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원수는 그들이 아닙니다
미오성.
마가군은 결국 이곳을 손에 넣었다.
마초가 걸었던 이간계 때문에 여포와 곽사 사이에 내분이 발생, 여포군이 철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오성은 마가군이 점거하게 되었다.
그 미오성의 호화로운 방 중 어느 한 곳에서 키가 큰 여인, 양하원이 걸어 나왔다. 양하원은 방의 미닫이문을 닫고는 한숨을 쉬며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원에는 나관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비장군은 완쾌하셨습니까?”
나관중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양하원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죽지 않은 게 천행일 만큼 큰 부상이에요. 의원도 완쾌하려면 몇 달은 정양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한 시진이 멀다 하고 토악질을 하십니다.”
나관중도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여포가 쏘는 대궁을 지척에서 맞았으니 머리가 멀쩡할 리 없다. 사실 머리가 깨지지 않고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화살을 받아낸 투구는 형편없이 찌그러져서 완전히 못쓰게 되었다.
“그나마 절영이 자기 혼자 달려와서 위급을 알리지 않았으면 비장군은 아마도…….”
참으로 영특한 말이었다. 마초와 함께 절벽에서 떨어진 절영은 혼자 왔던 길을 되짚어서 주인이 쓰러져 있는 곳까지 군사들을 안내했다. 절영이 아니었으면 마초는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살아남지 못했겠지요. 그러나 몸의 상처보다 마음이 더 걱정이군요.”
그렇게 말하는 양하원의 눈가도 퉁퉁 부어 있었다.
전사한 마휴도 마초처럼 양하원의 아버지 양진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러니 시동생이기 전에 어릴 적부터 동문수학한 사이다.
마휴의 장례는 마등과 양하원이 나서서 간소하게 치렀다. 전쟁터라 길게 애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마초는 장례가 다 끝날 때까지도 몸을 회복하지 못해서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가족을 다시 잃었다. 나관중은 그의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마궁수 선생, 비장군을 한 번 만나 보세요.”
“제가 말입니까?”
“그래요. 비장군이… 초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은 선생입니다.”
“부인, 당치도 않습니다. 정서장군도 계시고, 부인도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양하원의 눈빛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아버님이나 저를 의지하지 않아요. 가족은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를 오랫동안 봐 왔지만, 일 년 전부터 그는 확실히 뭔가 변했어요. 그와 살아 보니 30년이나 되는 긴 꿈을 꾸었다는 사실이 믿어지더군요.”
“부인, 그 말씀은…….”
“하지만 선생은 달라요. 비장군은 선생의 얘기를 할 때마다 즐거워 보였습니다. 선생을 깊이 의지하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 그가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선생이 도와주세요.”
나관중은 마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지금 하루하루 망령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는 기분이다. 전부 내가 사지로 몰아넣었던 사람들이야.’
아버지도, 아우들도, 아내도, 친구 방덕도 마찬가지다. 마초가 그들을 아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초는 그들을 볼 때마다 지난 생의 죄책감과 부채 의식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은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 같은 회귀자인 나관중뿐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며칠 후, 비장군의 몸이 조금 나아지면 바로 만나 보겠습니다.”
나관중의 말에 양하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관중이 마초를 다시 보기까지는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이틀 후 마등이 소집한 군의에 바로 출석한 것이다.
“비장군!”
“비장군, 몸은 괜찮으십니까?”
마초는 자신을 둘러싸고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적당히 손을 들어 답례했다. 얼굴은 그새 여위고 표정은 어딘가 멍해 보였다. 마초는 편치 못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마등의 앞까지 다가가서 군례를 올렸다.
“비장군 마초가 주공을 뵙습니다.”
“정양이 다 끝나지 않았을 텐데, 비장군은 등청해도 괜찮은가?”
“누워만 있다고 회복되는 것은 아니니 조금씩 일을 하면서 기력을 찾고자 합니다.”
“그런가. 알았다.”
마등은 무표정하게 인사를 받았다. 얼마 전 아들의 장례를 치른 그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종사 부간이 나서서 의제를 설명했다. 그 또한 동문수학한 사제 마휴를 잃고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목소리가 계속 갈라졌다.
“…그래서 지금은 미오성에 있는 양식을 견수를 따라 물길로 농현까지 옮기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곽사가 장평관에 틀어박혀 있지만, 그가 다시 공격하러 나오면 언제 미오성을 다시 뺏길지 모릅니다. 무리하게 수성전을 하는 것보다는 양식을 확보한 후 장기전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알았다. 미오성에 있는 양식은 어느 정도인가?”
“밀과 보리, 쌀을 합쳐서 약 100만 석입니다.”
엄청난 숫자를 듣자 좌중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등이 이어서 물었다.
“다른 재물은?”
“대부분 여포가 처분하거나 들고 갔습니다. 남은 재물은 비단으로 따지면 5천 필 정도의 가치입니다.”
마초에게는 군의의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군량 확보 계획에 대한 논의가 끝난 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각에 의해 미오성에 유폐되어 있다가 구출된 사람들이었다.
“정서장군께 인사 올립니다. 익주목의 차남 유탄입니다.”
“익주목의 사남 유장입니다.”
마등은 유언의 아들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미오성에 유폐돼 있던 유탄과 괴리현의 자택에 있던 유장을 확보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장안에 있는 유범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인사를 올렸다.
“황완입니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갇혀 지낸 시간이 더 긴데, 정서장군이 이렇게 헛된 이름을 잊지 않고 구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외다.”
“사도 어르신. 이 마등이 비록 재주 없으나 평소 어르신 같은 분들을 흠모해 왔습니다.”
마등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완에게 길게 읍을 하며 상석을 권했으나 황완은 한사코 사양했다.
“정서장군보다 먼저 태어났기에 일찍 벼슬을 했을 뿐, 재주가 없어서 나라를 구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죽지도 못하고 있던 몸이외다.”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어르신의 기개는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태위, 사공을 일컬어 삼공이라고 한다. 재상급에 해당하는 최고위 관직이다. 황완은 그 중 사도와 태위를 역임한 고관 중의 고관이었다. 젊어서는 병들어 가는 한나라를 개혁해 보려다가 모함을 받아 20년간이나 관직을 떠나 있었다. 황건적의 난으로 나라가 흔들리자 사람들이 재주 있는 그를 추천해서 황건적의 잔당을 토벌하는 큰 공을 세우고 삼공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강직한 성품은 어디 가지 않는지, 상국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려 할 때 이를 반대하다 다시 한번 면직되었다. 갖은 우여곡절을 거쳐 왕윤을 도와 동탁을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후 정권을 잡은 이각에 의해 미오성에 유폐된 그였다.
대외적으로는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황완이 마등에 의해 구출되었다. 황완은 선비들에게 이름이 높은 명사이니 이는 마가군에게 큰 정치적 자산이 될 터였다.
황완이 자리에 모인 제장들과 하나씩 인사를 나누고 나가자 본격적으로 무거운 의제가 도마에 올랐다.
“이제부터 여포군의 포로에 대해 처결하겠습니다.”
부간이 말하자 자리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계략을 써서 미오성을 탈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마가군이 여포군을 시원하게 격파한 적은 없다. 그러니 포로로 잡힌 장수들이라고 해 봐야 이름 없는 잡장들이었다. 악행을 저질러 온 자들은 참수하고 어쩌다 휘말린 자들은 적당히 두들겨서 쫓아내면 그만이었다.
그런 잡장들보다 중요한 건 여포의 가족이다.
여포는 처자식을 돌보지 않는다. 당장 곁에 두는 첩들이 아니고서는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니 여포의 아내와 어린 딸도 짐짝처럼 수레에 실려서 이동하다가 마가군이 노리개로 끌려가는 여인들을 구출할 때 붙잡히게 되었다.
여포의 아내 엄 씨와 어린 딸이 군의가 열리는 미오성의 집무실 가운데로 나왔다. 그들의 몸에 손을 대고 끌어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실상 끌려 나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포가 서른여섯 살이라고 하니 그 아내의 나이는 많아도 마흔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엄 씨는 마음고생이 심해서인지 자기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엄 씨는 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여포의 딸 여청영은 올해 열네 살이라고 했다.
‘여포의 딸… 나중에 원술의 아들과 혼담이 오가는 그 소녀구나.’
군의의 제일 말석에 있던 나관중은 여포의 딸을 바라보며 원래 역사에서 여포의 몰락을 떠올렸다. 여청영은 벌써 어머니보다 키가 크고 처녀티가 났다.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아버지를 닮았는지 표정은 굳세고 미색은 빼어났다.
엄 씨는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마등을 올려다보았다.
“장군,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지아비의 죄를 물으려면 저에게만 물어 주십시오.”
마등은 상석에서 묵묵히 여포의 처자식을 내려다볼 뿐 말이 없었다.
여포군에게 회전에서 패하고, 야습을 당해서 죽어간 군사들이 거의 이천을 헤아린다. 목숨을 잃은 장수와 군관들도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는 수장인 마등의 차남 마휴의 이름도 껴 있었다. 그러니 여포의 처자식에 대한 처분이 어떻게 날지는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장들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완전한 비무장의 여인들을 베라고 말하는 것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누군가 해야 할 말이라고는 생각했으나 자기 입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나선 것은 종사 부간이었다. 그는 악역을 피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역적은 삼족을 멸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저들의 목을 베십시오.”
부간이 입을 떼자 그제서야 제장들도 하나둘씩 거들기 시작했다.
“정에 이끌려 역적의 처자를 살리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여포의 처자식을 주살하여 의를 밝히십시오.”
“주공, 저들의 목으로 기도위 마휴의 원한을 씻으십시오.”
제장들이 생각하기에 여포의 처자를 가장 베고 싶은 건 마등일 것이다. 아들을 칼날에 잃은 아비의 심정을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하다못해 상관에게 마음의 부담이라도 덜어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처형을 주장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도리가 아닐까 싶었다.
마등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한참을 무표정하게 있던 마등이 입을 열었다.
“비장군의 생각은 어떠한가?”
모든 장수들의 시선이 마초에게로 쏠렸다.
마초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논의를 듣고만 있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마초가 입을 열었다.
“살리시지요.”
“살리라? 이유는 무엇인가?”
마등은 여전히 담담한 태도로 물었다. 마초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원수는 여인들이 아닙니다. 여포입니다. 그리고 여포를 불러들인 이각입니다.”
마등은 계속 표정이 없었다.
제장들은 마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마초의 말을 듣고 나서 잠시 후, 마등이 대답했다.
“비장군의 의견을 채택한다.”
마등은 그렇게 처분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길로 퇴청했다. 죽음을 각오했다가 살아남게 된 여포의 아내 엄 씨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마초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생전의 마휴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불과 지난달, 조조가 아버지의 죽음을 이유로 서주에서 대학살을 벌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서주 땅에 사는 수십만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가족의 복수라는 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설령 가족을 잃었다고 해도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 것은 복수가 아닙니다. 복수라는 핑계로 자신의 광기를 발산하는 것일 뿐이지요.’
‘복수는 한다면 직접 책임이 있는 자에게 해야지요.’
‘서량의 사내라면, 마가의 사내라면 취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마초는 가만히 허공에 손을 뻗었다. 마휴의 얼굴이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그날, 마초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를 떠올렸다.
“그래. 무고한 자를 희생시키지 않되 원수의 목은 반드시 벤다. 이게 마가의 방식이지.”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마초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방덕도, 서황도, 이감도, 월길도, 부간도 그 모습을 봤지만 다들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