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이감과 시랑군
“그래서 시간을 30년 거슬러 왔다는 걸 믿으라고?”
“정확히는 29년.”
“그거나 그거나.”
마초 일행은 하내태수 장양의 융숭한 환대를 받은 후 다시 길을 나섰다. 길 위에서 마초는 자신이 29년의 시간을 거슬러 회귀했다는 것을 얘기했다. 듣는 양하원은 아무래도 믿기 어려운 눈치였다.
“아초, 너는 그러고도 양진 선생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니? 공자께서는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으셨단 말이야.”
“아니, 나에게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어쩌란 말이야?”
“그래, 알았어. 그렇다고 해 두자. 네가 뭔가 신통한 꿈을 꾸기는 한 모양이니까.”
양하원은 마초의 회귀를 그저 예지몽 정도로 취급했다.
하내를 출발한 일행은 폐허가 된 낙양을 지나 홍농으로 향했다. 200년간 후한의 도읍으로 찬란한 번영을 누렸던 낙양이지만, 4년 전 동탁이 낙양에 불을 지르고 장안으로 천도한 이래 폐허가 되어 옛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황하 중류에 위치한 하내, 하동, 낙양(하남)의 3군을 삼하 지방이라고 부른다. 삼하에서 서쪽으로 가다 보면 험준한 산으로 이루어진 홍농군이 나온다. 이 홍농군에 있는 함곡관은 동쪽의 중원에서 관중 평야로 나아가는 관문이 된다. 함곡관을 통과하면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중심지였던 관중 평야가 나온다. 관중 평야에 위치한 장안, 풍익, 부풍의 3군을 합쳐서 삼보 지방이라고 부른다.
삼보에서 더 서쪽으로 이동하면 천수군이 나온다. 여기서부터가 양주, 즉 서량이다. 마가군의 근거지 천수군 농현은 관중과 서량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이 관중과 서량을 통틀어 관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함곡관은 이렇게 지명을 붙이는 기준이 되는 관문이었다. 관중은 함곡관의 안쪽, 관서는 함곡관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비장군, 그런데 함곡관부터는 조정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 정확히는 이각의 세력권 아닙니까? 500명이나 되는 기병대가 통과할 수 있을까요? 이각이라는 놈이 허튼수작을 부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마초는 나관중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눈에는 경멸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어이쿠, 마궁수 선생께서 그게 걱정이 되셨어요? 이제서야 술이 깨셨나 봐요? 연회 자리에서 혼자 사라져서 다들 한참을 찾았는데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마룻바닥에 뒹굴고 계셨던 우리 마궁수 선생이?”
나관중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게 사실 저도 어찌 된 영문인지 잘… 비장군의 무용담을 떠드느라 술도 거의 안 마셨는데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져서…….”
“그걸 믿으라고? 보나 마나 그 좋아하는 이야기꾼 노릇하다 보니 신나서 과음했겠지.”
양하원은 마초를 신뢰하지 않고, 마초는 나관중을 신뢰하지 않는다. 서황이 헛기침을 하고 불신의 고리를 끊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비장군, 함곡관을 통과하지 않고 돌아서 산을 넘는다고 하셨지요?”
“그래. 홍농의 산속에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어. 산길이 힘들겠지만 이해해 주게.”
“그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산속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요? 산적들입니까?”
“뭐, 지금은 산적 비슷하게 살고 있겠지. 그건 가 보면 아네.”
일행은 함곡관을 통과하는 대신 마초가 아는 샛길을 통해 홍농의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마초는 오백 기가 함께 이동할 경우, 그들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면서 삼십 기만 이끌고 먼저 길을 나섰다. 군량을 가득 실은 수레도 함께였다.
며칠간 산길을 행군해서 외진 곳에 다다랐을 무렵,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 일행을 둘러쌌다.
“멈춰라.”
거지라고 표현하면 거지에게 실례가 될 듯한 행색을 한 사내들이었다. 누추하다거나 초라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다 낡아 떨어진 옷자락 사이로 앙상한 팔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반면 다들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이제 나타나셨군, 시랑군.”
마초는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들에게 원한은 없으나.”
거지 떼의 무리가 갈라지며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특별히 더 누추한 옷차림과 특별히 더 형형한 눈빛을 한 사내였다.
“우리도 부양할 가족들이 있으니 어쩔 수 없군. 그 수레는 놓고 가야겠다. 우리 사정을 이해해 달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는 마초에게 그렇게 말했다. 마초는 우두머리 사내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러지. 수레에 실린 곡식은 원래 그대들에게 주려고 가져온 것이니까. 그리고 줄 게 또 있다.”
마초는 그렇게 말하고는 말 잔등에 실린 포대 자루를 꺼내서 수레 위에 던졌다.
퍽.
소리로 봐서 딱딱한 게 들어있는 듯했다. 마초가 그렇게 하자 여기저기서 군사들도 싣고 오던 포대 자루를 꺼내서 수레에 던져 실었다.
“무슨 짓인가?”
“열어봐라.”
거지 떼의 우두머리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마초를 바라보더니 포대 자루를 열어봤다. 말린 양고기 육포였다. 고기를 보자 모두의 눈이 커졌다.
“일단 보리로 죽을 먼저 끓여 먹고 육포는 그다음에 먹어라. 오래 굶은 상태에서 고기부터 먹으면 배탈이 나니까. 하긴, 그대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원래 군문에 들었던 자들이니까.”
우두머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공자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그렇다, 이감.”
이감이라고 불린 사내는 말 없이 마초를 응시했다.
“원하는 게 무엇인가?”
“일단 그걸로 음식을 해 먹고 기운을 차려. 그다음에 얘기하지.”
이감은 한참 동안 마초를 바라보다 결심이 선 듯 말했다.
“알았다. 따라와라.”
이감이 일행을 끌고 안내한 곳은 산중에 위치한 요새였다. 지은 지 몇 년 되지 않은 듯한 제법 근사한 군사시설이었다.
일반적인 요새와 다른 점은 군인보다 여자와 어린아이의 수가 더 많다는 것이었다. 장정들은 도합 천여 명, 여자와 어린아이는 그보다 더 많아 보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거지보다 못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후발대가 곡식을 더 싣고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일단 지금 가져온 곡식과 육포를 먹으면서 버텨라.”
“공자의 호의에 감사한다. 그러나 어째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인가?”
“그대들에게 받고 싶은 것이 있으니 먼저 베푸는 것이다.”
“받고 싶은 것? 그게 무엇인가?”
“그대들의 목숨.”
마초는 태연하게 이감을 보며 말했다. 이감은 목숨이라는 말을 듣고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우리가 목숨을 내놓을 것이라 생각했는가?”
“그렇다. 시랑군 대장 이감이라면 원한이 깊을 테니까.”
이감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초는 옆에 있는 서황과 나관중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들은 거지 떼가 아니다. 본래 낙양 최고의 병사들과 그 식솔들이지.”
동탁은 낙양을 폐허로 만들고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징발대를 편성해서 시랑군(豺狼軍)이란 이름을 붙였다. 징발대에는 병주자사 정원의 죽음 후 여포를 따르는 것을 거부한 병주병, 동탁이 원래 이끌던 서량병, 황제의 친위대인 금군이 섞여 있었다. 출신은 다르지만 하나같이 명령에 충성을 바치는 것만 아는 군인들이었다. 이들의 지휘는 낙양의 금군 교위였던 이감이 맡았다.
낙양을 폐허로 만들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언제나처럼 누구보다 충실하게 명령을 수행했다. 재물을 빼앗고 무덤을 도굴했다. 저항하는 자들은 죽였다. 후한의 200년 도읍 낙양은 시랑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 폐허가 되었다.
듣고 있던 나관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원성은 시랑군을 향했겠군요.”
“그래. 일이 그렇게 되자 동탁은 이각과 곽사를 시켜 꼬리 자르기를 했지. 시랑군은 역도로 몰려서 전원이 주살 당할 위기에 처했다. 시랑군 대장이었던 이감은 부하들과 그 식솔들을 이끌고 동탁이 지은 요새에 은거한 거야. 그렇지 않나?”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이감이 대꾸했다.
“잘 알고 있군. 그날 이후 명아주를 캐 먹고 무덤을 도굴해서 옷을 찾아 입으며 모진 목숨을 이어 왔다.”
군인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결과, 잘못된 명령을 수행해서 역적이 되었다. 이감은 그저 계속 목숨을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잘못된 명령을 내린 자들에게 복수할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부하들을 수습해서 산골짜기에 숨어 살고 있었다.
마초는 이감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일찍이 내 아버님이신 정서장군께 들은 적이 있다. 어떤 부대가 천하제일인지.”
마초는 마등과의 문답을 떠올렸다. 당시 마등은 어떤 병사들이 가장 강한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병사들? 세 부류가 있다. 서량병, 병주병, 금군이지.”
“우리 서량병이 강한 건 당연하고, 병주병도 우리처럼 척박한 변방의 군대이고 기병 비율이 높으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금군이요?”
“그래, 낙양을 지키는 금군이다. 화하 전토에서 선발된 최고의 병사들이 최고의 장비로 무장하고 최고의 훈련을 받는 부대다. 동탁은 원래부터 서량병을 이끌었고, 정원이 이끌던 병주병을 흡수했고, 조정을 장악하며 금군을 흡수했다. 그러니 동탁군이 강할 수밖에.”
그러니 시랑군은 천하제일의 3개 집단이 섞인 군이었다. 그 시랑군을 맡길 만한 사람은 낙양의 금군 교위 중에서 손꼽히는 우수한 인물이어야 했다. 한 번 쓰고 폐기 처분할 것이니 기왕이면 동탁 정권에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제거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면 가장 좋았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이감이었다.
마초는 그런 이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이끄는 시랑군에는 천하제일의 병사들이 다 있다. 지금처럼 숨어 살기에는 그 능력이 아깝지 않은가? 정서장군부에 목숨을 맡겨라. 정서장군과 내가 그대들을 돕겠다.”
“목숨이라. 우리가 목숨을 맡긴다면 공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대들 전부의 생계. 서량에서 숨어 살 수 있는 정서장군부의 새로운 신분. 그리고…….”
마초는 이감을 바라보며 웃었다.
“원수들의 목을 주마. 이각과 곽사의 목을 그대에게 보여주겠다.”
지난 생에서 이감은 홍농의 요새에서 몇 년을 힘들게 버티다가 서량으로 이주한다. 기근이 이어지다 보니 당시 시랑군은 지금의 절반 이하로 줄어서 5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숫자로도 서량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군웅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마초가 조조에게 맞서 거병했을 때, 마초의 편에서 싸우다 전멸했었다.
‘이감은 시랑군 단 오백만을 이끌고 서량의 군웅이 됐었다. 그런데 지금은 천 명이 넘지. 이들을 동맹 세력이 아니라 내 부하로 삼는다면 더욱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마초의 계산이었다.
이감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그가 할 말은 결국 정해져 있었다.
“목숨을 준다면 공자와 정서장군은 우리 목숨을 어떻게 쓸 셈인가?”
“가장 위험한 곳에 써야지. 전령, 척후, 공작, 암살. 정서장군이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어두운 일, 능력이 모자란 자에게는 맡길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을 그대가 처리하라.”
“동탁을 위해 어두운 일을 하다 이 신세가 되었다. 공자는 동탁과 다른가?”
“나는 그대들이 다시는 불의한 싸움을 하게 만들지 않겠다. 수단은 더러울지언정 목적은 정당한 일에만 동원하겠다. 나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거든 이감, 그대의 손으로 내 목을 취하라.”
이감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한 번 죽은 목숨이다.’
시랑군이 민가를 약탈하고 분묘를 도굴한 사건은 낙양대겁탈이라 불린다. 시랑군은 낙양대겁탈의 주범으로 이미 사회적으로 매장된 사람들이다. 이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가장 빛나는 위업을 위해, 가장 어두운 곳에서 일하라는 말인가.”
이감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몸은 야위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이감의 동작은 절도가 있었다.
“이감이 비장군을 뵙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드리니 부디 헛되이 쓰지 마십시오.”
이감이 마초의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었다. 마초도 두 손을 모아서 답례했다.
“그래. 이각과 곽사의 목으로 그대들의 헌신에 보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