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미오성의 맹세
마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갔다.
동쪽으로 난 창 아래로 관중 평야가 내려다보였다. 저 먼 곳에 희미하게 보이는 성채는 장평관이다. 저 장평관을 넘으면 황도, 장안성이 있을 것이다.
나관중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초를 기다렸다. 마초는 창 아래로 보이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나 자신인 채로, 패배에 굴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라고?”
“그렇습니다.”
“역시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거로군.”
“네? 뭐를 말입니까?”
마초는 여전히 나관중에게서 등을 돌리고 창 밖을 내려다보며 낮게 웃었다.
“상산에서 장연의 습격을 받았을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나?”
“물론입니다. 목숨을 내던지려 하셨지요.”
“그런 썩어빠진 생각이 문제였다. 장연과 싸울 때는 자룡 덕분에 요행히 넘어갔었지. 그러나 여포에게는 그게 통하지 않았다. 그런 썩은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패했던 거다.”
마초의 언성이 높아졌다.
“관중, 네 말이 맞다. 영웅은 지지 않는 자가 아니라 패배하고 다시 일어나는 자. 패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저 패하지 않을 정도의 승부만 해 온 것에 불과하지. 진짜 영웅은 패배하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수없이 거듭해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 지난 생에서 나는 조조에게 패했다. 이번 생에는 여포에게 패했다. 왜 패했는가?”
마초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서 이제는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지면 죽겠다는 그런 썩어빠진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패배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음으로서 도망치려 했기 때문이다! 패배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초는 창밖의 세상을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다시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초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차분해져 있었다.
“이제부터는 다르다. 나는 계속 싸우겠다. 그 과정에서 어떤 패배를 당하더라도 살아남아서 다시 일어서겠다. 그래, 누구의 흉내도 내지 않고, 마초인 채로 난세를 끝내는 영웅이 되겠다.”
마초는 거기까지 말하고 몸을 돌려서 나관중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더 이상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지 않았다. 푸른빛이 도는, 자신감이 지나쳐 오만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런 마초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나관중의 모습이었다.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본이…….”
“응? 뭐 하는 거야?”
“나본이 주공을 뵙습니다.”
“뭐야? 갑자기 웬 주공이야?”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주공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개와 말의 수고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 그래. 그대의 충성이 헛되지 않게 반드시 대업을 이루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근데 왜 내 의사는 안 물어보고 네 맘대로 주공이냐?”
“어차피 좋아하실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
나관중이 품은 꿈에 대해서는 마초도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후한 말의 혼란기는 하내의 사마 씨들이 나중에 권력을 잡고 진나라를 세우며 끝난다고 했다. 하지만 진이 삼국을 통일한 지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아 북방의 이민족들이 남하하게 되고, 이후 중국 대륙은 300년간 참혹한 전란에 시달리게 된다고 했다. 이를 5호 16국 시대라고 한다.
전란을 조기에 끝내서 5호 16국 시대를 막아내는 것이 나관중의 꿈이지만, 그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두부 만들던 가노의 꿈치고는 참 너무 거창하단 말이야.”
“아니 언제 적 얘기를 하고 그러세요? 그래도 큰 꿈을 꾸다 보니 이렇게 꿈을 이뤄줄 만한 주공도 만나게 됐지 않습니까?”
“뭐 됐어. 어쨌든 남들 앞에서는 주공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아버님이 멀쩡히 계신데 자꾸 그러면 내 입장이 난처하니까.”
“그 정도 눈치는 있지요. 주공, 그보다…….”
“그보다 뭐?”
나관중은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마초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오늘 저를 부르실 때부터 이렇게 결심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밑에 기다리게 했지요.”
“뭐야? 무슨 뜻을 같이해?”
“주공을 따라서 이공자의 뜻을 받드는 것, 그래서 난세를 우리 손으로 끝내는 것 말입니다.”
“하…….”
이미 몇 명을 더 모아 놨다니 마초는 기가 막혔다.
“아니 근데 어이가 없네. 내가 결심 안 했으면 어쩌려고 했냐?”
“그럼 뭐 어쩔 수 없고요. 그래도 봉록은 나오니까…….”
“아 솔직하다 솔직해.”
“어쨌든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려가서 만나보실 거죠?”
“나 참… 알았어. 의관을 정제하고 갈 테니 먼저 내려가 있어. 나는 잠시 후에 내려가겠다.”
마초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뭐 월길이나 데려왔겠지. 그보다…….”
옷을 챙기던 마초의 눈에 나관중이 놓고 간 사자 모양 투구가 들어왔다.
“저거 꽤 맘에 드는데, 이번에 한번 써 봐야겠군.”
투구를 쓰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옷도 갑옷으로 바꿔 입게 되었다. 마초는 아예 입는 김에 갑옷에 전포까지 두르고 장도를 찬 후, 사자 모양 투구를 손에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정원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마초의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일제히 마초를 둘러싸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모두의 얼굴에 하나같이 굳은 결의가 떠올라 있었다.
“서황이 소주공을 뵙습니다. 대업을 이루시는 길에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서공명… 그래, 고맙네. 대업을 이루었을 때 그대의 이름은 옛 명장 주아부에 비견될 것이다.”
마초는 그렇게 말하며 서황의 어깨를 두들겼다. 서황은 마등에게 정식으로 주종의 맹세를 하였으니 마초를 주공이 아닌 주공의 아들, 소주공이라 호칭했다. 그러나 마초와 서황의 실질적인 유대관계가 주종 이상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이민족 청년이 나섰다.
“월길이 주공을 뵙습니다.”
“너 솔직히 말해. 한족 풍습이라니까 뭔지도 모르고 또 좋다고 따라나섰지?”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이게 바로 맹진의 회맹 같은 거잖아요?”
“맹진의 회맹은 또 어디서 들었냐?”
“그야 마궁수 선생이 가르쳐 줬지요.”
마초는 월길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인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여기서 뭐 하냐?”
“거 분위기 깨지 마라. 방덕이 소주공을 뵙습니다.”
“아니 갑자기 웬 소주공이야? 지난 생에 내가 서량 10군의 맹주였을 때도 그렇게 불러준 적이 없는데?”
“그때는 네가 영 시원찮았나 보지. 어쨌든 소장도 이공자와 두터운 정을 나눈 몸, 반드시 원수의 목을 베고 소주공이 큰 뜻을 이루도록 도울 것입니다.”
마초와 방덕은 잠시 서로 마주 보았다. 이윽고 마초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영명, 나의 벗이여. 그대의 충성을 무겁게 여기겠다.”
마초는 다음으로 이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감이 주공을 뵙습니다.”
“이감. 나는 아직 그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원수, 이각과 곽사의 목을 반드시 보여주마.”
그다음으로 나선 것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까치집 머리의 소년이었다.
“으흑흑흑, 주공, 마대가 주공을 뵙습니다!”
“그래. 고맙긴 한데 15세 병은 꼭 고치고.”
마초는 이어서 찰랑찰랑한 검은 머리의 소년의 앞으로 다가갔다.
“흥, 맹획이 주공을 뵙습니다.”
“맹획, 너는 왜? 남만족의 우두머리가 될 몸이 아니냐?”
“흥, 주공으로 모셔야 하나라도 더 싸움을 가르쳐 줄 거 아냐? 배울 만큼 배우면 떠날 거다.”
“좋은 자세다, 젊은이. 성심성의껏 가르쳐 주마.”
마초는 맹획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정원에 모인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다.
방덕, 서황, 이감, 월길, 마대, 맹획, 그리고 나관중이 차례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마초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나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일곱 사람의 시선이 전부 마초에게 모였다.
“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죽을 각오로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초에게 더 이상 회한은 들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태도로는 눈앞의 전투에서 이길 뿐,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한다. 눈앞의 성은 함락시킬 수 있어도 천하를 위해 큰일을 하지는 못한다.”
마초는 일곱 명의 신하를 향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갑옷을 입고 있으니 찰갑 조각들이 쩔그렁거리며 부딪혔다.
“이제부터는 바뀔 것이다. 나는 이제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남을 것이다. 어떤 쓰라린 패배를 당하더라도 살아남아서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하는 두 가지 과업을 무사히 완수할 것이다.”
마초의 눈에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이 떠올랐다.
“첫째, 여포의 목을 베서 우리와 뜻을 같이하던 마휴의 원수를 갚는다.”
일곱 명의 신하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감이 말했다.
“주공, 여포는 하북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원소에게 의탁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 작년에 나와 같이 하북에 다녀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여기서 하북까지는 약 삼천 리 길이다. 그러니 여포에게 닿기 위해 그 삼천 리 전부를 마가군의 영역으로 만든다.”
“그 길에는 이각과 곽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조가 있지. 상관없다. 이각이든, 조조든, 만약 내가 하북으로 쳐들어가서 여포의 목을 베는 걸 방해한다면.”
척.
마초는 나관중이 준 사자 모양 투구를 들어 올려 머리에 썼다. 투구는 마초에게 꼭 맞았다. 은빛으로 광을 낸 사자 장식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 투구의 끝에 치솟은 흰 술은 풍성하여 어깨까지 늘어졌다.
“전부 짓밟고 진군한다. 남의 흉내를 내지 않고 내 방식대로 하겠다.”
사자 투구를 쓴 마초의 얼굴에 악당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나관중이 물었다.
“주공, 이공자의 원수를 갚은 후 두 번째 목표도 말씀해 주십시오.”
“둘째, 마휴의 뜻을 이어서 이 난세를 끝낸다. 조정이 관직을 사고팔지 않는, 농사짓는 백성이 굶어 죽지 않는, 무장들이 백성을 향해 칼을 휘두르지 않는, 누구라도 도적질을 꿈꾸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온 천하가 내 뜻에 따르도록 만들 것이다.”
“저항이 만만치 않겠군요. 사대부도, 호족도, 백성들도, 어쩌면 황실까지도.”
“내가 치란(治亂)을 하겠다는데 저항하는 자가 있으면 그 또한 전부 짓밟는다. 그게 사대부든, 호족이든, 백성이든, 천자든 가리지 않는다. 그게 마초의 방식이다.”
일곱 명의 신하들 모두의 얼굴에 악당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않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복수, 그리고 치란.
마초의 위업은 이 두 가지 목표를 위해 시작되었다. 후한 흥평 원년(194년) 4월 25일, 마초가 회귀한 지 꼭 일 년째 되던 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