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장안을 지키는 관문
서량 방면의 침공으로부터 장안을 지키는 관문 장평관.
그 앞에는 마등이 이끄는 마가군 기병대가 빼곡히 집결해 있었다.
마등은 군사들을 뒤로 물려서 성문 앞에 넓은 공터를 만들었다. 공터의 중심에 서 있으면 양쪽 진영 어디에서 화살을 쏴도 닿지 않을 정도였다.
그 공터의 한가운데로 마등이 혼자서 말을 타고 나왔다. 잠시 기다리자 성문이 열리더니 이몽 역시 말을 타고 공터로 나왔다.
“수성 형, 어쩌자고 나를 단둘이 보자고 하셨소?”
“미안해서 그랬지. 나는 자네가 미오성에 계속 있는 줄 알고 일부러 미오성을 비껴 왔는데, 장평관으로 자리를 옮겼을 줄 누가 알았겠나? 모르고 한 일이니 이몽 아우는 우형을 너무 원망하지 말게.”
마등은 넉살 좋게 이몽의 말을 받았다. 이몽은 순간 기가 막혔으나 이내 정신을 차렸다. 셈이 빠른 그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마등에게도 뭔가 다른 생각이 있을 터였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제부터 서로 피를 흘려야 되지 않소? 단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러 온 것이오?”
“물론 그건 아니지. 아우는 셈이 빠르니까 짐작은 하고 있을 걸세.”
마등은 그렇게 말하며 말을 몰아 몇 발짝 다가왔다. 이몽은 순간 뒤돌아서 냅다 줄행랑을 칠까 잠시 고민했으나 마등에게서 어떤 살기도 느껴지지 않아서 일단 참기로 했다.
이몽에게 가까이 접근한 마등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군사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한 소리였다.
“우리가 서로 피를 흘릴 수도 있지만, 자네 하기에 따라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역시 그런 거였군. 나보고 가만히 성에 틀어박혀 있으라는 거요?”
“그래. 내 조용히 산만 넘어가겠네.”
마등은 그렇게 말하고 껄껄 웃었다. 이몽이 셈한 대로였다.
‘고작 1만 5천으로 장안성을 공성할 수 있을 리 없다. 재물이 잔뜩 쌓여 있는 미오성도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선봉대를 이끄는 것이 총대장인 마등 본인이다. 그렇다면 그의 생각은 뻔하지.’
소수 정예의 기병대를 이끌고 장애물을 돌파해서 장안성 근처로 육박한다. 장안성 안에는 이각과 곽사라는 최고의 기병 지휘관들이 있다. 이들이 마등군의 적은 숫자를 보고 격파하러 나오면 평지에서 회전으로 한 번에 격멸한다.
아마도 이것이 마등의 전략일 것이다. 보통의 장수라면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책략이었다. 미오성은 그렇다 쳐도 장평관을 우회해서 장안에 접근하려면 험준한 산을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산을 넘어 우회기동을 하려면 보병대를 끌고 가야 한다. 하지만 보병대는 회전에서 이각, 곽사의 기병대를 당해낼 수 없지. 반면 기병은 회전에는 강하지만 말과 함께 산을 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마등이 이끄는 기병대는 무려 마가군 기병대가 아닌가? 어지간히 험준한 산이라도 넘을 자신이 있을 것이다.
“너무 도박적이지 않소? 그러다 대사마에게 져 버리면 어찌하오? 그야 수성 형이 장안성 옆을 휘젓고 있으면 대사마가 나오든, 표기장군 곽사가 나오든 직접 나오기는 하겠지. 그런데 형이 아무리 회전에 강하다고 해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꼭 이기라는 법은 없지 않소?”
“허허, 이 친구야. 그러면 그때는 죽는 거지. 뭘 뻔한 얘기를 하고 그래?”
마등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이몽은 마등의 잘생긴 얼굴을 관찰하며 생각했다.
‘장안성 내부에 내응자가 있나 보군.’
사대부들이 보기에 이각은 인간쓰레기다. 그러니 장안성의 신료들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비바람이 치는 날마다 이각의 집에 벼락이 떨어지기를 기도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마등이 한 번의 회전에서 이각군을 대패시키고 장안성 내부의 내응자들이 이에 호응한다면 상황은 극적으로 바뀔 수도 있었다.
이몽은 쓴웃음을 지었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너무나도 대담한, 아니 무모한 계획이었다.
“하여튼 형님은 간도 크시오. 대사마와 천하를 놓고 다툴 생각을 하다니. 뭐 좋소, 그런데 나는 그저 평범한 무부라서 그런 큰 싸움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소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찾아온 게 아닌가? 내가 기병을 이끌고 산을 넘어가는 걸 조용히 모른 척하고 있게.”
“그다음에는?”
“그저 장평관 문을 걸어 잠그고 틀어박혀 있으면 돼. 한판 싸움에서 내가 이기면 자네는 나의 공신이 되는 것이고, 이각이 이기면 그때 가서 내 뒤를 쳐서 공을 세우면 되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 그런데 가만히 있기만 하면 나도 의심을 받을 거요.”
“우리 쪽 후군이 장평관을 때리는 척할 테니까 자네도 적당히 싸우는 시늉을 하고 있게. 그래야 나도 이각, 곽사가 장평관 싸움에 정신이 팔린 사이 장안성에 짠 하고 나타날 수 있고. 알겠나?”
셈이 빠르다 보니 보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인가, 아니면 보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셈이 빨라지는 것인가?
선후 관계는 모르겠지만 셈이 빠른 이몽은 마등의 제안을 받기로 했다. 이 제안을 거절하고 마가군의 총공세를 받는 것보다는 이각에게 승부를 미루는 게 나을 것이다.
“좋소이다. 기왕 이리된 거 무운을 빌겠소.”
“역시 자네는 셈이 빨라. 내가 이각에게 패해서 자네가 내 목을 따러 와도 원망하지 않을 테니 그 점은 걱정 말라고.”
마등은 이몽을 향해 씩 웃었다. 강족과 한족의 혼혈인 그는 유독 콧날이 우뚝하고 눈매가 깊었다.
이몽은 그렇게 마등과 작별하고 장평관 안으로 돌아왔다. 셈이 빠른 그는 한 가지 셈을 더 해놓고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속절없이 보내 버리면 나중에 책임 추궁을 당할지도 모르지. 그러니 셈이 안 되는 녀석을 이용해서 면피를 해야겠다.’
아니나 다를까, 이몽의 말을 들은 장수 왕방이 길길이 날뛰었다.
“저런 건방진 놈! 감히 장평관을 지나쳐서 대사마와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것인가!”
마등과의 밀약을 아는 것은 이몽 자신뿐이다. 이몽은 왕방을 이용하기 위해 적당히 거짓을 섞어서 말했다.
“마등은 자신이 직접 소수 보병만을 이끌고 산을 넘겠다고 했소. 장안 인근에 내응자가 있으니 산만 넘어가면 군사와 말을 보충할 수 있다고 했소. 그러니 오늘 밤 산을 넘는 군사는 그 숫자가 많지 않을 것이오.”
“좋소. 그렇다면 당장 오늘 밤 산을 넘는 마등을 들이칩시다! 소수 보병이라면 우리가 얼마든지 이길 수 있소!”
이몽은 일부러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허허, 왕 장군.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전부 성을 비우면 후군이 장평관을 공격했을 때 어찌하겠소? 성의 주력은 계속 성을 수비하는 게 마땅하오. 밤에 마등의 아들 마초나 다른 장수가 공성을 시도할 수도 있지 않소?”
“아니, 이 장군은 어찌 그리 겁이 많다는 말이오! 산을 넘는 마등의 군사들은 소수 보병이라고 하지 않았소!”
왕방은 더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오늘 밤 내 부곡만으로 마등의 목을 따올 테니 이 장군은 그저 구경만 하시오. 대신 대사마께 이 일을 낱낱이 보고하겠소이다. 책임 추궁을 면할 수 없을 것이오!”
“허허, 왕 장군… 어쩔 수 없구려. 무운을 빌겠소.”
이몽은 그렇게 말하고 목을 쓰다듬었다.
‘멍청한 놈. 설령 소수 병력이라 한들 네놈이 마등을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마등은 주력을 이끌고 산을 넘을 계획이지만, 왕방은 마등이 소수 병력만으로 산을 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니 왕방은 죽을 것이고 마등은 별다른 피해 없이 장안으로 진군할 것이다. 마등과 이각이 싸워서 이각이 이긴다면 마등을 뒤에서 들이쳐서 잡으면 된다. 설령 공을 세우지 못한다고 해도 마등의 야간기동을 막기 위해 왕방이 전사할 정도로 강하게 저항했으니 면피는 될 것이다.
혹시라도 마등이 이각을 이긴다면? 그때는 상황을 봐서 마등을 돕거나, 즉시 장평관의 성문을 열어젖히면 그만이다.
왕방이 의외로 선전해서 마등을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상당한 타격을 입힌다면?
‘그때는 내가 마등을 잡는 거지.’
큰 공을 세우는 건 용감한 자지만 오래 살아남는 건 셈이 빠른 자다. 이몽은 자신의 빠른 셈에 다시 한번 자부심을 느꼈다.
한편 왕방은 그 즉시 자신의 부대를 동원해서 야습을 준비했다. 야음을 틈타 산을 넘어가는 마등의 부대를 들이칠 셈이었다.
“제아무리 마등이 귀신같이 강하다고 해도 이곳은 험준한 산이다. 게다가 마등이 이끌고 가는 부대는 분명히 소수 보병이라고 했겠다? 오늘 이 왕방이 마등을 잡고야 말리라!”
그것이 왕방의 계획이었다.
밤까지 산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단의 군사들이 샛길을 지나가는 걸 봤을 때까지는 그 계획이 잘 들어맞는 듯 보였다. 이몽의 말을 잠시 의심하기도 했지만, 산을 넘는 군사들은 이몽이 말한 것처럼 보병 위주의 부대로 보였다.
“가만, 그런데… 왜 저렇게 군사가 많아? 혹시 이몽이라는 놈이 거짓말을 했나?”
마등이 이끌고 가는 군사는 왕방의 생각보다 훨씬 많아서 삼천을 넘는 듯 보였다. 원래 마등을 바로 들이칠 생각이었던 왕방은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으음…이를 어쩐다? 그냥 보내 줄까?”
왕방이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조용히 이동하던 마등의 군사들이 정지했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왕방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산을 넘던 마가군은 그 자리에 정지해서 일제히 횃불을 밝혀 들었다. 사방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한 장수가 대열의 중앙으로 나와서 절벽 위의 왕방을 향해 말했다.
“네놈은 아마 왕방이겠군?”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잘생긴 얼굴을 한 중년 사내. 정서장군 마등이었다.
“에잇, 제길. 모두 마등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라!”
그러나 왕방의 구령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열의 한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장군, 어떤 놈들이 그새 절벽을 기어 올라와서 진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뭣이? 이 깎아지른 절벽을 어떤 놈들이 올라온다는 말이냐?”
왕방은 기가 차서 진영이 어지러워지는 뒤쪽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난생처음 보는 복식을 한 이민족들이 왕방의 군사들을 마구 도륙하고 있었다. 올돌골이 이끄는 남만병들이었다.
“이런 제길, 저놈들은 어디서 튀어나온 놈들이냐! 분명히 강족이나 선비족은 아니란 말이다!”
남만병들은 왕방이 이끄는 한인 군사들보다 산에서의 싸움에 훨씬 익숙했다. 평지에서 대열을 짜서 겨루는 것이라면 남만병이 한인 정병들을 당해낼 수 없다. 그러나 나무가 우거지고 기동이 불편한 산지에서 난전이 벌어졌을 때는 한인 정병들이 남만병을 당할 방법이 없었다.
마등을 잡아 보겠다고 기세 좋게 출진한 왕방이지만, 군사들이 남만족들에게 밀리는 것을 보니 전의를 상실했다. 특히 키가 1장에 가까운 거인은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할 수 없지, 일단 퇴각한다.”
왕방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몸을 빼냈다.
“이몽, 이 개자식. 나를 속였구나. 소수 보병만 움직인다고 했는데 숫자는 3천에 달하고, 저런 이민족 정예병까지 있었다는 말이냐?”
지금 바로 돌아가서 이몽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게 왕방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먼발치에서부터 긴 도끼를 든 장수 하나가 말을 달려서 왕방에게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장평관으로 돌아가려면 일단 저 장수부터 제압해야 했다.
“좋다, 나도 동 상국(동탁)의 휘하에서 잔뼈가 굵은 무장! 적장 하나의 수급은 가지고 돌아가리라. 네 이놈, 내가 바로 병주의 왕방이다! 네놈 이름이 무엇이냐!”
왕방은 기세 좋게 외치며 상대에게 돌진했다. 왼손에는 묵직한 방패를 든 채였다.
상대가 도끼를 든 것을 본 순간 왕방의 머릿속에 승산이 떠올랐다.
‘도끼라. 난전에서는 유용하지만 일대일의 투장에서는 약점이 많은 무기다.’
도끼로는 세밀한 초식을 쓸 수 없기에 공격하는 길이 뻔히 보인다. 묵직한 방패로 첫 일격을 막아내면 도끼날이 방패에 박혀 버릴 것이다. 이때 칼을 뽑아 상대의 허점을 노리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도끼를 들고 달려오던 상대는 왕방의 말을 듣고 대꾸했다.
“하동의 서황.”
서황은 왼손으로 말고삐를 잡은 채 대부를 오른손으로 길게 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나관중이 만들어준 이 자루 긴 도끼는 마치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손에 딱 맞았다. 왕방도 육중한 방패를 머리 위로 올려서 두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멍청한 놈, 아직 경험이 부족하구나. 두 손으로 전력으로 내리쳐도 모자랄 판에.”
왕방은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저 머리 나쁜 무장의 한 손 일격만 막아내면 승리는 자신의 것이다. 방패가 왜 방패겠는가? 방어가 가능하니까 방패인 것이다. 한 손으로 휘두르는 도끼날 정도로는 무거운 방패를 뚫을 수 없다.
서황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부를 내리쳤다. 한 손으로 휘두른 대부가 왕방이 치켜들고 있는 육중한 방패를 때렸다.
콰직!
도끼날은 일격으로 방패를 쪼개고 왕방의 투구와 두개골을 가르고 척추를 따라 내려가 말의 등뼈에 닿았다.
서황은 말을 달려 왕방을 지나쳐 갔다. 잠시 후 두 쪽으로 갈라진 왕방의 몸이 땅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