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서로 싸우는 이리와 승냥이
전쟁을 하려면 주기적으로 보급이 필요하다. 곽사군은 2만이나 되니 더욱 그러했는데, 곽사군에 보급을 하러 오가는 것은 상서 가후였다.
보급을 위해 곽사의 군막을 방문한 가후에게 곽사가 서찰 한 장을 내밀었다.
“읽어 봐라, 가후.”
곽사는 틈만 나면 문관을 조롱하는 것을 즐겼지만 이는 사실 그가 유독 무식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마등에게서 알쏭달쏭한 서찰을 받고 어찌 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으니 결국 가까이 있는 문관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허, 이런…….”
서찰을 본 가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곽사는 인상을 팍 쓰면서 물었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놈의 편지냐?”
마등이 보낸 서찰은 군데군데 먹으로 지워져 있었다. 먹으로 지워진 내용을 빼면 문장이 앞뒤가 맞지 않아서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이런 계교를 쓸 줄 아는 자가 마등의 군영에 있었나.’
중간이 지워진 편지로 적을 의심에 빠뜨리는 것.
이것은 가후가 오래전부터 생각해 둔 책략이었다. 언젠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마등이 이런 책략을 쓰고 있는 것이다. 가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등은 오랫동안 소문을 들어 왔지만 이런 책략을 쓰는 자가 아니다. 그의 오랜 부하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런 책략을 쓰는 건 최근에 마등군에 합류한 그 사내…….’
마초.
마등의 장자 마초는 실로 영민한 자였다. 무예에 능하고 용병을 잘하는 것은 마등의 아들이니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기근을 예측하고 작물을 바꾸는 안목과 군량 탈취 작전을 벌이는 솜씨는 그가 뛰어난 책략가임을 말해 주었다. 우연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가후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마초 본인의 책략이든, 아니면 그 수하의 누군가가 낸 책략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마초가 이 정도의 지모를 쓸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장안 일대는 이각과 곽사로 인해 날로 황폐해지고 있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 장본인인 가후는 한때 마초라면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승승장구하던 마초가 여포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안도감과 함께 어딘가 모를 안타까움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 마초가 이렇게 반격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기인 용맹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으니 바로 꺾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꺾이지 않고 지모를 사용해서 반격하고 있었다.
‘영웅이다. 틀림없다.’
가후는 고개를 들어 곽사를 바라보았다.
이 멧돼지 같은 사내는 지금 자신에게 상대의 서찰이 무슨 뜻인지 묻고 있었다. 곽사는 매번 자신에게 글 읽는 놈이라고 퉁을 놓지만, 사실 자신의 지략에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여기서 마등의 계교를 밝힌다면 곽사는 그 말을 믿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이각의 손에 죽어가는 동녀들, 앵속에 취한 채 곽사에게 능욕당하는 부녀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기근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굶어 죽어가는 관중 평야의 백성들이 떠올랐다. 가후가 처음 이각과 곽사를 움직여서 왕윤을 쳤을 때는 생각지 못했던 희생이었다.
가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후, 귀가 먹었느냐? 이게 어떻게 된 놈의 편지냐고 묻지 않느냐?”
“…무식한.”
“뭣이?”
“무식한 마등이 문장을 제대로 쓸 줄 몰라서 생긴 일인 듯합니다.”
“무식해서 그렇다고?”
“그렇습니다. 그저 안부 편지 아닙니까? 잘 지내시는지, 식사는 잘하시는지 묻고 있군요. 문장을 쓸 때는 같은 말이 반복되지 않도록 써야 하는데 마등은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자인 모양입니다. 그러니 서찰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해서 이렇게 지저분하게 먹줄로 지워 가며 썼겠지요. 장군께서 염려하실 일은 아닙니다.”
가후는 그렇게 곽사의 우려를 일축했다.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던 곽사는 주변에서 제일 똑똑한 문관이 그렇다고 하니 그저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었다.
군막을 나온 가후는 어지럼증을 느껴서 잠시 돌부리에 걸터앉았다.
마초가 쓰는 계책을 간파하고도 외면했다. 이제 자신으로 인해 여포와 곽사는 서로 싸우게 될 것이다.
“이로써 벼락 맞을 확률이 현실이 되겠군.”
곽사는 마초가 여포를 이길 확률은 벼락을 맞을 확률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확률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후의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들 것인가?
“적어도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겠지.”
가후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마초라는 젊은이가 그가 생각한 대로의 그릇이라면 말이다.
* * *
가후가 떠나고 나서 얼마 후, 곽사의 군영에는 또 한 명의 손님이 도착했다.
“곽사, 무슨 개수작이냐?”
여포는 군막에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이미 몸은 주인이 권하지도 않은 상석에 앉아서 한쪽 다리를 반대쪽 무릎에 얹고 한껏 편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자 곽사도 꿈틀했다.
“여봉선이 이 건방진 놈, 오랜만에 찾아와서 문안 인사는 올리지 못할망정 무슨 헛소리냐?”
“개소리 집어치우고 내 말에나 대답해라. 마등과 무슨 수작질을 하고 있는 것이냐?”
“이런 애비 없는 놈이…….”
곽사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여포의 예의 없는 태도는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곽사는 한 번은 참기로 했다. 마등에게 받기로 한 앵속밭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곽사는 분노를 억누르며 대답했다.
“어디서 무슨 헛소리를 듣고 왔는지는 몰라도 그쯤 해둬라. 내가 마등과 수작질을 한다고? 그런 식이면 한 번 싸우고 미오성에 틀어박힌 네놈이야말로 무슨 꿍꿍이인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으시겠다?”
여포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가 쓴 봉시관에 길게 매달린 산새의 깃털이 꿈틀했다.
곽사는 애써 분을 삭이며 조곤조곤 말했다.
“얼마 전 마수성이가 나를 불러낸 적이 있었다. 항복이라도 하려나 싶어 나가 봤는데 실없는 옛날 얘기만 잔뜩 늘어놓고 말더군. 머리가 돌아버린 모양이다.”
평소의 곽사라면 당장 노호성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앵속밭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포는 곽사답지 않은 모습을 보자 더 수상함을 느꼈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걸 믿으라는 말인가?”
“마수성이가 덜 떨어진 걸 어쩌라는 말이냐? 편지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지 오늘은 이런 서찰도 보냈다.”
곽사는 그렇게 말하며 마등이 보낸 서찰을 여포에게 홱 내던졌다.
여포는 서찰을 펼쳐보자 눈을 의심했다. 서찰의 중간중간 중요한 부분이 먹으로 지워져 있었다. 영락없이 곽사가 중간중간 중요한 부분을 지워둔 듯한 서찰이었다.
“곽사. 돌았냐?”
“뭐야?”
“내 수하가 얼마 전 마등의 진영에 갔었다. 거기서 마등의 아들놈이 악공에 무희까지 불러 놓고 네놈의 사자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아 왔지.”
“뭐…뭐라고? 그게 무슨…….”
“그러니 나에게 설명해라. 네놈이 마등과 어떤 논의를 몰래 진행했으며, 이 서찰의 내용은 왜 지웠는지.”
여포가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곽사도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당장 여포를 두 쪽으로 쪼개고 싶었지만, 여포가 지닌 무예에 대한 기억이 그런 충동을 막았다.
“여봉선이, 네놈… 말을 조심해라. 그 서찰은 내가 지운 게 아니라 애초에 지워진 채로 온 것이다. 그리고 마등의 진영에 내 사자가 간 일이 없다. 네놈이야말로 왜 수하를 마등의 진영에 보낸 것이냐? 혹시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냐?”
“나에게 물으라 하지 않았다. 곽사, 네놈의 대답은 충분치 않으니 다시 제대로 대답해라. 대답 여하에 따라 네놈의 코가 잘릴 수도 있다.”
여포는 이미 곽사의 코를 베어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우욱…….”
곽사의 인내심은 거기서 한계에 달했다. 애초에 별로 있지도 않은 인내심을 한계까지 쥐어 짜내서 버티고 있던 곽사다. 참지 못하고 결국 대도를 뽑아 들었다.
“이놈, 이 성씨 셋 가진 종놈아! 건방지게 구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곽사의 두 콧구멍에서 콧김이 마구 비어져 나왔다. 코가 잘리고 없으니 콧김은 직선으로 뿜어지지 못하고 바로 잘려 나간 코언저리로 흩어졌다. 콧김이 피부로 느껴지자 곽사는 새삼 더욱 화가 치솟게 되었다.
여포는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작은 여유 있어 보였지만 곽사가 대도를 뽑아 들고 육박해 오는 사이에 빠르게 이루어졌다.
퍽!
여포는 왼손으로, 곽사가 대도를 쥔 오른 손목을 쳐내면서 동시에 오른 주먹으로 곽사를 가격했다. 곽사의 대도가 허공을 날아 군막을 찢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주먹에 맞은 곽사는 턱이 돌며 몇 발짝 뒤로 밀려났다.
“크아악!”
곽사도 쉽게 지지 않았다. 기합 소리를 지르며 이내 자세를 회복하고 주먹질로 맞불을 놓았다.
퍽! 퍽!
8척의 여포와 8척 5촌의 곽사가 맞붙자 군막이 비좁았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군막 밖으로 나와서 권장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곽사는 본래 거친 서량에서도 당할 자가 없다는 맹장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곽사가 휘두르는 주먹을 맞고 이미 몇 명이 죽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여포였다.
시간이 지나자 아무래도 곽사가 밀리기 시작했다. 여포의 주먹은 곽사에게 계속 닿았지만 곽사의 주먹은 여포에게 닿지 않았다.
콰직!
여포가 몇 차례 허초로 유인한 후 곽사의 턱을 후려쳤다. 잠시 비틀거리던 곽사가 결국 무릎을 꿇었다.
“곽사, 네놈은 평소부터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 그렇다고 싸움터에서 마등의 아들놈과 내통을 해?”
한바탕 싸움으로 머리에 피가 돌자 원래 가지고 있던 의심은 더욱 커졌다. 이미 여포의 머릿속에서 곽사는 배신자가 되어 있었다. 상대가 하필 마초라는 사실이 화를 더욱 부추겼다.
여포는 땅에 무릎을 꿇은 곽사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곽사의 왼쪽 눈을 파고들었다.
투둑.
“끄악! 끄아아악!”
졸지에 한쪽 눈을 잃게 된 곽사는 끔찍한 비명 소리를 울리며 발버둥 쳤다.
“첫 번째는 코, 두 번째는 눈알. 세 번째는 목이다. 목이라도 부지하고 싶으면 당장 꺼져라.”
여포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의 등 뒤에서 한쪽 눈을 잃은 곽사가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 * *
마가군 진영.
“와, 진짜 나보다 더한 놈이네. 설마 이렇게까지 화끈하게 걸려들 줄이야.”
마초는 첩자의 보고를 받자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난폭함과 저돌성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던 자신이다. 그래서 지난 생에서 가후의 이간계에 걸려들었을 때는 그날로 동맹이었던 한수와 크게 다투고 사이가 틀어졌다. 서량 군벌의 맹주인 마초와 큰 어른인 한수의 사이가 틀어졌으니 조조군과 회전을 벌였을 때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여포의 반응은 그보다 더욱 화끈했다. 그 길로 곽사의 군막을 찾아가서 흠씬 두들겨 패고 한쪽 눈알을 빼놓았다는 것이다. 격분한 곽사는 성치 않은 몸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여포군 진영을 기습했으나 당해내지 못하고 참패를 당했다고 한다.
묵묵히 듣고 있던 서황이 말했다.
“여포의 철갑기병대 함진영은 대단한 정예부대였습니다. 어두운 밤에도 백주대낮처럼 움직이더군요. 곽사의 서량병들이 용맹하다 한들 당해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마초와 방덕, 나관중은 서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오성 전투에서 마초가 여포에게 패한 후 마가군은 큰 위기에 처했다. 서황이 함진영의 습격을 맞아 싸우면서 장평관 수비병들을 거진 다 살려서 돌아오지 않았으면 재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 그래서 곽사와 여포가 자기들끼리 크게 싸웠으니 이 위태로운 동맹은 깨지겠군. 이각 입장에서는 곽사와 여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겠지. 이감, 그래서 이각은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
마초가 이감을 바라보며 묻자 전령부대장 이감이 대답했다.
“이각의 선택은 곽사입니다.”
“곽사라… 결국 여포를 버리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여포군이 강하다고는 하나 여포는 누구도 다룰 수 없는 자. 그리고 이각과 곽사가 동탁군 내 서량 파벌의 대표라면 여포는 병주 파벌의 대표격이라, 이각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곽사군은 장평관으로 퇴각하고 여포는 철군한다고 합니다.”
마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조만간 여포가 미오성을 비우고 동쪽으로 떠나겠군. 원래 가려고 했던 원소에게로 가던가, 아니면 중원의 다른 군벌에게 의지하겠지. 그리고… 그대가 매수한 여포군의 군리 하나가 재미있는 정보를 줬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이간계에 걸려서 월길을 만나러 왔던 진의록이라는 자인데, 최근 여포가 그자의 처를 탐내서 처를 뺏길 위기에 처했다면서 다시 저에게 줄을 대더군요. 그자의 말에 따르면 여포는 장안성의 처녀들을 이천 명이나 징발해서 부하들의 성노리개로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철군하면서 그들 중 백여 명을 끌고 갈 계획인 듯합니다.”
“끌려 온 처녀들이 기마술을 알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수레에 태워서 가겠군요.”
나관중이 말하자 마초가 말을 받았다.
“그래. 우리는 철군하는 여포를 습격해서 그 수레를 탈취한다.”
여포가 철군하면 미오성은 마가군의 손에 떨어진다.
미오성의 금은보화는 여포가 챙겨 가겠지만 식량은 운송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대부분 마가군의 것이 될 것이다. 그 식량을 기반으로 앞으로 이어질 기근을 버텨내고 관중을 재건하는 것이 마가군의 목표다.
서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장안성에서 끌려간 처녀들을 전원 구출한다면 아군의 명성은 더욱 치솟겠지요. 그리고 이 싸움이 여포가 곽사와의 내분으로 퇴각하며 끝나는 것보다는, 우리가 어떻게든 마지막 일격을 가하면서 끝나면 세간의 평판에도 차이가 있을 겁니다.”
“맞는 말일세.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그날의 패배를 되갚아 주는 것. 곱게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굳이 투장까지 다시 벌일 생각은 없다. 그러나 마초는 여포에게 어떻게든 큰 상실을 안겨 주고 싶었다. 여포는 엽색 행각을 위해 살아가는 자이니 여인들을 빼앗긴다면 길길이 날뛸 것이다.
마초의 얼굴에 악당 같은 웃음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