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42화 (42/306)

42화. 패륜아의 혼례

후한 초평 4년(193년).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관중 평야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관중의 가을 풍경은 언뜻 아름다워 보였지만, 여름에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아 보리 농사도 밀 농사도 완전히 파한 상태였다. 그러니 다가오는 겨울은 백성들에게 참혹한 굶주림의 계절이 될 것이다.

대체로 권력자들은 이런 사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했던 게 동탁이었다. 그는 폭정 끝에 부하인 여포의 배신으로 죽었지만, 그가 남긴 미오성은 여전히 장안 근처에 우뚝 솟아 있었다. 동탁이 백성의 고혈을 빨아서 지은 단단한 요새이자 호화로운 별궁이었다.

태생부터 그러하니 지금 미오성 근처에 서 있는 권력자들이 백성의 사정에 관심이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 중 무녀들처럼 진한 화장을 한 중년 남자가 지금 한나라의 최고 권력자, 대사마 이각이었다.

“호호호, 봉선이가 왔구나! 기다렸지 뭐니!”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이각은 점성술에 심취해서 항상 무녀들을 가까이했다고 한다. 진한 화장은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일까? 이각은 눈꼬리를 길게 뽑은 고양이 눈매를 하고 하늘이 떠나가라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극도의 혐오감을 느꼈지만 아무도 그런 감정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더러운 꼬락서니는 여전하군.”

“아앙, 봉선이는 입이 참 거칠어! 얼굴은 잘생겼으니까 조금만 달콤하게 말해주면 좋을 텐데.”

이각에게 거침없이 욕지거리를 하는 사내의 이름은 여포, 자는 봉선.

팔 척이 넘는 키에 화려한 갑옷을 걸친 30대의 남자였다. 머리에 쓴 작은 관에는 산새의 깃털 두 개를 길게 꽂아서 한껏 멋을 부리고 있었다.

“대사마라는 자가 이런 폐물이니 이 나라도 곧 망하겠군.”

여포가 씹어 뱉듯이 말하자 이각은 검지 손가락을 세워 들고는 까딱까딱 흔들어 보였다.

“아니아니, 원인과 결과를 똑바로 해야지. 망할 때가 돼서 나 같은 대사마가 등장한 거란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머물 곳은 이 미오성인가?”

“그래, 저 미오성. 그리고 저 안에 있는 모든 재물과 사람들이 우리 봉선이 거야. 호호호호!”

여포는 고개를 들어 미오성을 올려다보았다. 10장은 넘어 보이는 거대한 성벽 위로 몇 층인지 셀 수도 없는 누각이 솟아 있었다.

저 안에는 동탁이 긁어모은 갖은 금은보화와 재물, 대군이 십 년을 버틸 수 있는 양식, 그리고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 유폐된 자들이 있을 터였다.

‘좀 아깝긴 하지만… 봉선이와는 사이가 단단히 틀어졌으니 이 정도의 미끼를 제시해야 다시 불러올 수 있었겠지.’

이각은 생글생글 웃으며 여포를 바라봤다. 재물은 아깝지만, 이 사내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알았으니까 이제 꺼져라. 네놈 면상을 빨리 잊어버려야겠다.”

여포가 막말을 던지고 등을 돌려 미오성 안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상해서 볼을 부풀리고 뾰루통하게 서 있던 이각은 멀어지는 여포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봉선아! 거래 조건은 잊으면 안 돼! 죽여야 할 놈은 마등과 마초야!”

여포는 등 뒤의 이각에게 보이도록 한 손을 들어 보이고 미오성으로 들어갔다.

누각의 꼭대기 층은 건장한 청년이라도 몇 번은 쉬어가야 할 만한 높이였다. 그러나 여포는 갑옷을 입은 채 개의치 않고 계단을 올랐다. 호흡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미오성의 꼭대기에는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유폐되어 있다. 여포는 그들이 유폐된 방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방을 찾았다. 방은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여포는 무심하게 손을 뻗어 철문과 돌벽을 잇는 경첩을 손으로 쥐었다.

철컥.

쇠로 된 경첩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뽑혔다. 여포는 손으로 뜯어낸 경첩을 옆으로 던지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야아아!”

방 안에 들어서자 째지는 듯한 기합 소리와 함께 한 처녀가 달려왔다. 머리 위로 장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젊은 처녀는 여포의 얼굴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퍽!

여포는 간단히 왼팔을 들어 내려쳐지는 장검을 막았다. 장검의 날이 여포의 팔뚝에 박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왼 팔뚝에 장검을 꽂은 채 오른손으로는 처녀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얼굴을 감상했다.

절세미인이었다.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면서 여포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그렇게 찡그린 표정으로도 미모를 숨기지 못했다.

“할아비를 전혀 닮지 않았군.”

“이 짐승 같은 놈! 놓지 못하겠느냐?”

처녀는 여포의 팔뚝에 박힌 칼을 뽑으려 했지만, 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근육에 꽉 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시끄러우니 조용히 해라, 동백.”

여포는 손을 들어 동백이라고 불린 여인의 뺨을 몇 번 후려쳤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리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여포가 동백의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들어 올리자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동백의 치아 몇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빨은 나중에 다 없애 주마. 나에게 봉사하기 편하도록.”

여포는 그리고는 동백의 옷을 찢었다. 동백은 칼이 없자 주먹과 발길질로 저항해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너를 탐해서 네 할아비와 사이가 틀어졌었지.”

“더러운 종놈. 할아버님의 시비를 탐한 것도 모자라서 주인의 손녀인 나를 능멸하려고 해!”

동백은 여포를 바라보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이빨이 빠져서 발음이 샜다.

“주인?”

여포가 주인이라는 말에 피식 웃었다.

“네년도 변방 사람, 동탁의 피를 받았으면서 꼭 중원 사람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주인이니, 신하니 하는 것들은 한가한 중원 놈들이나 하는 소리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 할아버님이 너를 아들로 삼았는데 아들 된 자로서 아비를 시해하고 이제 나까지 욕을 보이다니, 네놈은 천륜을 어긴 패륜아다!”

“천륜이라. 그것은 누가 정한 것인가?”

패륜아라고 욕을 먹고 있지만, 여포는 기분 나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동백의 옷을 찢어 내렸다.

“강하면 산다. 약하면 죽는다. 수컷은 다른 수컷을 죽이고 모든 암컷을 범한다. 이것이 하늘이 정한 법도다. 삼강이니, 오륜이니 하는 것이야말로 중원 놈들이 하늘의 법도를 어기고 제멋대로 만들어낸 말에 불과하지.”

여포는 자신도 옷을 벗어 던지고 저항하는 동백의 몸을 내리눌렀다. 팔뚝에는 여전히 칼날이 박혀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자신의 욕망에 집중했다.

동백의 울부짖는 소리가 흐느낌으로 변하고, 한 식경의 시간이 흐른 후.

지옥 같은 정사가 끝나자 여포는 그제야 팔뚝에 박힌 칼날을 뽑아냈다. 피가 몇 방울 흘렀지만, 여포가 한 번 팔뚝에 힘을 주자 멈췄다.

“마음에 드는군. 이제 내 여자로 삼아 주마.”

“더러운 패륜아 놈… 천륜을 어긴 놈…….”

동백이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말 없이 옷자락을 여미고 방을 나서던 여포가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고개만 돌려 동백을 향해 내뱉었다.

“내 앞에서 천륜 따위를 입에 담지 마라. 하늘이 정한 혼례는 원래 이런 것이다.”

* * *

“에, 혼례라는 것은 그러니까. 위로는 이제 종묘를 모시고, 아래로는 후대를 잇는 것이고, 고로 군자는 혼례를 중시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남녀의 구별이 있어야 부부간에도 의가 살아나는 법이니, 신랑과 신부는 이를 명심하여…….”

서량 천수군 농현, 양진의 집.

후원에서 장광설을 늘어놓는 초로의 선비는 정서장군부의 사무를 보는 종사 고경이었다. 그의 학문 수준은 <예기(禮記)>에 나온 혼례 관련 내용도 헷갈릴 정도로 미미했지만 어쨌든 서량 기준으로는 고학력자에 속하니 마초와 양하원의 혼례식을 주재하고 있었다.

중원의 사대부나 유력 호족들은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데려와서 혼례식을 치른다. 그러나 마등은 백성들처럼 신부 아버지 양진의 집에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혼례식을 치르기로 했다.

혼례와 관련하여 마초와 마등은 이런 문답을 나눴었다.

“예법대로 안 해도 괜찮으시겠어요? 아버님도 무려 정서장군인데 남들 눈이 있지 않습니까?”

“예법은 무슨 놈의 예법. 너 밤마다 아비 말 훔쳐 타고 하원이하고 농현에서 말발굽 소리 울리면서 다녔지?”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그저 한두 번…….”

“한두 번 같은 소리. 마적이 나타나서 불안해서 못 살겠다고 정서장군부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몇 명인 줄은 아느냐? 농현 사람들이 너희 둘 때문에 잠을 못 잤는데 마땅히 거기서 잔치를 해서 대접해야 도리에 맞지. 내 집은 외딴곳에 있으니까 동네 사람들 오기 불편해서 안 돼.”

“어… 음…….”

범행이 발각될 줄 몰랐던 마초는 적잖이 당황했다. 마등은 우물거리는 마초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괜찮겠냐?”

“네? 뭘 말입니까?”

“30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왔다며. 두 번째 생에서도 하원이와 같이 살아도 괜찮겠냐는 말이다. 원래 그러기 싫어서 정략혼을 하겠다고 했던 게 아니냐는 말이다.”

“하원을 찾기 위해 천 리 길을 가면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됐습니다.”

“어떻게?”

“아무래도 그녀를 너무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지난 생에서 그녀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아서 이번 생에서는 제가 되돌려주고 싶습니다.”

“뭐 다 좋은데 혼인을 두 번이나 하다니 참 신기하긴 하구나.”

“아버지도 두 번이나 했잖아요? 어머니하고, 새어머니하고.”

“너랑 같냐? 나는 사별해서 그런 거고, 너는 다시 태어났는데 조강지처하고 혼인을 또 하다니, 하여튼 쯧쯧…….”

“언제는 그냥 혼인하라면서요? 제 성질머리를 받아줄 여자가 하원이밖에 없을 거라고.”

“그때는 나도 반신반의했지. 네가 진짜 시간을 거슬러 와서 같은 여자랑 다시 혼인할 줄 알았겠냐?”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의 혼례식은 양진의 집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혼례식에는 나무꾼 출신인 마등의 취향이 다수 반영되어 고상한 예법 대신 거나하게 동네잔치를 열게 되었다.

“아단부에서 양을 많이 보내 줘서 고기는 넉넉하지만, 흉년이라 술은 모자라오. 술은 적당히 드시오.”

마등과 양진이 자리마다 돌아다니며 지나친 음주를 자제시키려 하였으나 당연하게도 하객들은 듣지 않았다.

“거 술은 적당히 마시라니까?”

“나으리, 그런 말은 낙양에서나 하시오. 서량 사람 기준으로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시오?”

흉년에 오랜만에 술맛을 본 사람들은 전직 의랑인 양진이나 현직 정서장군인 마등의 말도 듣지 않았다.

정신없는 혼례식이 마무리되고 두 사람은 새로 지은 집으로 이동했다. 보통의 경우 막 혼례를 치른 젊은 부부는 당분간 시부모와 함께 살면서 시부모를 봉양하지만, 이들을 빠르게 분가시키려는 마등의 의지가 완강했다.

“저 둘이 집에 있으면 어린애들한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빨리 분가시키는 게 상책이다.”

장남 부부의 과도하게 뜨거운 신혼생활이 막내딸들의 교육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한 마등 덕분에 마초와 양하원은 처음부터 분가해서 신접살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긴 혼례식이 끝나고 두 사람은 신혼집의 안방에서 마주 앉았다.

“아, 정말 힘들다. 두 번째라 더 힘들다.”

혼례식에 지친 마초는 안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뭐야, 그게 신혼 첫날밤에 할 말이야?”

“사실 두 번째가 맞는걸. 내가 시간을 거슬러 왔다고 했잖아.”

“으휴, 설령 그렇다고 해도 두 번째라는 말을 꼭 새신부 앞에서 해야겠니?”

가만히 양하원의 핀잔을 듣던 마초는 문득 벌떡 일어났다.

“아초? 왜 그래?”

“지금부터 다시 30년이 지나면…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올 수 있을까?”

“하하,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그런 일이 또 일어날 리 없잖아?”

“그런가. 나는 다시 한번 시간을 거슬러 왔으면 좋겠는걸.”

“그건 왜? 그때야말로 나 말고 다른 여자하고 혼인하게? 호족의 딸이라거나?”

양하원이 짓궂게 물어보자 마초는 두 손으로 양하원의 양쪽 어깨를 잡았다.

“너를 또다시 만날 수 있도록. 세 번을 다시 태어나면 세 번, 네 번을 다시 태어나면 네 번을 너와 혼인할 수 있도록. 그때마다 더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도록.”

“음, 달콤한 말 좋아. 더 말해줘.”

양하원은 웃으면서 마초를 바라보았다. 마초는 시간을 거슬러 와서 다시 만난 아내의 입에 입술을 포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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