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서량을 지키는 관문
야음을 틈타 산을 넘는 마등군을 기습하기 위해 출진한 왕방군.
“으흑흑, 하지만 마등군이 야습을 미리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부대는 전멸, 왕방 장군은 신원 미상의 장수가 휘두르는 도끼에 절명했습니다!”
전령은 울면서 비보를 전했다. 그러나 보고를 듣는 장평관 수비대장 이몽은 마치 이를 미리 예상한 듯 당황하지 않았다.
“할 수 없지. 알았다.”
어차피 왕방 따위가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전장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니 혹시나 요행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역시나였다. 정서장군 마등은 왕방이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말을 타고 산을 넘는 중이었으니 기동이 불편해서 약간 고전하기는 했겠지만 말이다.
“잠깐, 그런데 상대 중에 이민족 부대가 있었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장군. 산을 평지처럼 오르내리고 숲속에서 난전을 벌이는 데 귀신같이 능한 놈들이었습니다.”
“뭣이? 강족이나 선비족 기병대가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이냐? 산에서 싸울 때는 말은 짐이 될 뿐이란 말이다.”
“장군, 이민족 부대는 말을 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병이었습니다.”
“응?”
마등은 분명히 기병을 이끌고 산을 넘는다고 했었다. 장안으로 짓쳐 들어가 이각과의 회전을 벌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째서 대규모의 보병대를 데리고 있다는 말인가?
이몽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순간, 밖이 소란스러워지며 또 다른 병사가 뛰어 들어왔다.
“급보! 마가군의 마초가 성문 밖에서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북을 치면서 장군보고 나오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밤중에? 알았다, 내가 나가 보마.”
이몽은 서둘러 장평관의 서문으로 향했다. 서량 방면으로 나 있는 성문이었다.
‘마수성은 적당히 열심히 싸우는 척하라고 말했다. 그자가 나를 속인 게 아니라면 저놈들도 진심으로 싸울 생각은 아닐 것이다.’
서문의 성벽 위에 올라서 적진을 살펴보니 과연 자신의 생각이 맞는 듯했다.
상대는 성문에서 멀리 떨어져서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반이 기병이었다. 말이 성벽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성문을 걸어 잠그면 기병은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내가 바로 정서장군의 장자 마초올시다! 이몽 장군은 속히 나와서 내 말을 들으시오!”
스스로 마초라고 지칭하는 젊은 장수가 대열의 앞으로 나왔다. 곁에는 단 한 기만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마초는 단 한 기만을 거느리고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거리까지 다가와서 장평관의 성문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저놈이 양봉군의 군량고를 털었다는 마초인가? 상당히 영민한 줄 알았더니 역시 경험이 부족한 풋내기로군. 기병만 이끌고 공성을 하러 오는 놈이 어디 있나?”
이몽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마초는 아마도 마등에게서 적당히 싸우는 시늉만 열심히 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리라. 그런데 그렇다고 기병을 끌고 공성을 하러 온다는 건 너무나도 수준 이하가 아닌가?
“내가 바로 장평관의 수비대장 이몽이다. 마초는 고할 것이 있으면 고하라.”
이몽은 성벽 위에 올라서 그렇게 말했다.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어차피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다.
‘저기서 쏜다고 해도 잘해봐야 성문 앞에 떨어지겠군.’
이몽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마초가 큰소리로 외쳤다.
“정말 이몽 장군이 맞소?”
“그렇다. 용건이나 말해라.”
이몽이 재차 확인하자 마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몽에게는 들리지 않을 크기였다.
“그렇군. 그러면 죽어라.”
“뭐라고? 큰 소리로 말해라, 뭐라고 했느냐!”
이몽은 마초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자 짜증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어지간히 경험이 부족한 풋내기처럼 보였다.
이몽은 그렇게 마초와의 답답한 대화에 집중하느라 마초의 뒤에 있던 기병 하나가 활을 당기는 것을 눈치채는 것이 늦었다.
활은 선비족의 양식이었다. 위아래로 길지는 않지만, 앞뒤로 시위가 길게 당겨지는 만궁이었다. 마초의 뒤를 따르던 기병은 팔이 길고 어깨가 넓어서 한껏 활을 길게 당길 수 있었다. 어지간히 강궁을 쓴다는 무사들보다도 당기는 길이가 3할 이상 길었다. 그가 당기는 활은 산양의 뿔로 만든 각궁이라 더욱 당기기 힘들겠지만 얼마나 힘이 좋은지 그렇게 길게 활을 당기면서도 시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탕!
기병이 시위를 놓자 장평관의 밤하늘에 맑은 시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몽은 그제서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놈이 활을 쏜 것 같은데? 서찰이라도 묶어서 쏴 보내려는 것인가? 하여튼 셈이 안 되는 놈이군.”
셈이 빠른 이몽이다. 80장 거리에서는 화살이 닿지 못한다는 점을 순식간에 깨달았다.
‘아마 화살에 편지라도 묶어놓았나 보군. 멍청한 놈, 이 밤중에 성문 아래에 화살이 떨어지면 주우러 가는 것도 큰일이란 말이다.’
이몽은 화살의 사거리도 셈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경멸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이몽의 시야 한가득 시꺼먼 화살촉이 들어왔다.
퍼억!
이몽의 눈을 뚫은 화살은 거대했다. 보통의 병사들 것보다 5할은 더 긴 화살에 두 배는 더 무거운 화살촉이 달려 있었다. 거대한 화살은 이몽의 눈자위를 관통해서 나무 기둥에 박혔다. 두꺼운 나무 기둥이 그대로 쩍 갈라지며 금이 가고 화살깃이 부르르 떨었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장군!”
수비병들이 저마다 외마디 비명을 질렀지만 이몽은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이몽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쓰러졌다. 거대한 화살이 뚫고 지나간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다.
* * *
이몽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자 마초는 뒤에 있는 방덕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 진짜 되네? 거리가 80장(약 200m)이나 될 텐데.”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 하지만 될 확률이 더 높은 건 사실이야. 이번에는 됐군.”
방덕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화살이 명중하고 빗나가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는 활을 쏘면 쏠수록 화살 앞에 겸허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80장 거리에서 마상사격으로 머리를 맞췄잖아? 그것도 성벽 위에 있는 표적을 겨냥해서. 봐도 믿기지가 않는군.”
“왜 이래? 지난 생에서는 내 활 솜씨를 구경하지 못했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때는 나도 그냥 잘 쏘나 보다 하고 말았지.”
방덕은 궁술의 달인이었다. 서량에 계속 머물러서 중원까지 이름을 떨치지 못했을 뿐, 가히 신궁이라고 불리기 부족함이 없는 솜씨였다. 이 신기에 가까운 궁술을 다시 보면서 마초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착상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군에 이 정도의 궁수가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영명의 정체를 숨기고 가치가 높은 표적을 기습적으로 쏘게 한다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마초가 떠올리는 것은 저격의 개념이었다. 30년간의 전쟁 경험을 거치고 회귀했기에 할 수 있는 생각들이었다.
실제로 이번 싸움에는 방덕의 한 발이 큰 역할을 했다. 이몽이 죽자 지휘관을 잃은 장평관의 수비병들은 우왕좌왕했다. 그 틈을 타서 마가군 궁기병들이 나서서 적당히 화살을 쏟아붓는 척했고 성벽 위의 적들도 혼란한 가운데 응사했다. 그러나 먼 거리에서 쏘는 화살은 서로에게 닿지 않았다. 그저 두 진영은 어두운 밤에 허공에 화살을 날리는 것에 한껏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마초가 노리던 것이었다.
먼발치의 마가군 기병들을 향해 눈먼 화살을 당기던 장평관 수비군 사이에서 비명이 터졌다.
“동문, 동문이 뚫렸습니다!”
“무슨 소리냐? 지금 적은 서문에 와 있는데 동문이 왜 뚫려?”
“동문에 갑자기 이민족 부대가 나타나서 성벽을 타고 올랐습니다!”
“뭣이!”
장평관 내부가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서문에 나타난 기병대가 이몽을 활로 쏴서 죽이더니, 그 혼란을 틈타 동문을 넘는 이민족 부대가 있다는 말인가?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문의 적에 집중하던 수비병들의 뒤에서 키가 1장에 가까운 거인이 나타났다.
“전부, 죽인, 다.”
익주에서 파견된 남만병 부대장 올돌골이었다. 올돌골은 더듬더듬한 한족 말을 내뱉으며 양손에 긴 창과 큰 칼을 한 자루씩 들고 휘둘렀다. 누가 봐도 무예 실력은 대단치 않았다. 그러나 압도적인 완력과 긴 팔, 공중에서 내려찍는 각도 앞에 창술이나 검술은 무의미했다.
“으악!”
“흐악!”
올돌골이 난동을 부리자 장평관의 수비병들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쓰러져 나갔다. 성벽을 기어올라 성으로 진입한 남만병들은 그 틈에 동문을 제압했다.
지휘관을 잃은 수비병들이 우왕좌왕하다 겨우 전열을 수습하고 동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성문이 열린 다음이었다.
“활을, 활을 쏴라!”
임시로 수비병을 지휘하는 소교가 비명 소리처럼 들리는 호령을 내렸다. 수비병들은 이를 악물고 저마다 시위를 당겼다. 열린 동문으로 뭔가가 들어오자 수비병들은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동문으로 들어온 무언가에게 화살이 쏟아졌다.
퍼퍼퍽!
동문에서 들어온 것은 수레였다. 수레에는 육중한 방패가 여러 개 세워져 있었다. 수레 위에 세워진 방패에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박혔다.
그러나 수레는 멈추지 않았다. 올돌골이 수레 뒤에서 수레를 밀자 무거운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비병들은 기겁해서 화살을 퍼부었지만, 방패에 꽂힌 화살만 늘어날 뿐이었다.
수레가 이십여 장을 굴러오자 수비병들은 활 대신 창과 칼을 뽑아 들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수레를 밀고 있는 올돌골에게 최후의 저항이라도 해 볼 셈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수레에 실린 방패 더미 속에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서황이었다.
“주, 죽여라! 저놈을 먼저 죽여!”
소교가 서황을 가리키며 소리쳤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황은 대부를 한껏 길게 잡고 횡으로 휘둘렀다.
퍽!
도끼날이 그린 궤적을 따라 수비병들의 팔, 다리, 몸통이 동강 나서 하늘을 날았다.
“항복해라. 그래야 살 수 있다.”
서황은 그 말을 남기고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왼손에 대형 방패, 오른손에 대부를 들고 창을 쥔 수비병들의 대열로 돌진했다.
“창을 세워서 겨눠라!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도 한 놈이다. 대열만 유지하면 이길 수 있다!”
장평관의 수비병들은 농사짓다 끌려온 농민병이 아니었다. 저마다 돈을 받고 훈련을 하는 직업군인들이었기에 소교의 지시를 금방 이해했다. 창진만 유지하고 있다면 맹장 한 명은 충분히 잡을 수 있다.
퍽!
그러나 수비병들의 기대는 단 일격에 산산이 깨졌다. 서황이 방패를 앞세워 창진에 몸통 박치기를 하자 십여 명이 우르르 밀려나며 뒤로 쓰러졌다. 뒤로 쓰러지는 사람이 생기자 대열은 자연스럽게 흐트러졌다. 대열을 유지하지 못하는 보병은 맹장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우측 상단에서 좌측 하단으로, 다시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서황은 대부를 두 번 휘둘렀다. 도끼날로 허공에 그린 격자를 따라 또다시 피가 흩뿌려졌다. 연이은 두 번의 참격은 대여섯 명의 몸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서황의 근처에 있는 수비병 전체의 마음에서 전의를 꺾어 놓았다.
“다시 한번 말한다. 항복해서 삶을 구하라.”
우뚝 선 서황에게 더 이상 창을 겨누는 자는 없었다. 다들 땅바닥에 창칼을 던지고 항복의 의사를 표시했다.
제압당한 동문으로 마가군이 쏟아져 들어왔다. 장안을 공략하는 척 산을 넘다가 우회해서 장평관 동문을 들이친 마등의 선발대였다.
마등은 장평관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저항하는 수비병들을 제압하는 한편 바로 서문을 열었다. 서량 방면의 침입자로부터 장안을 보호하는 관문 장평관은 하룻밤 사이 동서로 활짝 열리게 되었다.
열린 서문으로 마초가 이끄는 기병대가 들어왔다. 선두에 선 마초는 마등을 보자 말에서 뛰어내려 군례를 취했다.
“정서장군, 날이 밝기 전에 남은 수비병들을 완전히 제압하겠습니다.”
마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평관의 동문을 닫게 했다.
장안 쪽으로 난 동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장평관의 서문은 서량 방면, 동문은 장안 방면이다. 마초가 서문을 공략하는 사이에 산을 넘어간 마등의 부대가 장안 방면에서 동문을 공략한 것이다.
그 동문이 마등에 의해 닫혔으니, 이제 장안에서 서량으로 향하는 적들은 장평관을 넘어야만 할 것이다. 마등은 닫힌 동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날이 밝기 전에 장평관을 완전히 점거한다. 이제부터 장평관은 장안으로부터 서량을 지키는 관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