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장안으로
방덕, 서황, 이감, 월길, 마대, 맹획, 나관중, 그리고 마초.
마휴의 복수와 치란을 이루기로 맹세한 여덟 명은 그날 저녁 미오성의 전각에서 조촐한 연회를 가졌다. 그동안 서량에서 구경하기 힘들었던 향기로운 술이 있었지만, 마초는 부상의 회복에 전념하기 위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이내 이야기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으로 넘어갔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나관중이었다. 그는 마궁수의 신분에 불과했지만, 모두가 그를 책사로 여기고 있었다. 상산에서 흑산적을 공격할 때 공손찬군의 장수를 사칭한다는 책략, 곽사에게 군데군데 지워진 가짜 편지를 보내서 여포와의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책략을 낸 것이 나관중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미오성을 점거해서 거의 백만 석에 달하는 양식을 얻었으니 주공의 구상대로 일이 풀리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양식은 농현으로 거의 다 옮겨 놓았고, 기근은 내년까지 계속되니 내후년에는 이각의 세력이 눈에 띄게 약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초가 말을 받았다.
“그동안 관중에서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어 나간다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모를까, 기근이 계속될 것을 아는 이상 외면할 수 없습니다.”
“뿐만이 아니다. 이각의 집권을 내년까지 방치하면 관중 평야가 완전히 황폐해질 것이다. 내 지난 생의 기억으로는 관중을 재건하는 데만 십여 년이 넘게 걸렸지.”
“그렇게 된다면 치란까지 가는 길도 멀어지게 되겠지요.”
“그래. 하지만 올해 안으로 이각의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 기간이 훨씬 단축될 수 있다.”
“미오성에 쌓여 있는 양식을 낭비하지 않고 구휼에 쓴다면 큰 힘이 될 겁니다.”
3년간 기근이 이어진다면 매년 일정한 피해가 누적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흉년이 든 상태에서 다시 흉년이 들면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다. 두 번째 해의 피해는 첫 번째 해의 곱절이 넘고, 세 번째 해의 피해는 두 번째 해의 곱절이 넘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기근의 수습을 1년 단축할 때마다 피해를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10년이 넘게 걸렸지만, 올해 이각을 무너뜨리고 내년부터 관중의 복구에 돌입한다면 소요되는 시간은 그 절반 이하. 잘하면 5년 안으로 피해를 복구할 수 있다.”
“즉, 5년 후(199년)부터는 재건된 관중 평야의 생산력을 우리가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의 역사에서 199년 기준 최대의 세력은 하북의 원소, 그다음은 중원의 조조였다. 만약 그 전에 관중의 복구를 완료해서 그 생산력을 활용하게 된다면 이들에 버금가는 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서가는 원소나 조조를 따라잡으려면 그렇게 만들어야만 하지. 이제부터 이각을 무너뜨릴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군.”
일행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재건된 관중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중원으로 진출한다. 그리고 하북을 친다. 쉽지는 않은 싸움이지만 마가군에는 싸움에 능한 장수들이 많다. 그러니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방덕이 말을 받았다.
“소주공? 그러면 복수는 그렇게 한다고 치고, 치란은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말투가 정말 어색한데 그냥 그만두지 그래.”
“뭐 지금은 다 같이 있는 자리니까요. 둘만 있을 때는 알아서 하대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가 걱정을 했다고 그래?”
마초는 그렇게 말하고 나관중을 돌아보았다. 나관중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대답했다.
“그… 치란을 하려면 우리만으로는 안 됩니다. 싸움이 아니라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영입해야 하는지 말해 보라고.”
“누구 할 것 없이 문관이라면 닥치는 대로 모아야죠. 전쟁터가 된 관중을 복구하기 위해 유능한 행정 관료도 필요하고, 전쟁이 끝난 이후의 권력투쟁을 위해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명사들도 필요합니다.”
“좋아. 이를테면 이번에 구출한 황 사도(황완) 같은 사람들이 큰 도움이 되겠군. 청류파 선비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가진 명사니까.”
“풍익의 장 연사(장기) 같은 젊은 관리들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행정에 능한 인물이니까요. 황 사도 같은 명사들, 장 연사 같은 젊은 문관들을 가리지 말고 모아야 합니다.”
“알았어. 일단 관중, 너와 내가 머리를 맞대고 영입할 문관들의 명단부터 작성해야겠군. 우리는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역사상의 평가와 주공께서 기억하시는 당대의 평가를 종합하면 상당히 정확하게 인물을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좋아. 아버지의 명성이 있으니 인근에 있는 어지간한 인재들은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손으로 이각을 치는 데 성공하면 더욱 그렇겠지.”
나관중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각을 친 다음에는 최대한 많은 문관들을 영입할 작정이었다.
밤이 되어 술자리가 파한 후, 마초는 나관중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관중, 할 이야기가 있다고?”
“그렇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치란을 하기 위한 인물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 닥치는 대로 문관을 모아야 한다고 했잖아?”
“단기적으로는 그렇지요. 장기적으로는… 한 사람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장기적으로 필요한 사람이라. 왠지 내가 잘 아는 사람일 것 같군. 둘이서 종이에 이름을 써서 비교해 볼까?”
“하하, 그러시지요.”
마초와 나관중은 각자 종이에 자신이 생각하는 인물의 이름을 썼다. 획수만 봐도 누구인지 서로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종이를 펼치자 예상대로 그 이름이 나왔다.
“제갈량.”
“그렇습니다, 주공. 이후로 천 년간 그보다 더 뛰어난 재상은 없었습니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나도 그와 알고 지낸 기간은 10년도 안 되지만, 그는 뭐랄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어. 천하의 기재였지.”
“예. 난세는 단순히 싸움에서 이긴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조조가 세운 위나라는 버티기만 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 정도로 유리한 판세를 만들었지만, 결국 내부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사마 씨에게 찬탈을 당하고 말았지요. 조조도 천하를 평안케 하려는 뜻이 있었겠지만 그의 뜻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나라를 만든다. 그런 일을 맡길 만한 인물은…….”
“제갈량뿐이겠죠.”
“하지만 문제가 있다. 제갈량은 이제 열네 살의 소년에 불과해. 물론 작은 관직 정도는 지금이라도 맡을 만한 인물이긴 하지만, 그를 그렇게 쓰는 게 맞을까?”
“그가 천하의 기재로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겁게 써야 하는 인물이니 공부를 할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사실 부르고 싶어도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요.”
“그래. 지금 조조 때문에 제갈량의 고향인 서주에 난리가 났으니, 지금쯤이면 형주 피난길에 올라 있겠군.”
“예. 조급하게 찾지 말고 나중에 형주에 갈 일이 있으면 초빙하도록 하시죠.”
“그러자고.”
나관중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주공, 올해 안으로 이각을 깨뜨리기 위한 계책 말입니다만.”
“그래. 사실 쉽지 않은 일이야. 여포는 내쫓았지만 이각의 세력은 아직 강대하고 장안성은 거대하다. 그는 천자를 끼고 있으니 장안성을 오랫동안 공성할 수도 없지.”
“그렇지만 원래의 역사에서도 그는 결국 패망했지요.”
마초는 나관중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마초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각의 전횡이 심해지자, 내년(195년)에 천자가 장안을 떠나서 동쪽으로 피난을 갔었지. 이각은 멍청하게도 천자의 피난을 멍하니 두고 보다가 정치적 명분을 잃었고.”
“그렇습니다. 그걸 올해로 앞당기면 어떻겠습니까?”
“나 또한 생각하던 바다. 어차피 익주목 유언의 아들 유범을 빼내려면 장안에 들어가야 해.”
“장안에서 우리가 공작을 벌여서…….”
“천자를 피난길에 오르게 하고, 이각의 세력을 안에서부터 약화시킨다.”
“천자가 떠나면 장안은 더 이상 황도가 아니게 되니, 마음껏 공성할 수 있겠지요.”
마초와 나관중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오성에서 이각과 오랫동안 대치한다고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지금 이각의 세력은 너무나 강대하다.
그러니 공작을 통해 안에서부터 이각의 세력을 무너뜨린다. 특히 천자를 빼돌려서 이각이 정치적 명분을 상실하게 만든다면 이각의 영향력은 크게 흔들릴 것이다.
“좋아. 천자는 어차피 내년이면 피난길에 오를 테니, 옆에서 좀 부추겨 주면 일 년쯤 앞당길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천자와 바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이각의 신임을 얻고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지.”
“예. 또한 이런 큰 공작을 진행할 만큼 지모가 아주 뛰어난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 있지. 원래의 역사에서도 천자가 장안을 탈출하는 데 도움을 줬던 그 사람.”
이번에는 종이에 써서 비교해 볼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이 필요로 하는 사람의 이름은 같았다.
“가후.”
가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마초의 표정이 복잡했다.
“나와는 은원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자다. 어쨌든 이번에는 도움을 받아야겠군.”
천자를 장안에서 빼내는 대담한 계획. 마초는 이것을 실행하는 데 가후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미친 소리라고 했을 테지만, 마초는 원래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천자는 원래의 역사처럼 이미 장안을 떠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가후는 무슨 영문인지 그런 천자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니 천자를 빼내는 데 가후의 힘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가후와 계속 함께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마초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생각을 그만두었다. 지금 결론을 내기는 어려운 문제였다.
나관중이 마초에게 말했다.
“주공, 그러면 장안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래. 시간을 지체할 필요 없지. 사흘 후 밤에 장안으로 잠입한다.”
장안으로 잠입해서 천자를 피난길에 오르게 만들고 이각의 세력을 안에서부터 약화시킨다. 거대한 작전이 될 것이다.
* * *
마초가 계획을 설명하자 마등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버지, 들으셨습니까?”
“그래. 참으로 거대한 계획이구나. 천자가 장안에서 떠나도록 한다니.”
“원래의 역사에서, 그러니까 저의 지난 생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장안에서 지략을 잘 쓰면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마등은 잠시 동안 마초의 얼굴을 응시했다. 젊은 날의 자신을 꼭 닮은 아들의 준수한 얼굴에는 굳은 의지와 자신감이 떠올라 있었다.
“드디어 결심이 선 모양이구나.”
“예. 저는 이제부터 어떤 패배도 겁내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휴의 복수를 완수하겠습니다. 그리고 휴의 꿈을, 치란을 이루겠습니다.”
“훌륭하다. 너의 뜻대로 하거라.”
마초는 대외적으로는 이번 싸움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농현으로 돌아간다고 꾸미고 몰래 장안으로 잠입할 생각이었다. 마등은 마초의 계획을 시원스럽게 승인하고 내쳐 말했다.
“맹기, 나도 네가 말한 대로 계책을 실행하겠다만 한 가지 말해 둘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계책이 틀어질 경우 네가 즉시 판단해서 결정하고 나에게는 사후에 보고해라. 이제부터 진행할 장안 공략의 총책임자는 내가 아니라 너다.”
“아버지…….”
“모두 알고 있는 일이지만 여기서 확실히 해 두마. 마가군의 다음 수장은 너다. 너의 역량은 이미 나를 뛰어넘었으니 네 생각보다 일찍 이어받게 될 수도 있다. 이제부터 항상 그것을 염두에 두거라.”
마초는 마등에게 군례를 올리고 방을 나갔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마등은 서판에 무언가를 적은 후 종사 부간을 불러들였다. 서판을 본 부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서장군, 이것은…….”
“비장군 마초가 입안한 계획이다. 놀랍지 않은가?”
“계획도 놀랍습니다만, 후계자를 벌써 확정하셨습니까? 그야 비장군이 장자고 능력이 출중하니 당연히 모두 그렇게 생각은 했습니다만, 후계자 문제를 논하기에는 정서장군께서도 아직 한창 나이가 아니십니까?”
마등은 마흔두 살이다. 아무리 고대라지만 후계자를 논할 시점은 아니다.
“그야 올해는 큰 싸움이 있을 테니까. 만약 내가 전사하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정서장군, 왜 그런 말씀을…….”
“군문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언재(부간의 자), 만약에 전쟁터에서 나에게 무슨 변고가 생기면 그때는 맹기를 잘 도와다오.”
마등은 웃으면서 부간의 어깨를 두드리고 물러가게 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마등은 혼잣말을 했다.
“맹기, 훌륭하게 성장했구나. 아주 위험한 계획이지만, 만약 계획대로 된다면 네 손으로 난세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마초의 실력은 이미 마가군을 통솔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만약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만한 명성도 동시에 얻을 것이다.
그것은 곧 마등 자신에게 무슨 변고가 생겨도 마가군을 대신 이끌 수 있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나 대신 마가군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때는 나도 내 꿈을 이룰 수 있겠군.”
마등은 한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혈육의 죽음을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자. 어린 나이부터 일에 치이면서 살아온 마등이 오랫동안 간직한 꿈이었다.
“첫째가 내 자리를 이어받을 만큼 훌륭하게 자라 준다면 나도 죽은 둘째를 마음껏 애도할 수 있겠지. 애도의 방식은…….”
마휴가 전사한 미오성 전투의 적군 총대장은 이각이다. 그는 한나라 최고의 권력자이며 서량 최고의 검객이기도 하다.
마등은 이각을 떠올리며, 자신의 5척 장도를 뽑아 들고 가만히 응시했다.
“역시 이게 좋겠군.”
칼날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