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68화 (68/306)

68화. 죽을 쑤는 천자

194년 봄, 관중 평야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흉작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재작년 가을걷이부터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미 지난 겨울부터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 황도 장안성의 봄은 을씨년스러웠다.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몸이 여위어서 옷깃이 펄럭거렸다. 5월이 된 지금까지 제대로 비가 내리지 않았으니 보리농사가 2년 연속으로 완전히 파했다. 이번 여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굶어 죽을 것이다. 나이 든 농민들 사이에는 이대로 가을 농사까지 파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돌았다.

‘겨울은 더욱 혹독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 참혹한 대기근이 닥치겠지.’

나관중은 길모퉁이에 쭈그려 앉아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돌돌 말린 거적에 기대앉아 있었다. 거적의 한쪽 끄트머리로 비어져 나온 것은 분명히 사람의 발가락 같았다. 거적 안에는 아마도 굶어 죽은 아이의 부모가 들어 있을 것이다. 아이는 뼈와 가죽만 남은 앙상한 팔을 들어 흙을 파내고 있었다. 그러나 흙 속에 먹을 것이 묻혀 있을 리 만무하니 아이의 행동은 보답 받지 못할 것이다.

마초는 갈대를 엮어 만든 삿갓을 깊게 눌러 쓰며 중얼거렸다.

“기근은 내년까지다. 그런데 벌써부터 이 지경이라니.”

옆에서 그를 수행하는 나관중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마초가 나관중을 흘긋 돌아보니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마초가 일 년간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주공, 황도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미오성에는 백만 석의 양식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척에 있는 장안에서 사람이 굶어 죽다니요.”

나관중의 손발이 가늘게 떨렸다. 희고 갸름한 얼굴에는 마초가 그에게서 이때껏 보지 못했던 감정이 떠올랐다. 분노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아이에게 다가가서 물과 수수떡을 내밀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아이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수수떡을 입 안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잠시 아이를 바라보다 자리를 떴다.

오늘은 중요한 사람을 둘이나 찾아가야 하니 시간이 많지 않았다. 마초와 나관중은 곧 시장에 도착했다. 사고팔 곡식이 없으니 시장도 활기가 없었지만, 유독 한 귀퉁이에만은 사람이 잔뜩 몰려 있었다.

“저자가 청의공자인가.”

사람들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은 얼마 전부터 시장에 나타나서 청의공자라고 불리는 소년이었다. 나이는 이제 14,5세 정도 되었을까? 푸른 옷을 입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를 청의공자라고 불렀다.

며칠 전, 가뭄이 한창일 때 청의공자가 시장에 나타났다. 그는 대단한 부자인지 눈이 돌아갈 만한 명마들을 잔뜩 데리고 왔다. 명마의 대금은 반드시 그 자리에서 곡식으로만 받았다. 청의공자를 따라다니는 일꾼들은 시장통에 바로 큰 솥을 걸고 죽을 쑤어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일꾼들은 하나같이 수염이 없었는데, 자세히 보면 수염을 기르기 전의 어린 소년뿐 아니라 중년 사내들도 많이 껴 있어서 꼭 환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 청의공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구태여 묻지 않을 뿐이었다.

“저 소년이 당금 천자, 유협이로군.”

마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삿갓을 눌러 썼다.

마등과 마초는 강족 혼혈이다.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면 푸른색을 띠고 있다. 외모가 지나치게 눈에 띄니 장안성에서는 삿갓으로 눈을 감추고 있었다.

나관중이 말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헌제(유협의 시호)는 관중에 기근이 들자 직접 자신의 명마를 팔아 구휼을 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동탁에게 옹립된 허수아비 황제인 그로서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겠지요.”

마초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초 자신은 유협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도, 싫은 감정도 없었다. 한 조정은 망조가 든 지 오래되어 전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했지만 기대한 것이 없으니 실망할 필요도 없었다. 어린 천자가 뭔가 해 보려고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동탁에게, 이각에게, 조조에게 가로막히고 실패했다는 소식이 뒤를 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그가 조조의 아들 조비에 의해 폐위되었다고 들었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다.

“이제 난세를 평정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 먼저 천자를 장안에서 빼내고 장안을 공략한다. 그 이후에는… 천자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그것이 마초의 고민이었다.

‘싸워서 군웅들을 전부 꺾는다고 난세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튼튼한 나라를 다시 세우지 않으면 사마 씨가 세운 진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곧 다시 난세로 접어들 것이다.’

마초는 정치를 잘 모른다. 하지만 한나라는 이미 내부의 모순이 극에 달해서 대대적인 개혁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설령 천자를 모시고 대업을 이룬다 한들, 나중에 천자가 개혁에 동의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저 소년에게 충성만 바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유협은 올해 열네 살이다. 겉보기에도 그 정도의 소년으로 보였다. 체격은 크지 않았지만 눈빛에서는 총명함과 굳은 의지가 보였다. 천자의 몸으로 신분을 숨기고 직접 구휼에 나선다는 것은 보통 결심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다.

마초는 힘은 없지만 최선을 다하는 유협을 보면서 여러 가지로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이구!”

“비켜라, 이것들아! 대사마 어르신 행차시다!”

“어이구!”

한쪽에서 건장한 무사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하며 길을 열었다. 두들겨 맞은 사람들은 엉금엉금 기어서 길 한쪽으로 피했다. 그들 중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이게 무슨 패악질이오? 아무리 경우가 없기로… 컥!”

노인은 말을 끝마치기도 한 무사에 의해 가슴에 칼이 박혔다. 피가 흐르는 걸 보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져서 자리를 피했다.

청의공자의 앞으로 한 사내가 걸어 나갔다. 치렁치렁한 비단옷을 금은보석으로 휘감고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걷는 중년 남자였다. 눈에는 무녀들처럼 짙은 화장을 해서 고양이 같은 눈매를 그리고 있었다.

“호호호호! 폐하, 여기서 뭘 하시나요?”

청의공자… 아니, 천자 유협은 어금니를 깨물며 대사마 이각을 노려보았다.

“대사마. 흉년이 들어 짐의 백성들이 굶어 죽고 있소. 짐이 어리고 재주 없으니 그저 가진 재물이라도 풀어 적은 목숨이라도 구하고자 하였소이다.”

“폐하는 왜 나한테 말도 없이 멋대로 구휼을 하러 나갔죠?”

이각은 유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뜸 물었다. 한쪽 눈으로는 고양이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다른 한쪽 눈으로는 유협을 잔뜩 쏘아보고 있었다.

천자가 구휼을 하는데 대사마에게 사전에 보고하라는 법이 천하에 있는가? 그러나 유협은 그 나이의 소년답지 않게 감정을 잘 갈무리하고 말했다.

“짐이 경황이 없어 미처 대사마에게 이르지 못하였소. 짐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 대사마께서 혜량하시오.”

“경험이 부족해서 이런 쓸데없는 짓을 벌이셨나요?”

“천자가 굶주리는 백성을 챙기는 것이 어찌 쓸데없는 일이겠소?”

“호호호호호!”

이각은 하늘이 떠나가라 웃더니 별안간 국자로 죽을 퍼서 한 입 먹었다.

“어머, 무슨 구휼 죽이 이렇게 맛있어? 내가 서량에서 먹던 잔칫날 음식보다 더 맛있네? 요즘 기근 참 좋아졌네, 이런 맛있는 음식도 먹고. 황실 숙수가 만들어서 그런가?”

“…대사마의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오.”

“폐하, 나 때는 말이에요.”

이각은 생긋 웃으며 천자 유협의 코앞까지 다가가 내려다보았다. 지극히 불손한 태도였지만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흉년이 한번 들면 피죽도 못 먹고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지만 아무도 나라를 원망하지 않았답니다. 왜냐면 우리 서량 사람들에게는 그게 당연했거든요. 내 아버지도, 내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양주 자사라고 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구휼 같은 건 전혀 관심이 없고 조정에 바칠 뇌물만 긁어 모으지 뭐예요. 그런데 내가 싸움 잘 하는 걸로 출세해서 황도에 와 보니 글쎄, 그 까닭을 알아 버렸네요. 왜 그랬을까요?”

“까닭이 무엇이오?”

유협도 알고 있는 얘기였지만 이각에게 맞장구를 쳐 주기로 했다. 이각은 목소리를 낮춰서 소근소근 말했다.

“천자가 양주 자사직을 돈 받고 팔았지 뭐예요. 그러니 양주 자사가 미쳤다고 구휼을 하겠어요? 천자한테 바친 돈을 메우려면 한 놈이라도 더 쥐어짜야지. 내가 어릴 적에 먹을 것이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이각이 말하는 관직을 팔아먹은 천자는 후한 영제, 유굉. 당금 천자 유협과 전 천자 유변의 아버지다.

이각은 그렇게 말하고 하늘이 떠나가라 웃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은 그는 다시 유협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니 폐하, 굶주리는 백성은 바로 나예요. 나부터 제대로 챙기도록 하세요.”

이각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홱 돌려서 죽을 쑤던 큰 솥 앞으로 갔다. 청동으로 된 솥은 굵은 밧줄로 매달려 있었다.

이각이 손짓을 하자 군졸 한 명이 달려와서 이각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칼을 내밀었다. 사람 키만큼 긴 장검이었다.

이각은 장검을 뽑아서 한 손으로 휘둘렀다.

콰장창!

솥을 매단 밧줄이 잘리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청동 솥이 돌바닥에 나뒹굴었다. 천자가 직접 만든 구휼용 죽은 그대로 바닥에 쏟아졌다.

이각은 장검을 군졸에게 다시 건네고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돌아갔다. 이각이 사라지자 유협을 수행하던 환관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 땅에 머리를 찧으며 천자를 잘 모시지 못한 죄스러움을 드러내는 자도 있었다. 열네 살의 유협은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환관들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나관중은 계속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평소에는 어딘가 멍하고 주눅 들어 보이는 그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관중의 얼굴에는 백성들이 굶어 죽도록 방치한 조정과 행패를 부리는 권력자에 대한 분노만이 은은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옆에서 삿갓을 쓰고 눈을 가리고 있는 마초가 말을 걸었다.

“뭐야, 관중. 제법 멋진 얼굴이 됐잖아?”

“주공. 천자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쓸 만하군. 기백이 있는 소년이다. 마음에 들어.”

“그러면 천자와 같이하시겠습니까?”

“그래, 일단 저 소년 천자와 함께 전란을 끝낸다.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부디 저 소년 천자가 초심을 잃지 않고 계속 백성들을 생각하기를.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초 자신이…….

“권신(權臣)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까지는 너무 귀찮아. 다 박살 낸 다음 뒤처리는 제갈량에게 떠넘기고 나는 시골에서 제후왕 정도 하면서 편하게 살고 싶다고.”

권신이라는 게 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지만 마초는 이제 확신이 있었다. 자신은 어떤 시련이 있어도 계속 일어나서 끝내 천하를 제패할 것이다.

마초와 나관중은 서로 마주 보았다.

“오늘 만날 두 사람 중 첫 번째 사람과는 용건이 끝났군요.”

“이제 두 번째 사람을 만나러 가자고.”

* * *

퇴청해서 집에 돌아온 가후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손님 앞에 마주 앉았다. 하얀 얼굴의 서생과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였다.

하얀 얼굴의 서생이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나관중이라고 합니다. 관직은 없습니다.”

“관직에 나가기는 이른 나이인 듯한데, 그래 어쩐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

“저는 옆에 계신 분의 수하입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삿갓을 벗었다. 흰 얼굴과 우뚝한 콧날, 긴 눈매를 가진 잘생긴 청년이었다. 눈동자에는 서역인들처럼 푸른빛이 돌았다.

“가 선생. 선생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선생을 잘 알고 있소.”

가후는 청년보다 서른 살 가까이 나이가 많다. 천자의 비서관인 상서 벼슬을 하고 있으니 직위도 어지간히 높은 몸이다. 어떤 명문가의 자제라도 스무 살 전후의 나이라면 가후에게 저렇게 건방지게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름다운 용모, 푸른 눈, 건방진 태도.

가후는 청년이 누구인지 바로 짐작했다.

“저 또한 뵙고 싶었습니다, 마초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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