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마초가 한수에게 청하다
마초 일행이 무기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 비장군의 치소 안으로 한 사내가 들어왔다. 텁수룩한 수염에 움푹 꺼진 눈을 한 여윈 사내, 마초 직속의 전령부대장 이감이었다.
마초는 이감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감. 서평의 동향은 확인했나?”
“예, 비장군. 지금 보고드려도 되겠습니까?”
“개의치 말고 얘기하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신뢰해도 좋다.”
군막 안에는 마초와 마휴, 방덕, 서황, 그리고 나관중이 있었다. 이감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서평의 한문약(문약은 한수의 자)이 움직였습니다.”
“내 예상보다 빠르군. 좋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틀림없이 농현의 마가 저택으로 직접 올 것이다. 아버지께는 말씀을 드려놓았으니 내가 가서 막겠다.”
“알겠습니다. 출진을 준비하겠습니다.”
마초는 시원스럽게 결정하고 이감을 돌려보냈다. 나관중은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마휴와 서황, 방덕은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맹기, 한문약이라면 서평의 군웅 한수 장군 말인가? 한수 장군이 왜 농현으로 온다는 것인가?”
방덕이 묻자 마초가 설명했다.
“우리는 양봉군의 군량고를 얻어서 이 흉년을 견디고 있지만, 서평의 한수는 기근이 심각할 것이다. 서평에서 양식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근거지 농현이 비교적 형편이 좋으니 틀림없이 노략질하러 올 것이다.”
설명을 듣자 방덕도 이해가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마초는 30년 후의 세상에서 회귀했다. 지난 생에서의 기억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마등과 아내 양하원, 오랜 친구 방덕, 그리고 같은 회귀자인 나관중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마다 일일이 다 회귀했다고 말하고 납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래서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적당히 신통한 꿈을 꿔서 미래의 일을 대강 알게 됐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있었다. 그러니 서황과 마휴는 마초가 과거의 기억으로 한수의 습격을 예측했다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하고 그저 통찰력을 발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장군은 그걸 미리 예측하고 한수의 동향을 정찰하게 하신 거였군요. 과연 심계가 깊으십니다.”
“형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농현을 노략질한다면 틀림없이 우리 집을 지나게 될 텐데요.”
한수의 군대가 서평에서 농현까지 진군하게 되면 그 사이에 마등의 저택이 있다. 마휴가 걱정하는 것은 마등의 일가족이 한수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래, 아마도 한수는 마가 저택에 직접 나타날 것이다. 한수가 어머님과 누이들에게 해코지할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겠지만…….”
마초는 지난 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난 생에서 한수는 마등의 본가에 직접 나타났다. 마등과 의형제까지 맺은 자로서, 상황이 부득이하여 약탈을 하게 됐지만, 그 가족들에게는 예의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서 누이동생 마수가 죽음을 맞게 된다.
‘그래, 그건 사고였지. 하지만 한수가 약탈을 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기도 하다.’
마초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난 생에서는 불운한 사고로 누이동생 마수를 잃었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다를 것이다.
마휴가 마초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 지금 본가에는 대가 와 있습니다. 대에게는 미리 알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대가?”
사촌 아우 마대의 이름을 듣자 마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 그 녀석 사고 칠 것 같은데… 알았다, 미리 알려 둬라. 대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
“그렇게 말은 해 두겠습니다. 그 녀석이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마휴는 그렇게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마초는 마등의 본가에서 한수가 오는 것을 기다리기로 하고 일행을 돌려보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나관중이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초에게 물었다.
“비장군, 그러면 이번에는 마대 장군을 볼 수 있는 건가요?”
“마대가 장군은 무슨 장군? 아직 꼬맹이인데.”
“나중에 촉한에서 장군이 됩니다. 제갈 승상이 죽은 후, 위연의 반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지요.”
“그래, 그 얘기는 들었어.”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마대는 마초의 사촌 동생으로 마초의 일족 중 유일하게 마초와 끝까지 함께한 사람이다. 이후 촉한에서 위연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의 공적을 세운 것을 보면 아마도 유능한 무장이었을 텐데, 이후에 어떤 활약을 했는지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마대 장군, 아니 마대 공자도 능력 있는 무장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활약이 별로 없더군요.”
“음, 아마 그랬겠지. 활약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
“어째서요?”
“마대는 그만하면 무예도 뛰어나고 병사들에게 신임도 두터워. 머리는… 굳이 말하자면 나쁜 편이지만, 병서를 달달 외우고 있어서 용병술은 나쁘지 않았고.”
“그런데 어째서 중용되지 못한 게 당연하다는 겁니까?”
마초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녀석은 정상이 아니야.”
나관중이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네? 정상이 아니라구요?”
“그래. 보면 알게 될 거야. 정상이 아니라서 큰일을 맡기기는 좀 그래.”
* * *
한수가 자리 잡고 있는 서평은 천수군 농현보다 더 서쪽 변방에 있는 척박한 고을이었다. 흉년이 들자 도무지 먹을 것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군웅이라면 누구나 약탈을 떠올릴 것이다. 서평을 다스리는 군웅 한수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을 굶기지 않으려면 주변의 고을에서 약탈을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디서 약탈을 한다는 말인가? 서량과 관중 전역에 흉년이 들어 양식이 부족하지 않은가.’
약탈을 하려고 해도 약탈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오직 한 곳, 마등이 주둔하고 있는 마가군의 둔영만이 식량난 없이 겨울을 나고 있었다. 마등의 아들 마초가 한중에서 곡식을 빌려 오고, 양봉군의 군량고를 털어서 식량을 조달했기 때문이었다.
“수성 형에게는 미안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군.”
한수는 결국 마등의 근거지 농현을 약탈하기로 결단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마등과의 관계가 악화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의 겨울을 나려면 식량이 있어야만 했다. 마등에게는 나중에 곡식 대금을 갚고 정식으로 사죄할 요량이었다.
서평에서 농현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마등의 저택이 있다. 이 저택에는 한수가 직접 가서 마등의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할 생각이었다.
한수는 부하들을 시켜서 마등의 저택을 포위하게 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에는 마등의 후처 한 씨가 두 딸과 함께 나와 있었다.
한 씨가 날이 선 목소리로 한수를 꾸짖었다.
“서량의 영웅이라면 정서장군(마등)과 진서장군(한수)을 가장 먼저 꼽습니다. 그런 분이 어려움을 당했다고 곡식을 약탈하고 의형의 가족들을 겁박하는 것이 법도에 맞는 일입니까?”
마등과 한수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이기도 했다. 한 씨가 한수를 꾸짖자 한수는 수북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형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오늘의 일은 한모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수성 형님에게 따로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그걸 아는 분이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십니까?”
“군사들을 먹여야 하니 이 한모도 어쩔 수 없습니다. 조용히 양식을 구해서 돌아가겠으니 형수님은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한 씨의 옆에는 열 살도 채 안 돼 보이는 딸아이 둘이 서 있었다. 둘 중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마초의 누이동생 마수였다.
“흥, 수염 난 아저씨는 내가 용서하지 않겠어!”
상대적으로 얌전해 보이는 다른 여자아이도 한마디 거들었다. 또 다른 누이동생 마화였다.
“아저씨는 공부를 하지 않았나 보군요. 의롭지 못하면서 강하다면 반드시 거꾸러질 것입니다.”
용감한 마수와 좌전을 인용하는 마화를 보며 한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용감하고 영리한 게 둘이서 수성 형을 반씩 닮았구나. 벌써 좌전을 소공편까지 읽었다니 참으로 영특하구나.”
“응? 아저씨가 좌전을 어떻게 알죠? 그럼 공부를 했는데도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시는 건가요?”
공부와 인성은 별 상관이 없지만 그걸 알기에는 마화가 너무 어렸다. 한수는 껄껄 웃으며 마화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눈높이를 맞추고 영특하다고 칭찬해 주려는 참이었다.
끼이익!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한 사람의 신형이 튀어나와서 한수와 마화 사이로 뛰어들었다. 까치집처럼 여기저기 뻗친 머리를 한 10대 중반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바닥을 미끄러지며 한수와 마화 사이를 막아섰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서 한수에게 등을 돌린 채 고개만 뒤로 돌려 한수를 쳐다보았다.
한수는 갑자기 튀어나온 까치머리 소년을 보고 물었다.
“공자는 뉘신가?”
“내 이름은 마대. 내가 있는 한 누이들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다.”
까치머리를 하고 쓸데없이 비장하게 대답하는 소년을 보자 한수는 기가 막혔다. 누군지 생각해보니 마등의 조카인 것 같았다. 마등의 아들 셋은 전부 한수가 아는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아, 수성 형님의 조카인가?”
“그렇다. 그리고 이 아이들의 사촌 오라비가 된다.”
“허허, 용감하구만. 오라비답군.”
한수가 당혹한 사이, 마대는 몸을 홱 돌려서 한수를 바라보고 자세를 취했다. 몸을 굽혀서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것 같은 자세였다.
“오라비라는 게 왜 먼저 태어나는지 알아?”
“하지 마, 멍청아!”
“오라버니!”
마수와 마화가 비명을 지르며 마대를 말리려고 했지만, 마대는 요지부동이었다.
“나중에 태어날… 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하지 말라니까!”
“아악, 내 손발…….”
뜬금없이 마대가 허세에 차서 일갈하자 마수, 마화, 한씨, 한수까지 전부 손발이 수축되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참, 씩씩하기는 한데…….”
한수가 혀를 차고 있는 동안 한수의 부장 후선이 한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과 뺨에 큼직한 칼자국이 있는 근육질의 사내였다.
“주공, 이제 농현으로 군사들을 지휘하러 가셔야 합니다. 부인과 꼬마들은 제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알았다. 다만 이들은 정서장군의 가솔들이니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물론입죠. 저만 믿고 다녀오십시오.”
“잠깐, 한수! 이 마대의 앞에서 도망치지 마라!”
한수, 후선, 마대가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한수 일행의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 혼란하다 혼란해.”
그렇게 말하며 누군가가 마등의 저택으로 들어오자 한수의 군사들이 주춤거리면서 길을 열었다. 마초였다. 양옆에는 방덕과 서황이 마초를 따르고 있었다.
마초가 한수를 보며 씩 웃었다.
“한 숙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마초는 지난 생에서 한수와 함께 거병해서 조조에게 맞서 싸웠다. 그러다가 전쟁 중 가후의 계략에 걸려 사이가 틀어졌었다. 여러모로 복잡한 인연이었다.
“맹기, 네가 어찌 알고 이곳까지 왔느냐?”
“숙부의 생각은 다 읽고 있지요. 먹을 게 없으니 농현의 군량을 털러 오셨지요?”
“…미안하구나. 나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참으로 딱하십니다. 그렇다고 진서장군이나 되는 숙부가 약탈을 하다니요?”
마초는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마수 쪽을 흘끔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마수가 갑자기 칼을 뽑아 들고 한수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바보 맹기, 비켜! 용서하지 않겠다, 이 나쁜 아저씨!”
“어이쿠.”
마초는 가볍게 마수의 칼을 쳐서 떨어뜨리고 마수를 번쩍 안아서 어깨에 들쳐 메었다.
지난 생에서 마수는 한수에게 칼부림을 하려다가 호위병의 칼에 찔려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호위병의 입장에서는 주군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수는 즉시 그 호위병을 잡아서 마등에게 가서 사죄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후로도 때에 따라 협력과 반목을 되풀이했으나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는 이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파탄나게 된다. 마수의 죽음 이후, 마화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자청해서 이른 나이에 먼 곳으로 시집가고 연락이 끊어진다.
그러나 방금 마초가 이 사건을 막아낸 것이다.
‘좋아, 이제 수가 죽을 일도, 화가 상처받을 일도 없겠지. 이렇게 또 가족을 지켜냈군.’
마초는 스스로가 이뤄낸 업적에 잠시 취해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어깨 위에서 버둥거리는 마수를 다독이면서 한수에게 말했다.
“숙부, 군량이 필요하다면 정서장군부에서 융통해 드리지요. 대신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그게 무엇이냐?”
“첫째, 오늘 이렇게 무례를 범한 것에 대해 정서장군께 사과드릴 것. 둘째, 내년 봄에 정서장군과 함께 출병하여 이각을 치는 것.”
“첫 번째는 당연히 내가 하려던 것이고, 두 번째도 수성 형님과 이야기를 나누려던 것이다. 세 번째는 무엇이냐?”
“세 번째는…….”
마초의 얼굴에 악당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군웅의 지위를 포기하고 정서장군부에 귀부하십시오. 정서장군의 신하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