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맹획을 얻다
“그렇다면, 죽이지, 않겠다.”
거인 우르토쿠아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그 자리에 멈췄다.
“아주 그냥 죽였다가 살렸다가 지들 마음대로구만.”
지휘관인 자신을 두고 죽였다 살렸다 떠들고 있으니 기가 찰 일이다. 마초는 혀를 차며 맹획이라는 소년을 바라봤다.
화려한 남만족의 복장을 한 소년 맹획은 윤기 나는 검은 장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제법 단정해서 한족의 귀공자처럼 보였다. 남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굳게 다문 입술이 꼭 새침한 여자아이 같았다.
마초는 나관중을 돌아보며 물었다.
“관중, 저 꼬맹이 이름이 맹획이라는데? 네가 말했던 남중의 지도자 이름이 맹획 맞지?”
“맞습니다, 비장군. 그런데 맹획은 기록에 따르면 아마 한족일 텐데요? 나중에 촉한에서 관직을 해서 어사중승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나관중도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국지연의에서 맹획을 이민족의 왕으로 표현한 것은 나관중 본인이지만, 그 또한 사료 연구를 통해서 맹획을 이민족으로 볼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맹획이라는 소년은 누가 봐도 남만족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마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맹획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내 부하가 됐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설명해 보실까? 너는 대체 누구길래 남만족 병사들이 지도자로 여기고 있는 것이냐? 말씨나 생김새는 한족 같은데.”
“흥, 그렇게 원한다면 설명해 주지.”
맹획이 대답하는 태도를 보자 마초는 기가 막혔다.
“말끝마다 흥, 흥, 하는 건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너도 15세 병이냐?”
“흥, 마음대로 떠들어라.”
맹획은 여전히 불손한 태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익주목 유언은 익주 땅에 사는 이민족들을 마등의 원군으로 보냈다. 남만의 이민족들은 싸움에 능하고 용감하기 때문에 마등과 마초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맹획의 말에 의하면 이민족들이 파병된 것에는 복잡한 속사정이 있었다.
익주 남부의 건녕군, 월수군, 영창군 등은 한족들과 이민족들이 얽혀 사는 곳이었다. 이곳은 익주의 중심지와는 풍습과 환경이 많이 달라서 따로 남중이라고 불렸다. 현대의 운남성에 해당하는 곳이다.
“우리는 그 남중 7군 중 건녕군에서 왔다. 나의 외조부는 건녕의 대호족으로, 본래 한족이었지만 만족들의 존경을 받던 분이시지.”
맹획의 외조부는 한족의 발전된 농사법과 베 짜는 법을 건녕에 적극적으로 보급했다. 만족 백성들은 그런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나, 원래부터 건녕에 터를 잡고 있었던 만족 귀족들은 그런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만족 백성들이 한족의 기술을 얻으면서 기존에 농사와 길쌈을 관장하던 제사장, 장인 같은 만족 귀족들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건녕의 만족 귀족들이 반기를 들었다. 치열했던 싸움에서 맹획의 외조부가 승리하게 된다. 이미 만족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외조부가 용감하게 싸운 만족 백성들의 전쟁영웅을 데릴사위로 맞았는데, 그 영웅이 바로 맹획 너의 부친이라는 거군?”
“그래. 나는 한족이면서 또한 만족이기도 하다.”
“흠, 여기도 한족이면서 강족인 사람들이 몇 명 있지.”
마초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과 마휴, 마대를 돌아보았다. 셋 다 할머니가 강족인 혼혈인들이었다.
맹획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건녕은 외조부의 통치 아래 순조롭게 발전했다. 하지만 익주목 유언이 부임한 후, 평화가 깨졌지.”
유언은 원래 조정의 고관이었다. 그러나 난세가 도래하자 풍요로운 익주 땅에 자리 잡고 군웅이 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익주목으로 부임한 자였다. 유언은 부임 후, 빠르게 익주를 안정시키기 위해 만족 귀족들의 힘을 적극적으로 빌렸다. 그 과정에서 맹획의 외조부와 아버지에게 밀려서 실각한 만족 귀족들이 유언을 등에 업고 다시 건녕에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건녕에서는 다시 내전이 일어났고 익주목 유언은 이 내전을 방관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만족 귀족들을 지원했다. 만족 백성과 한족의 연합세력인 맹획 일가는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익주목의 지원을 받는 귀족들 세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했다.
“그렇군. 그러면 지금 원군으로 온 것은 너희 부친을 따르는 무리들인가?”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니 이제 내가 남만족의 수장이다. 우리는 내전을 치르면서 관원을 많이 죽였다. 익주목 유언은 우리가 장안에서 열심히 싸우면 죄를 씻고 땅을 돌려준다며 우리를 파병한 것이다.”
익주에서 파병한 원군은 맹획과 같은 만족들뿐만 아니라 파족이나 저족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상황은 비슷했다.
이민족 견제 정책에서 밀려난 부족들에게 싸움을 통해 공을 세우면 살 곳을 주겠다며 유혹한 것이다.
“골치 아픈 상황이군. 하여튼 유 익주도 혼자 도덕군자인 척은 다 하지만 상당히 음흉한 사람이란 말이야.”
“흥, 어차피 너희들도 그 유언에게 군사를 빌리려 한 것이 아니냐?”
“하여튼 말끝마다 흥, 흥… 그보다 나도 하나 물어보자. 이번에 익주 건녕군 독우로 내 친구 이회가 부임하게 됐다. 그 친구를 천거한 건 찬습이라는 한인 호족이다. 찬습도 그 남만 귀족들의 편이냐?”
“찬습 대인은 균형감각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유언이 남만 귀족들의 손을 들어 줬으니 곤경에 처해 있을 것이다. 찬 대인이 천거한 독우도 마찬가지로 입장이 난처하겠지.”
“흠, 그렇단 말이지. 덕앙(이회의 자)도 꽤 고생하게 되겠군. 머리숱이 일찍 줄어든 이유를 알겠구만.”
마초는 그렇게 혀를 차고는 나관중을 돌아보았다.
“관중, 들었지? 아무래도 이 꼬맹이가 네가 말한 그 맹획이 맞는 것 같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선대부터 다져 온 명성이 있었으니 건녕의 대호족이 될 수 있었겠지요. 아마 그런 경험들로 인해 촉한 정권을 신뢰하지 못해서 제갈 승상에게 일곱 번이나 대항했던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래.”
마초는 생각을 정리했다. 어린 맹획이 어떻게 남만족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지는 파악이 끝났다. 지난 생에서의 경험에 따르면 남만족 부대는 전투 실력이 확실하다. 이번에 배속된 맹획의 부대는 우르토쿠아 같은 장사가 있으니 그때보다 더 강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들을 확실하게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좋아, 건방진 꼬맹이. 네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흥,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너는 장안성 전투에서 군공을 세워서 유 익주에게 땅을 다시 받아내겠다고 했지?”
“흥, 그렇다. 그건 유언도 약속한 것이다.”
“그 약속이 지켜질 것 같냐?”
“흥, 그게 무슨 소리냐?”
“뻔한 얘기지. 진짜 공을 세울 기회라고 여겼다면 왜 사이가 틀어진 너희들을 보냈겠나? 본인이 직접 이끄는 익주의 정병들을 내버려 두고 말이야.”
“그건…….”
“유 익주에게 너희들은 처치 곤란한 세력이라는 말이다. 네가 익주목이라고 생각해봐라. 건녕의 남만군이 용감하게 싸워서 전멸하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동맹 세력인 마가군에게도 면을 세우고, 익주에서는 이민족들 간의 갈등이 해결되고.”
마초가 지적하자 맹획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 또한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흥, 그러면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가? 그저 최선을 다해 싸우고 여의치 않으면 전원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나를 따라라.”
“뭐?”
“이 마초를 따르라고 했다. 앞으로 너희들은 내 명령을 목숨같이 여기고 복종하라. 내가 이끄는 부대는 천하제일의 기병대지만 때로는 말이 달릴 수 없는 전장에서 활약할 용맹한 보병이 필요하다. 앞으로 내가 지휘하는 전투마다 참전해서 내가 시키는 임무를 맡아라. 그리고 죽을 각오로 수행해라.”
“흥, 그러면 너는 우리에게 무엇을 줄 거지?”
“삶.”
“삶…이라고?”
“그래. 돌아가는 상황이 너희를 화살받이로 쓰라고 말하고 있지만, 나를 따른다면 나는 너희를 좀 다르게 쓰겠다. 전쟁터에서 아무도 죽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희생을 딛고 군공을 세울 수 있도록 쓰겠다.”
“어떤 방법으로 쓰겠다는 거냐?”
마초는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이 닿는 곳에는 둔영의 성벽이 솟아 있었다.
“공성부대. 성벽을 타고 올라서 성문을 여는 것이 너희들의 주 임무다.”
“…그게 화살받이하고 뭐가 다르지? 우리를 속이는 거 아니냐?”
“이게 속고만 살았나? 너희들 다들 나무는 잘 타지? 한인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임무지만 너희라면 잘 수행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전쟁터에서는 화살받이 보병이 가장 위험하다고. 너희도 짐작하고 있지 않느냐?”
맹획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마초는 내쳐 말했다.
“그리고 위험한 임무에 성공하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주마.”
“땅이라고?”
“그래. 싸움이 끝나고 남중으로 돌아간다고 치자. 유 익주가 너희들을 위해서 자기가 지원했던 남만 귀족들을 다시 몰아낼 수 있겠나?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쯤은 너희도 알고 있을 테지.”
지난 생에서 유언은 이 싸움에서 아들 유범과 유탄을 잃고 충격에 시름하다 죽었다. 아마 맹획은 그런 혼란을 틈타 다시 건녕에 정착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가 유범과 유탄을 구해 낼 것이기 때문이지.’
맹획이 마초에게 물었다.
“우리가 정착할 만한 땅이 있느냐?”
“나중에 건녕에 다시 정착할 수 있도록 내가 힘을 써 주마.”
“말은 쉽지만, 유언이 살아 있는 한 우리가 건녕으로 돌아가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유 익주가 천년만년 살겠느냐? 그 또한 고령이니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다. 만약 여의치 않으면 익주 안에서 다른 곳을 알아봐 주마.”
“다른 곳이라니?”
“들어는 봤나? 한중이라고.”
마초가 맹획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한중은 익주와 관중의 경계에 있는 분지다. 진령산맥을 넘어가야 해서 왕래는 어렵지만 마가군의 세력권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다. 산악 민족인 남만족 입장에서도 관중 평야보다는 훨씬 적응하기 쉬울 것이다. 마초는 남만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면 이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힘을 써 볼 참이었다.
‘한중은 우리가 이각을 물리치면 다음 목표로 노려야 할 곳이니까. 마침 지난 생의 원수, 장로가 다스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
마초와는 여러 가지로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는 곳이었다.
맹획은 마초의 제안을 듣자 고민이 심한 눈치였다. 그러나 결국 거절할 수 없었다.
“흥, 알았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마, 마초.”
“알았으면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의 수장이다. 앞으로 내가 내리는 군령에는 토를 달지 않고 따른다.”
“흥, 그래.”
맹획은 그렇게 말하고 마초를 향해 군례를 올렸다. 말투는 여전히 무례하지만 나름대로 예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맹획이 그렇게 하자 남만족들도 일제히 마초를 둘러싸고 군례를 올렸다.
“좋아. 그러면 이제부터 첫 번째 군령.”
마초는 맹획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영문을 모르는 맹획은 마초를 올려다보았다. 윤기 나는 검은 장발이 찰랑거렸다.
“맹획, 너는 이번 싸움에서 내 당번병이 된다. 계급은 병졸.”
“흥? 그게 무슨 소리냐?”
“내 옆을 따라다니며 대규모 전투에 대해 좀 배우라고. 그리고 내 휘하에 너하고 똑같은 15세 병 환자가 하나 있으니까 둘이 서로 보듬어 주면서 치료도 좀 하고.”
“형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런 망나니하고 저하고 같은 당번병이라니요?”
옆에서 듣고 있던 마대가 꽥 소리를 질렀지만, 마초는 개의치 않았다.
“너희 둘이 수준이 똑같으니 잘 됐어. 서로를 보면서 반성하라고.”
“흥, 내가 당번병이 되면 남만족들의 지휘는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마초는 9척 5촌의 거인 우르토쿠아를 가리켰다.
“저기 훌륭한 전사가 있잖아? 저 친구를 통해서 명을 전달하겠다. 전투 지휘는 어차피 네가 아니라 저 친구가 할 것이니, 너는 당분간 내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어깨 너머로 전략 전술이나 배워라.”
“허드렛일을 하라고?”
“그래. 내가 상산 전투의 영웅인 건 너도 알고 있겠지? 내 밑에서 지휘부의 일을 밑바닥부터 배워 두면 나중에 피와 살이 될 거다.”
“흐, 흥…….”
맹획 또한 어린 나이에 무리를 이끌게 되어 배움의 기회에 목말라 있었다. 마음 한켠으로는 모욕감이 들었지만, 이런 기회를 거부하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 관중. 그러면 저기 우르토쿠아라는 장사에게 한족 이름을 지어 줘. 군적에 올려야겠다.”
“하하하하, 그거라면 제가 또 생각해 둔 이름이 있지요!”
나관중은 뜬금없이 깔깔 웃으며 나섰다.
“그게 뭔데?”
“이름하여…….”
나관중은 어느새 서판을 꺼내서 슥슥 그어 내려갔다. 획수가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
“올돌골(兀突骨). 남만의 거인 전사에게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좋아, 이제부터 남만병은 올돌골이 이끈다. 내 당번병인 맹획을 통해 연락하겠다.”
마초는 그렇게 부대의 편제를 정리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관중이 물었다.
“비장군, 그런데 저 꼬마가 너무 무례한데 당번병으로 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무례해서 당번병으로 쓰려는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초는 나관중을 돌아보며 설명했다.
“저 녀석이 계속 남만병 부대에 있으면서 나에게 불손하게 굴면 군령이 서지 않아. 그렇다고 남만병들의 우두머리 같은 놈을 내가 섣불리 참수해 버릴 수도 없고. 그러니 어쩌겠나? 지휘 수업을 시킨다는 핑계로 내 근처에 두고 남만병들과 떼어 놓는 수밖에.”
“아, 역시… 비장군께서 다 뜻이 있으셨군요?”
나관중이 감탄하자 마초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잘하면 마대의 15세 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우리 대가 15세 병만 치료하면 참 쓸만한 놈인데…….”
사촌 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대는 계속 맹획과 옥신각신하며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