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마초 대 서영
서영은 그대로 말을 달려 들어와 마초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죽어라!”
마초는 몸을 살짝 왼쪽으로 기울였다. 절영이 알아서 왼쪽으로 피해 주니 그것만으로도 서영의 창끝을 넉넉히 피할 수 있었다.
“설마 그 정도에 죽겠냐?”
마초는 비웃음과 함께 오른손에 든 창으로 서영을 찔렀다. 서영도 방금 내지른 창을 회수해서 마초의 창격을 받아냈다.
서영이 타고 있는 말도 어지간히 크고 영리한 말이었지만 마초가 탄 절영에는 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말의 차이가 크니 자연스럽게 승부도 마초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마초는 상대의 공격을 쉽게 피하고 그만큼 자신의 공격에 힘을 쏟았고, 서영은 매번 공격을 어렵게 막으니 그만큼 자신의 공격에 힘을 쏟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영은 마초와 대등하게 창을 겨루고 있었다.
‘과연 동탁의 상장 서영. 상당히 고령일 텐데 아직도 창술이 신묘하구나.’
마초는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또한 지난 생에서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400년을 이어 온 한 제국은 마초의 유년 시절부터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군웅들이 할거하는 전란의 시대를 거쳐서 마초가 중년기에 이르자 천하가 셋으로 쪼개지는 삼국 시대가 시작되고, 이후로도 수십 년간 전쟁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무장들 중 누가 가장 강한가?
이는 후세의 호사가들에게 끊이지 않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후세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들 중 최강의 무력 집단을 꼽으라면 누구나 한 집단을 꼽을 것이다. 북방의 맹장과 강병들로 이루어진 동탁군이다.
동탁군 출신의 이각과 곽사는 천하를 휩쓴 맹장들이다. 정치적 실책으로 자멸했을 뿐, 천하를 휩쓰는 동안 대등한 싸움에서는 결코 지지 않았던 무장들이다.
동탁의 양자 여포와 그가 이끄는 기병대는 천하제일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런 맹장들 중에서도 최상위로 꼽히던 서영이다. 부대 지휘가 특기인 것으로만 알았는데, 직접 창을 맞대 보니 창술 또한 대단하구나.’
마초는 서영의 실력에 대해 잠시 감탄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하지만 애석하군. 여기서 하필 나를 만나다니.”
서량병을 이끌고 천하를 진동시켰던 자.
그 마초가 30년의 시간을 거슬러서 돌아왔다. 원래도 타고난 무골이었던 그다. 지금은 회귀하여 21세의 육체에 30년간의 수련과 경험이 녹아 있었다.
마초는 크게 창을 휘둘러 서영을 떼어내고 자신도 몇 발짝 뒤로 이동했다. 말을 탄 두 사람은 순식간에 이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 보게 되었다.
서영은 마초와 창을 맞대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했다.
“네놈은… 정체가 뭐냐?”
“말했지 않은가, 서량의 마초라고. 말 위에서는 아마 내가 천하제일일 것이다.”
단지 싸움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서영은 마초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어린 나이에도 강할 수는 있다. 여포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네놈은 뭔가 다르다. 네놈의 수는 아무리 봐도 애송이의 것이 아니야.”
마초의 싸움에는 다음 수를 예측하는 듯한 움직임이 너무 많았다. 초식의 완성도도 지나치게 높고 동작이 완벽했다.
‘만약 젊은이다운 빠르고 강한 공격으로 나를 몰아붙였다면 충분히 납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초라는 놈이 펼치는 수는 결코 젊은이의 것이 아니다.’
마초의 수는 전부 오랜 수련과 풍부한 실전경험을 가진 자만이 쓸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서영은 마초에게서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곧 죽을 테니 알려주지. 내 나이도 오십이 가깝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30년의 시간을 거슬러 젊은 시절로 되돌아왔지.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마초는 빙글빙글 웃으며 반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서영은 웃을 수 없었다.
“시간을 거슬러 돌아왔다고?”
만약 서영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돌아간다면?
‘지금 내가 30년을 거슬러서 과거로 돌아간다면…….’
20대 후반의 육체가 주어진다면 서영 자신은 어느 정도의 무장이 될 것인가?
“한없이 천하제일에 가깝겠지.”
서영은 낮게 읊조리며 마초를 향해 말을 몰았다. 만약 마초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무예 수준 또한 한없이 천하제일에 가까울 터였다. 그렇다면 어차피 살아날 방법이 없다.
마초도 창을 길게 한 번 돌리며 말을 달렸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20장, 15장, 10장, 5장, 3장을 거쳐서, 1장의 거리에서 서영과 마초의 두 자루 창이 교차했다. 서영의 철창이 산이라도 부술 듯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탁.
그러나 서영의 철창은 맥 빠지는 소리와 함께 마초의 창에 부딪혀서 방향을 틀었다.
마초는 창대를 돌리며 서영의 철창이 날아드는 순간에 맞춰서 옆에서 힘을 가했다. 정확한 지점에서 정확한 강도로 힘을 가하자 서영의 창은 궤도를 이탈하며 허공을 갈랐다. 상대의 힘을 읽고 역이용하는 청경의 기법이었다.
마초는 그대로 창을 슬쩍 아래로 눌러서 서영이 탄 말의 가슴팍을 찔렀다. 세게 찌를 필요도 없었다. 쿡 찌르니 말이 달리는 속도와 함께 옆으로 베인 상처가 주욱 그어졌다.
우당탕!
옆구리를 베인 서영의 말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백발이 성성한 서영도 말과 같이 땅바닥을 굴렀다.
마초는 말을 몰아 서영에게 다가갔다. 서영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힘겹게 일어나서 마초를 마주했다.
“크흐흐흐, 이렇게 져 버렸군.”
서영은 피투성이가 되어 웃고 있었다.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듯 보였다.
“과연 서영, 거물답게 여유가 넘치는군.”
“크흐흐, 방금 전의 초식을 보니 네놈 말을 믿을 수 있겠군. 30년 이상을 수련한 자만이 닿을 수 있는 경지다. 시간을 거슬러 왔다고 했느냐?”
“그래.”
“그렇다면 아마 네놈은 한없이 천하제일에 가까울 것이다.”
서영의 말을 듣자 마초는 피식 웃었다.
“천하제일이면 천하제일이지, 한없이 천하제일에 가까운 건 또 뭐야?”
“어지간한 시대라면 천하제일이 될 만한 기량을 갖췄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은 아닌가?”
이번에는 서영이 낮게 웃었다.
“크흐흐흐, 네놈이 아무리 대단해도 뛰어넘지 못하는 무장이 한 명 있다.”
“그것 참 대단하시군. 그게 누구냐?”
“여포.”
마초는 그대로 코웃음을 쳤다.
“하여튼 여기저기서 여포와의 비교질이 끊이지 않는군.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나를 써라.”
“응?”
마초는 인상을 쓰며 서영을 바라보았다. 서영의 눈빛은 진지했다.
“네가 30년의 시간을 거슬러 왔다면 무예가 뛰어난 건 물론이고,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도 알고 있겠지. 그 정도라면 천하를 노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다.”
“별로 천하를 노릴 생각은 없는데. 그나저나 내 문제가 뭐냐?”
“지금 네가 여포를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서영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말투가 진지했다.
“여포만 뛰어넘으면 너는 분명히 천하를 노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는 여포를 이길 수 없다. 그러니 나를 써라.”
“서영, 너를 쓰라고?”
“그렇다. 나는 본래 선봉장이 아니라 총대장에 더 적합하다. 여포군의 내부 사정도 속속들이 알고 있지. 그러니 여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내가 병사를 이끌면 잡을 수 있다. 잊지는 않았겠지? 그 조조를 꺾은 것이 나라는 걸.”
“조조를 꺾었다라.”
“그렇다. 조조는 나에게 처참하게 패한 후 꽁무니를 빼고 도망갔다. 그런 나를 써서 여포를 꺾어라. 그렇다면 너는 천하를 쥘 수 있다.”
마초는 서영을 바라보며 실소했다.
“서영. 조조가 너에게 패했다고?”
“그렇다.”
“그래서 조조가 죽었나?”
“무슨 소리냐?”
마초는 말 위에서 투구를 벗었다. 길고 검은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마초는 투구를 안장에 걸치고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조조에게 한 번의 패배를 안겼다고 그를 꺾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는 지금 살아있다. 조조가 살아있는 한 그는 진 것이 아니다. 네가 오래 산다면 그는 다시 일어나서 너에게 패배를 안길 것이다.”
그가 여포에게, 원소에게, 그리고 나에게 그랬듯이.
“조조의 목에 가까이 갔었다고 자만하지 마라. 조조는 목이 붙어 있는 한 다시 일어서니까.”
서영에게 하는 말인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마초는 말머리를 돌렸다. 마가군 병사들이 서영에게 창을 겨누고 둘러쌌다.
“크흐흐흐, 마초, 그래서 나를 쓰지 않겠다는 거냐? 여포와의 싸움이 시작된 뒤에는 후회해도 늦다. 너의 방식으로는 여포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여포와 맞상대해 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깨닫게 될 거다.”
“그놈의 비교질에서 해방되려면 아무래도 여포를 죽여야 되겠군. 너희 동탁군 놈들이 망쳐 놓은 관중 지방을 재건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이다. 마가군에 동탁군의 망령은 필요 없다.”
마초는 영을 내렸다.
“서영을 참수해라.”
* * *
마초는 서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마초가 이끄는 수십 기가 적진을 정면돌파해서 대장 서영과 부장 송헌을 벴다. 서영이 우회시킨 주력 기병대는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서 미오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등이 장평관을 손쉽게 점거하면서 미오성은 장안 방면과 따로 떨어져 고립되었다. 미오성에서 출진한 서영의 선봉대는 마초에게 패했고, 수많은 전장에서 명성을 쌓아 올린 맹장 서영은 마초와의 투장에서 패해 목이 떨어졌다.
미오성 공략은 이제 8부 능선을 넘은 것으로 보였다. 마가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니 미오성에 주둔하고 있는 여포군으로서도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여포가 직접 출진하는 것이었다.
미오성은 성벽이 높고 상대인 마가군의 사기는 최고조다. 보통의 무장이라면 성안에 틀어박혀서 농성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포의 선택은 회전이었다. 기병과 보병을 합쳐서 삼천 병력만을 이끌고 마초가 이끄는 오천 명의 군사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온후께 보고 올립니다.”
여포군의 장수 하나가 말을 달려 거대한 네 바퀴 수레 앞에 멈췄다. 전쟁터에서는 보기 어려운, 너덧 사람이 함께 누울 수 있는 큰 수레였다. 여기저기 장막이 처져있었다.
“말해라.”
수레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맑고 굵었다. 매력적인 남자의 음성이었다.
“예. 적의 본대가 이십 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곧 충돌이 일어날 예정입니다.”
잠시 후 수레의 장막이 안에서 휙 걷혔다.
“학맹, 적의 대장이 마등이냐?”
장막을 걷자 수레의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수레 안에는 반라의 여포가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그의 몸은 8척의 키에 건장하고 균형 잡힌 근육질이었다. 속살은 마치 한 번도 상처 입은 적이 없는 것처럼 작은 흉터 하나도 없이 매끈했다. 남자가 보더라도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느낄 만한 나신이었다.
수레의 장막을 걷은 것은 전라의 여인이었다. 수레의 한쪽 끝에 앉아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목에는 가죽 목걸이가 채워져 있고, 어깨에는 양에게 찍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은 완벽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절세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법한 청순한 얼굴은 육욕에 달아올라 여포가 선사한 흥분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동탁의 시비 출신으로 초선이라고 알려진 여인이었다.
수레의 다른 한쪽에는 또 다른 전라의 여인이 있었다. 몸의 곡선이 성숙해 보이지 않았으나 얼굴은 절세미인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웠다. 동탁의 손녀 동백이었다. 동백은 혼이 빠져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죽 목걸이가 채워지고 양처럼 낙인이 찍힌 것은 초선과 마찬가지였다.
학맹은 초선과 동백의 나신을 보자 잠시 시선을 빼앗겼으나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여포를 보며 말했다.
“온후, 마등은 지금 장평관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오늘 상대하셔야 하는 적은 마등의 아들 마초입니다.”
“귀찮군. 장료가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장료는 소년 시절부터 오랫동안 여포를 따라왔던 부하다. 작년 말, 여포가 이각의 제의를 받고 미오성으로 회군할 때 갑자기 무리에서 이탈해서 이후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여포는 어지간한 일은 부하들에게 맡기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여포 자신이 꼭 해야 하는 일마저 맡길 수 있는 부하는 고순과 장료, 두 사람이었다.
그런 장료가 갑자기 없어졌으니 여포의 불편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학맹, 내 칼과 말은 준비되어 있느냐?”
“예. 적토마는 옆에서 계속 따라오고 있습니다. 무인도(無刃刀)도 준비돼 있습니다.”
학맹은 옆의 군졸에게 대도를 건네받아 여포에게 내밀었다. 전체 길이는 약 6척 1촌(140cm), 날 폭이 유독 넓은 큰 칼이었다.
“오랜만이군.”
부우웅.
여포는 수레 위에 서서 반라의 몸으로 무인도를 잡아서 허공에 한두 번 돌렸다. 군졸들은 들고 있기조차 버거운 묵직한 칼이지만 여포는 무인도를 나뭇가지처럼 가볍게 휘둘렀다. 여포는 무인도를 학맹에게 다시 넘긴 후 옷을 꿰어 입기 시작했다.
“학맹, 내가 일하는 동안 너도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온후.”
“경기병을 준비시켜라. 한 시진 안에 적이 패주하기 시작할 테니 추격대를 미리 편성해라.”
“존명!”
“그리고 동백.”
동백은 분노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여포를 응시했다. 아랫입술을 깨물어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여포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한 시진 안에 돌아올 것이다. 그때도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
여포는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그새 갑옷까지 갖춰 입고 있었다. 그리고 수레 위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척.
여포가 말에 올라탔다. 피처럼 붉은빛을 가진 거대한 준마였다.
오랜만에 주인을 태운 적토마가 앞발을 들고 울었다. 적토마의 앞발이 땅에 닿는 순간 여포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서 작은 관을 얹었다. 깃털로 장식한 봉시관이었다.
관에 매달린 산새의 깃털 두 가닥이 늘어졌다가 길게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