 할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만나보니 확신이 드는군. 이 젊은이는 영웅이다.’
마초는 천하를 쥘 수 있을 만큼 대담하고 영리했다. 자신과 같은 서량 출신, 먼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척박한 변방의 무인이지만 어떤 악명도 얻지 않았다. 그가 올해 안으로 장안을 얻는다면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대영웅이 될 것이고, 그의 곁에는 숱한 재사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러니… 그의 곁에는 내가 어울리지 않겠군.’
굳이 대역죄인까지 곁에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젊은이가 영웅이라면 이자에게 의탁하여 큰일을 해 보고자 하였다. 이 젊은이는 영웅이 맞지만, 그 때문에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
가후는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각과 곽사가 벌여 놓은 패악질을 수습하고 그저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것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공자, 그러면 처음으로 무엇을 하실 계획입니까?”
“먼저 이각이 곽사를 의심하도록 만들 것이오.”
마초는 가후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묵묵히 계획을 듣던 가후는 마초의 계획에서 몇 가지를 수정했다. 나관중은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짜는 것을 지켜보았다.
* * *
간의대부(諫議大夫)란 천자의 주변에서 간언을 하고 정치의 득실을 논하는 일종의 정책보좌관이다. 간의대부 충소는 태상 충불의 아들로 모두가 인정하는 한의 충신이었다. 창칼을 앞세워 자신을 협박하는 동탁에게 천자의 조서를 내밀고 꾸짖어서 동탁의 사과를 받아냈던 일 이후로 그의 명성은 자못 높았었다. 이각과 곽사가 집권하기 전까지는.
목숨을 걸고 바른말을 하던 충소는 이각과 곽사가 집권한 이후로 말이 없어졌다. 항상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직무에 건성건성 임했다. 조정에는 충소가 매일 밤이 늦도록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느라 사람이 망가졌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유망한 관리의 추락을 안타까워했으나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젊은 날 뜨거운 열정을 가졌던 관료가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다. 후한 말 같은 혼란한 시기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충소 본인도 자신이 타락한 것을 모두가 납득하리라고 생각했다.
충소는 그날도 건성건성 일을 보다가 퇴청하고 바로 기루를 찾았다. 이 기루는 한때 장안제일루로 이름이 높았지만, 기녀들이 자꾸 사대부 손님들에게 첩이 되려고 지분거리면서 사대부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한 곳이었다. 그러니 환락을 좀 아는 사람들은 더 이상 찾지 않고, 늦깎이로 입문한 충소 같은 사람이나 좋아할 만한 그런 곳이었다.
기루에서 술을 마시다 변소에 다녀오는 충소를 한 청년이 불렀다.
“대부 어르신,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청년은 쓰고 있는 삿갓을 들어서 자신의 눈을 드러냈다. 푸른 눈동자를 보자 충소는 청년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 마등과 처음 안면을 텄을 때 인사를 나눴던 마등의 큰아들이었다.
“맹기. 어쩌자고 자네가 직접 왔는가? 장안에 이각의 눈과 귀가 한둘이 아니네.”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 이 기루에 경패라는 어린 기생이 있지요?”
“그렇네.”
“그 계집이 이각의 사람입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런가. 잘 알겠네.”
충소는 마초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바른말을 해도 세상이 바뀌지 않자 충소는 지쳐서 바른말을 그만두고 환락에 몰두하는 것으로 위장했다.
사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에 지쳐서 바른말을 그만두기로 한 것은 맞다. 다만 충소의 속내는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다.
‘힘 있는 자를 끌어들여 이각의 목을 직접 칠 것이다.’
좌중랑장 유범과 시중 마우가 그와 뜻을 같이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서량의 떠오르는 신흥 군벌, 정서장군 마등이었다.
이 허름한 기루는 충소가 마등과 연락하는 장소였다.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아예 기생질에 푹 빠진 것처럼 꾸몄다.
그러나 이각은 그런 충소에게까지 사람을 붙여서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이곳까지 사람을 심어 놨을 줄이야. 그러면 이각은 이미 내 목적을 눈치채고 있겠군.”
“맞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것을 역이용해야겠습니다.”
“역정보를 흘리자는 말이군.”
“들어가면 경패가 들을 수 있도록 이렇게 말하십시오.”
마초는 충소에게 계책을 설명했다. 충소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장안의 관리 유범, 마우, 충소가 마등과 내응하여 이각을 쓰러뜨리고자 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우의 어린 종이 밀고한 것으로 각색된 사건이다.
마초는 지난 생의 경험을 통해 어떤 경로로 정보가 유출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을 역이용해서 이각을 속이려는 것이다.
충소는 마초와 헤어져서 자리로 돌아왔다. 기생 동월이 충소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아양을 떨었다.
“어르신, 어딜 갔다 이제야 오셨어요?”
“으허허, 기다렸느냐?”
충소는 동월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기회를 살폈다. 한쪽 구석에서 금(琴)을 연주하고 있는 경패가 눈에 들어왔다.
충소는 경패가 들을 수 있게 짐짓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에이, 쓸모없는 놈들…….”
“응? 누구 말이어요?”
“유범과 마우 말이다. 입으로는 기세 좋게 역적을 쳐야 한다고 떠들어 대더니, 막상 역적을 칠 때가 되니까 슬금슬금 빠지지 뭐냐. 그 꼴들이 하도 한심해서 내가 주먹으로 한 대씩 쥐어박았지.”
충소가 그렇게 말하자 구석에 있는 경패의 눈이 순간 빛났다.
‘마맹기의 말이 맞았군. 알고 보니까 티가 나는구나.’
충소가 유범, 마우와 주먹다짐을 했다는 정보가 이각의 귀에 들어가면 이각은 일단 유범과 마우에게서 의심을 거두게 될 것이다. 충소는 내쳐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진짜 사내다운 사람이 나와 뜻을 같이하기로 했으니까.”
“으응? 그게 누구인데요?”
기생 동월은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뜨고 충소에게 물었다. 충소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아, 그걸 알았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동월은 정치를 전혀 모른다. 그러니 사실 누구인지 들어도 모를 것이고 진짜로 궁금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충소가 명문가 출신이니 어떻게든 그의 첩으로 들어가기 위해 과장된 반응으로 충소의 환심을 사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만약 충소의 말이 계략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동월의 목숨도 위험해지는 것이다.
‘기생이 장사하는데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세상도 정상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충소는 짐짓 큰소리를 쳤다. 구석에서 금을 타는 경패가 똑똑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 크기였다.
“이각의 오랜 동료가 나와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 이각은 바깥의 마등만 신경 쓰고 있겠지. 설마 안에서 자기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기를 노리는 건 생각도 못 할 것이다.”
“어머, 어르신은 재주도 좋으셔!”
“암. 이 충소가 누구냐? 아마도 내년, 늦어도 내후년이면 이각을 쳐내고 마등과 그자가 함께 정권을 잡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삼공이 되는 거야!”
충소는 그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그렇게 떠들어 댔다. 너무 중요한 정보를 얻은 탓인지 경패가 연주하는 가락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이제 곧 경패를 통해 이각에게 정보가 들어갈 것이다. 그때부터 이각은 자신의 ‘오랜 동료’,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