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영웅의 조건
관중 평야의 풍경은 황량하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농경이 시작된 이곳은 드넓은 벌판에 끝없는 밭이 펼쳐져 있었으니 후한대에는 이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관중 평야의 서쪽, 서량으로 나아가는 관문 장평관 밖에 위치한 미오성의 정원은 수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미오성을 건설한 권신 동탁이 천하의 기암괴석과 기화요초를 모아서 장식했기 때문이다.
마초는 그 정원의 정자에 걸터앉아 멍한 눈으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뭄으로 인공 수로에는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았다. 꽃은 말라비틀어지고 새들의 지저귐도 끊어졌다. 그럼에도 어찌나 공들여 조성한 정원인지 바위와 나무들이 아직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토록 얻고 싶었던 미오성이다. 꾀를 써서 여포를 몰아내고 백만 석이나 되는 양식을 얻었으니 서량에서 가만히 버티면 곧 관서 최대의 세력이 되겠지. 하지만…….”
승리를 같이 축하해야 할 아우 마휴는 죽었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마초의 아버지, 정서장군 마등이었다.
“맹기, 여기 있었느냐?”
“아버지.”
마초는 일어나서 군례를 올렸다. 마등은 자리에 앉지 않고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두 부자는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말없이 걸었다.
아들 마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전혀 괴로운 티를 내지 않으시는군요.”
“글쎄. 괴롭긴 하지. 아들을 잃었으니까.”
“그런데 어찌 참으십니까?”
“참아야지 그럼 별수 있느냐? 다른 사람의 아들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그러니 내 아들을 잃었다고 너무 유난하게 굴기도 어렵구나.”
마등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말씀이 옳습니다. 슬픔에만 빠져 있는 저를 왜 책망하지 않으십니까?”
“왜 그리하겠느냐? 아우가 죽으면 식음을 전폐하고 슬픔에 빠지는 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는 그 당연한 것을 참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먼 산을 바라보는 마등의 푸른 눈에 쓸쓸함이 떠올랐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을 누리지 못하고 자라서 그런 듯하다.”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이면 한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의 혈통이다. 마원은 후한 건국 시기에 첫손 꼽히는 공신이면서도 극히 청렴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청렴했던 대가일까? 마원의 7대손 마등이 태어났을 때는 집안이 완전히 몰락해 있었다. 마등의 아버지 마평은 살림이 빈한하여 이민족인 강족 여인과 통혼했다. 강족 혼혈로 태어난 마등은 어려서부터 서역인 같은 잘생긴 외모와 건장한 신체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보통의 경우 영웅의 후손이 그런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면 진작에 무관으로 출세가도를 달렸겠지만, 마등에게는 재물도 없고 연줄도 없으니 벼슬을 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은 나무꾼이었다. 철이 들 무렵부터 무거운 나뭇짐을 져 나르며 가족을 부양했다.
“그러다가 아우를 잃었지. 너의 숙부이자 대의 아비 말이다. 아우가 병에 걸려서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게 내가 너만 할 때의 일이다.”
“숙부님의 일은 들었습니다. 저는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그래. 그런데 사람이란 게 참 신기하더구나. 내가 나뭇짐을 지지 않으면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가 내일 먹을 끼니가 없다는 생각이 드니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일에만 몰두하게 되더구나. 그때 생각했다. 나는 아우의 죽음을 슬퍼할 형편도 되지 않는구나. 언젠가는 꼭 성공해서 혈육의 죽음을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그게 내 꿈이었다.”
마초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 꿈을 다 이루지 못했나 보다. 아들을 잃은 지금도 일에만 몰두하게 되니 말이다.”
마등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마초는 농담으로라도 웃을 수 없었다.
마초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군관이 된 이후의 모습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일이 바빠서 가끔씩만 집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버지는 싸움터에서 귀신처럼 사람을 베서 서량의 야차라고 불린다고 했다. 그러다 독립된 군벌이 되어 장군직까지 오르고 대저택으로 이사한 후에는 사람이 변했는지 매일 푸근한 미소를 짓고 다니며 선비들을 대접하고 명성을 쌓는 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가군의 세력이 커져서 이제 군사들만 삼만을 헤아립니다. 그 수장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가? 그보다 내가 더 보람을 느끼는 건 따로 있지.”
마등은 그렇게 말하고는 마초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그런 당연한 것을 누리지 못했지만, 이렇게 너라도 그런 자연스러운 감정을 누릴 수 있도록 키워냈지 않느냐. 그게 내 보람이다.”
“아버지…….”
마등은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려 걸었다. 멀어지던 그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문득 멈춰 섰다.
“맹기, 억지로 슬픔에서 헤어 나오려고 하지 마라. 자연스럽게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그때가 되면…….”
마등은 마초를 돌아보았다.
“무엇을 잃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남았는지에 집중하거라.”
그 말을 남기고 마등은 떠났다.
“무엇이 남았는지…….”
마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에는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창천(蒼天)이 있었다.
* * *
미오성, 전각 상층의 어느 방.
두 사내가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차만 홀짝거렸다.
나관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마초가 대답했다.
“머리에 화살을 맞아서 투구가 다 망가졌는데 괜찮을 리가 있나. 아직도 수시로 어지럽고 토악질이 난다. 의원이 말하기를 앞으로 몇 달간은 이런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더군.”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아서 뇌진탕이 일어나면 몇 달, 심하면 몇 년간 어지럼증이 나타난다. 군문에서 30년을 보냈던 마초는 굳이 의원의 말을 듣지 않아도 이 사실을 대략 알고 있었다.
“빨리 투구를 새로 맞춰야겠어. 나는 두상이 특이해서 투구도 따로 만들어야 하니까.”
마초는 보통 사람들보다 얼굴이 작고 머리가 앞뒤로 길었기 때문에 전용 투구를 맞춰서 쓰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나관중이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화려하게 장식된 투구였다.
“이게 뭐야?”
“새로 맞춘 투구입니다. 그날, 투구가 망가진 것을 보고 바로 대장간에 일러서 만들어 두었습니다.”
“눈치 빠르긴. 잘했어. 그런데… 이거 뭐 이래?”
마초는 나관중을 칭찬하고 투구를 받아 들었는데 투구의 모양이 상당히 낯설었다.
“저는 군문의 일을 모릅니다만 일 년간 비장군의 곁에 있어 보니 조금은 눈치가 생기더군요. 무장에게 무예 실력만큼 중요한 게 명성, 위명이죠? 비장군도 이제 수많은 군공을 가진 영웅이시니까 눈에 잘 띄는 화려한 투구를 쓰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적들이 이 투구만 봐도 비장군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사기가 꺾이도록 말이죠.”
나관중이 내민 투구는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이었는데 사자의 얼굴 모양이 장식돼 있었다. 투구 위에는 풍성한 하얀 술이 달려 있으니 이 투구를 쓰면 멀리서도 마초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걸 쓰고 다니면… 적군의 표적이 되기 딱 좋겠군.”
“그, 그럼 쓰지 않으시렵니까?”
“아니. 아주 마음에 든다. 이제부터 이 사자 모양 투구를 쓰고 다녀야겠어. 나를 표적으로 삼는 놈들이 있으면 전부 베어버리지 뭐.”
사자 투구를 본 마초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화려한 투구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나관중이 말했다.
“사실 부인께서 비장군을 만나 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조만간 제가 먼저 찾아갈 작정이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비장군께서 먼저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원이? 내가 걱정이 되는 건 알겠는데, 관중 너에게 부탁했다고?”
“그렇습니다. 부인께서 말씀하시길, 비장군이 진짜로 의지하는 사람은…….”
“너뿐이라고 했겠지. 그래, 그건 맞다.”
마초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아버지와 아내는 물론이고 방덕도, 서황도, 부간도, 이감도 마찬가지야. 때때로 지난 생에서의 관계가 겹쳐 보이지. 진짜 의지가 되는 건 이번 생에서 처음 만난 관중, 너뿐이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너의 지혜를 빌려다오.”
“말씀하십시오.”
“관중, 나는 영웅이 아니야. 그저 평범한 사람이야.”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지.”
만약 나의 실수로 가족이 죽었다면, 가족의 꿈을 대신 이루겠다. 그래서 그가 살아가며 남기려 했던 것들을 그 대신 남기겠다.
“이공자가요? 참으로 이공자다운 대답이군요.”
“휴는 나의 부족함 때문에 죽었다. 그러니 나는 휴의 꿈을 대신 이뤄주고 싶어.”
“그러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공자의 꿈은 치란(治亂), 난세를 다스리는 것이지요?”
“그래, 하지만 이 난세를 끝내려면 영웅이 돼야 해. 내가 아는 영웅이라면 유 사군이나 조맹덕이 있을 텐데 그들도 해내지 못했지.”
원래의 역사에서 유비도, 조조도 하지 못한 일.
마초는 잠시 차를 마신 후 말을 이었다.
“나는 영웅이 아니라 그저 싸움만 잘하는 평범한 인간이야. 그릇도 작고, 분한 일이 있으면 참지 못하지. 가족을 지키겠다고 떠들고 다니지만 항상 실패하고. 그러니까 묻는 거다. 내가 어떤 사람이 돼야 하는지.”
마초는 나관중을 응시했다. 그의 푸른 눈에는 평소와는 달리 오만함도, 자신감도 없었다. 진지한 궁금증만이 비쳐질 뿐이었다.
“나도 요 며칠간 심각하게 고민해 봤어. 나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휴를 잃었지만 휴가 꾸던 꿈이 남아 있다. 그러니 그것을 이뤄야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지금의 나는 휴가 남긴 꿈을 이뤄갈 수 없어. 어떤 사람이 되어야 난세를 다스릴 수 있을까? 왕도인가, 패도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모르겠어.”
나관중은 마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잘생긴 청년은 그저 답을 구하는 표정으로 나관중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비장군, 난세를 다스리기 위해… 영웅이 되십시오.”
“영웅? 이봐, 이제까지 뭘 들은 거야? 나도 치란을 이루는 영웅이 되고 싶어.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거잖아.”
“영웅이란 누구입니까?”
“뭐?”
나관중이 반문하자 마초는 머리를 싸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웅은 그러니까… 유비나 조조 같은 사람이 영웅이지.”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나관중은 그렇게 말하고 마초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냔 말이야. 유 사군처럼 살아야 하나, 조맹덕처럼 살아야 하나?”
“왜 둘 중의 하나가 되려고 하십니까?”
“뭐?”
“그 두 사람의 삶을 떠올려 보십시오. 두 사람의 삶은 엄청나게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관중의 말을 듣자 마초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유비는 동북쪽 변방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황실의 후예라고는 하나 그와 당금 천자 유협과의 촌수가 25촌이니 사실상 유씨 성 쓰는 평민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젊어서 시골 유협 집단의 우두머리로 살다가 황건적의 난에서 군공을 세우면서 벼슬길에 오른다. 그리고 그 뒤로 20년간 끝없이 패배하고, 또 패배하면서 중년의 나이에 남쪽의 형주까지 내몰렸다.
그는 비주류로 태어났지만 마치 자기가 천자라도 되는 양, 그렇게 내몰린 형주에서 자신의 가족들과 부하들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십만이나 되는 백성들을 보호하는 길을 택한다. 이는 나중에 그가 천자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게 하는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조조는 중상시 조등의 손자다. 한나라를 농단해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바로 그 환관의 집안에서 기득권으로 태어났다. 청년 조조는 자신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해 준 한나라의 부패한 권력자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길을 택한다.
그는 십상시 건석의 숙부를 때려죽이고 부패한 조정을 개혁하도록 수 차례의 상소를 올리지만 실패한다. 동탁이 폭정을 하자 가장 앞에 서서 무모하게 동탁과 싸웠지만 패배한다. 이후 유력한 권력자가 되고 나서도 계속 전장에 서면서 수 차례의 위기를 넘기고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잡는다.
유비와 조조의 공통점.
마초가 입을 열었다.
“그런가. 대충 알겠군.”
“그렇습니다. 그들은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일어났지요. 불굴(不屈), 그것이 영웅의 조건입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나관중의 생각도 정리되었다. 그가 마초에게 걸었던 기대는 이제 확신으로 바뀌었다.
“치란을 위해서는 영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비장군, 이제부터 영웅이 되십시오. 단 유비나 조조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그저 서량의 마초인 채로, 영웅의 조건을, 불굴을 잊지 마십시오.”
그저 역사를 사랑하고 이야기를 사랑하는 자. 영웅들에게 매료된 자. 그러나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 자.
그런 나관중의 눈앞에 영웅이 되려는 자가 앉아 있었다. 나관중의 두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패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십시오. 그것이 바로 영웅입니다. 유비의 흉내도, 조조의 흉내도 내지 마십시오. 그저 마초답게 실패하고, 마초답게 다시 일어나서, 끝내 승리하십시오. 영웅은 지지 않는 자가 아닙니다. 지고 나서 다시 일어나는 자입니다.”
힘만 가지고 있던 남자와 의지만 가지고 있던 남자는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관중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이따금씩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그렇게 영웅이 되어 이 난세를 끝내 주십시오.”
나관중의 목소리는 눈물로 잔뜩 잠겨서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