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35화 (35/306)

35화. 철퇴를 든 신부

양하원은 방금 전까지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농현에서 납치된 다른 여섯 처녀들과 함께 상산까지 끌려왔다. 혼자서라면 기회를 봐서 탈출할 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처녀들에 눈에 밟혀서 그러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여기까지 끌려온 것도 분한데, 건방진 흑산적 놈이 나를 아내로 맞겠다고?’

피가 거꾸로 솟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양하원은 다 같이 탈출할 기회를 엿보기 위해 장연의 제의를 수락하는 척하고 혼례식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연은 조백이라는 호족의 대저택에 처녀들을 머무르게 했다.

그러던 중 문제가 생겼다. 흑산적과 대치하고 있는 원소군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빠르다는 첩자들의 보고가 들어왔다. 장연은 당초 계획보다 전투 일정을 앞으로 당겼다. 혼례식 장소도 흑산적의 본영으로 옮기고, 일정도 앞당겨서 간소하게 치를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양하원만 먼저 흑산적 본영으로 이동시켰다.

‘난감하네.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상황인데, 그냥 나 혼자서라도 먼저 탈출해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흑산적 두령 좌자장팔이 양하원을 찾아왔다.

“소저, 잠시 나를 좀 봅시다.”

“무슨 일인가요?”

“그건 따라와 보면 알고.”

좌자장팔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이 새끼가…….’

양하원은 이마에 핏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좌자장팔을 따라나섰다.

‘하여튼 이 도둑놈의 새끼들이 건방지게. 언젠가 머리통을 다 깨버려야지.’

어려서부터 무술과 기마술을 익힌 몸이다. 흑산적 몇 명쯤은 자신이 있었다.

납치되던 날 집에 제대로 된 병장기만 있었어도, 아니 그 전에 실연의 상처로 칠일 밤낮을 눈물로 지새우며 곡기를 끊지만 않았어도 그 자리에서 흑산적 열 놈은 때려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분노는 그런 상황을 만들었던 옛 정인에게 향했다.

‘마초, 인간쓰레기 같은 놈.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 내가 가장 예쁜 시절에 단물만 빼먹고 정략혼을 하겠다고 도망친 놈!’

좌자장팔은 간신히 울분을 삭이는 양하원을 외진 방으로 데려가서 마주 앉았다.

“소저, 내 뭣 좀 물어봅시다.”

“그러시지요, 두령.”

“서량의 염행이라는 무장을 알고 있소?”

“염행이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전혀 모르는 이름이네요. 무슨 일이 있나요?”

“전혀 모른다고?”

좌자장팔이 양하원의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매우 부담스럽게 생긴 얼굴이 양하원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우리가 대두령을 따라 이 본영으로 이동한 직후 서량의 염행이라는 놈이 조백의 저택을 습격했소. 우리 형제들 삼백 명이 몰살당했고 소저와 같이 온 처녀들도 그놈에게 전부 빼앗겼소. 정녕 모르는 사람이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서량의 무장이 이 먼 기주 상산국까지 나타나서 흑산적을 습격했다는 말인가?

‘잠깐, 그런데 처녀들을 빼앗겼다고? 그럼 다들 흑산적 손에서는 풀려났다는 거잖아?’

양하원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만 탈출하면 되는 것이다.

“두령, 염행이라는 이름은 제가 아는 게 없어요. 뭔가 다른 이야기는 없나요? 가령 그자의 생김새 같은 거요.”

“스무 살 전후의 아주 젊은 자요. 기생오라비 같은 외모를 했는데 극히 난폭하다고 하더군. 그리고 대두령과 창을 겨룰 정도로 무예 실력이 있는 자요.”

“응?”

서량 출신.

스무 살 전후의 젊은 청년.

기생오라비 소리를 들을 정도의 곱상한 미남자.

무예의 달인.

그리고 극히 난폭한 자.

그런 자가 천하에 둘씩이나 있을 리 없다.

“아초!”

“음? 뭐라고 했소?”

“두령, 그자는 제가 아는 사람 같군요. 염행이라는 이름은 아마 거짓으로 꾸며낸 이름일 것입니다.”

양하원은 말을 하는 중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생각했다.

“그자는 마초가 틀림없어요. 마가군 수장 마등의 아들입니다. 여기까지 쫓아온 걸 보면 제가 목적인 거예요!”

“소저가 목적이라고?”

생각이 끝났다. 양하원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티 나지 않게 새끼손가락으로 양쪽 눈알을 꾹꾹 눌렀다.

‘이 정도면 눈물이 났겠지?’

“흑흑, 마초는 고향에서부터 저에게 집요하게 구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잔인하고 포악한 자라 제 아버님께서 혼담을 계속 거절하셨지요. 그러다 제가 없어지니 여기까지 저를 찾아온 게 틀림없어요!”

양하원은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만들고 좌자장팔을 바라보았다.

“틀림없이 마초가 저를 찾아올 거예요. 저를 살려 주세요. 중랑장 어르신의, 대두령의 곁에 있도록 해 주세요!”

갑자기 양하원이 눈물을 보이자 좌자장팔은 당황했다.

“마초라는 자가 그렇게 잔인하오?”

“그럼요!”

양하원은 있는 대로 말을 지어내서 마초가 고향에서 얼마나 잔인하게 패악질을 하고 다녔는지 설명했다. 일생을 범죄의 세계에서 살아 온 좌자장팔조차도 양하원의 묘사를 듣고 혀를 찼다.

“그런 천하의 패륜아 같은 놈이 있나, 죽은 동탁이 무덤에서 일어나 형님으로 모시겠군.”

“제 말이요! 그러니 어서 저를 중랑장 어르신의 곁으로 데려다주세요! 이대로는 무서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구요.”

“그러고는 싶으나 대두령은 지금 출진해 있지 않소? 전장까지는 갈 방법이 없으니 조금만 기다리고 계시오. 조만간 대두령께서 승리하고 돌아오실 거요.”

“저도 말은 탈 줄 알아요! 당장 저를 중랑장 어르신께 데려다주세요. 이제 혼례를 치르면 어르신께서 제 서방님이 되시는데 제 말을 안 들을 건가요?”

양하원은 일부러 새된 소리로 외쳤다. 좌자장팔은 난감한 표정이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양하원은 장연이 신부로 삼겠다고 지목한 여자였다. 난폭한 구혼자를 피해 정혼자의 곁에 있겠다는데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알았소. 아직 멀리 가지는 않았을 테니 어서 출발합시다. 단 대두령이 돌아가라고 하면 그때는 여기로 돌아오는 거요.”

“물론이죠. 지금 바로 준비하겠어요!”

양하원은 좌자장팔의 무리와 함께 장연을 찾아가기로 하고 바로 준비에 나섰다.

‘좋아, 됐어!’

다른 처녀들이 마초에게 구출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자신뿐이다. 좌자장팔과 함께 길을 나섰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말을 달려서 혼자 도망치면 된다. 기마술이라면 흑산적들이 자신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정 따라붙는 놈들이 있으면 박살을 내 줄 셈이었다.

흑산적의 본영은 원소와의 싸움에 대비해 대부분의 병력이 출정해 있었기에 군데군데 빈 막사가 있었다. 양하원은 주변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빈 막사로 들어갔다.

“어디 보자, 무기로 쓸 만한 게…….”

조잡한 창칼이 몇 자루 남아 있는 가운데, 적합한 무기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양하원이 평소에 선호하는 무기였다.

“역시 이럴 때는 철퇴가 딱이지.”

칼은 숨기기 어렵다. 창은 숨기기가 아예 불가능하다. 그러나 철퇴라면 길이가 적당하니 어떻게든 숨겨서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양하원은 옷자락 속에 철퇴를 숨겼다. 그제서야 마초의 생각이 머리에 들어왔다.

“농현에서 이곳까지 그 먼 길을 달려왔단 말이야? 설마 나를 구하기 위해서일까?”

잠시 마초를 용서할지 검토해 본 양하원은 이내 고개를 도리질했다.

“흥, 헌신짝처럼 내버릴 때는 언제고!”

* * *

마초 일행에 순우경이 합류하며 추격대는 기병 5000명이 되었다.

호타하를 건넌 마초는 장연의 본영으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적병이라도 만나면 그대로 돌파해 버릴 셈이었으나 하루 동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월길이 이끄는 강족 전사대 때문이었다. 월길은 월등히 빠른 속도로 산악과 평지를 오가며 주변을 정찰했다. 적의 큰 부대는 어김없이 월길의 눈에 미리 띄었으니 마초 일행은 이를 우회할 수 있었다.

강족 기병은 한족의 기병처럼 중무장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행군의 속도가 빠르다. 마가군이 상식을 깨는 행군 속도를 가진 것도 강족 부대원들을 통해 그들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강족 기병이 가진 장점을 월길이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부터 야산에 올라서 정찰을 마친 월길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맹기 공자, 맹기 공자!”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냐? 적병의 수가 많더냐?”

“아니, 그게 아니고…….”

월길은 곧 숨이 넘어갈 듯했다. 간신히 숨을 고르고 말했다.

“소저를 찾았습니다! 십 리쯤 떨어진 곳에서 백 명쯤 되는 흑산적 패거리들이 행군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한 명은 말을 탄 여인입니다!”

막상 낭보가 전해지자 마초는 묵묵부답으로 말이 없었다. 옆에서 방덕이 월길에게 물었다.

“여인이 확실한가?”

“예,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화려한 치장을 한 여인입니다!”

“알았다. 고생했네. 맹기, 이제 코앞까지 온 듯하다. 말을 탈 줄 아는 여인도 그렇게 흔치는 않으니 양 소저가 맞을 것이다. 무슨 연유로 본영에 있지 않고 밖으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 출발하자.”

마초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흑산적 백여 명 정도를 물리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막상 양하원이 근처에 있다고 생각하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초는 가는 중에도 계속 양하원에게 뭐라고 할지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기병대가 달리자 십 리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 양하원과 부하 백여 명을 이끌고 본영으로 달려가던 좌자장팔의 눈앞에 번쩍거리는 갑주를 갖춘 오천 기병대가 나타났다. 기병대 중 선두에 선 자들이 일제히 마가군의 군기를 올렸다.

“저, 저놈들이 어떻게? 이곳은 우리 세력권 한가운데란 말이다!”

마가군의 군기를 보자 좌자장팔은 경악했다. 반면 양하원은 태연했다.

“흥, 멀리도 왔군.”

양하원은 천천히 몰아 자신을 수행하는 흑산적들의 앞으로 나섰다.

양하원을 알아본 마초도 절영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수천의 군사들이 운집한 벌판에서 말을 탄 두 남녀가 마주 보게 되었다. 일행은 모두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지켜봤다.

양하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이 먼 곳까지 오셨습니까?”

목소리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랑또랑했다. 말투는 남을 대하는 것처럼 딱딱했다.

“하원.”

마초는 심호흡을 하고 양하원을 보았다. 이제서야 겨우 마음이 진정이 됐다. 마초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대를 구하러 왔다. 서량에서 기주까지.”

“하!”

그러나 양하원은 그 진심을 별로 믿지 않는 듯싶었다.

“천하에 하늘의 별처럼 많은 것이 여인입니다. 그런데 큰 뜻을 품었다는 장부가 여인 하나에게 빠져서 생사도 헤아리지 못하고 서량에서 기주까지 달려왔다는 말입니까? 공자는 나보고 고작 그런 사내에게 의탁하라는 말인가요?”

하늘의 별처럼 많은 것이 여인이다.

그날, 기성의 성벽 위에서 목숨을 잃은 아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마초는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고동쳤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하리라. 그때 주지 못했던 것을 주리라.

“하원, 그대는 별이 아니다.”

“뭐라고?”

“천하에 하늘의 별처럼 많은 것이 여인이라 하였는가? 그러나 천하에 그대는 단 한 명뿐이다. 그러니 그대는 별이 아니다.”

“아니면?”

“태양이다.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태양.”

“…오호라?”

“천하 만물 그 무엇이라도 태양이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래. 나는, 초목이 단 하나의 태양을 그리는 것과 같이 그대를 사랑했노라.”

마초는 절박했다.

자신의 손으로 죽게 만들었던 아내, 그래서 일부러 밀어내려고 했던 아내다. 그러나 떨어져 있어 보니 생각이 정리되었다.

‘왜 말하지 못했을까. 내가 아내를 이렇게 사랑하는 것을.’

아무리 먼 길이라도 개의치 않고 달려와서 아내를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것이다. 다시는 예전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마초가 그렇게 진지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동안, 그의 뒤에 있는 장수들과 5천 기병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지만, 일군을 이끄는 장수 된 자가 어찌 저런 민망한 소리를…….”

“소… 손발이…….”

군사들 중 일부는 마초의 말을 듣자 마치 손발이 수축되는 듯한 증상을 호소했다. 이날의 일로 인해 극도로 부끄럽고 민망한 말을 들었을 때를 두고 ‘수족수축(手 足收縮)’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기게 된다.

언변이라도 유려했으면 또 모르겠지만 일생을 무장으로 살아온 마초의 언변으로는 저 정도가 한계였다.

반면 양하원은 이런 것을 좋아하는지 어느새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그렇게까지 달콤하게 말한다면 이번 한 번만 넘어가기로 할까.”

그렇게 중얼거린 양하원은 마초 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뭐 해, 멍청아! 빨리 데리러 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마초는 양하원의 일갈을 듣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마초가 절영에 채찍질을 해서 달려오고, 절영이 무서운 속도로 육박하는 것을 확인하자 양하원은 말머리를 돌려 흑산적들 쪽을 바라보았다.

“자, 그런데 우리는 아직 할 얘기가 남아 있지?”

양하원이 씨익 웃었다.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지만, 눈은 상대를 쏘아보는 표정이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좌자장팔은 그 웃음이 참으로 악당 같다고 생각했다.

양하원은 품에서 비수를 꺼내서 치맛단 오른쪽을 세로로 길게 잘랐다. 그리고는 치맛단을 홱 펼치자 길고 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흑산적 모두가 여인의 다리에 시선을 뺏겼다.

그러나 좌자장팔의 눈에는 다른 것이 들어왔다. 여인의 허벅지에는 비단 끈이 동여매어져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물건이 끈에 매달려서 허벅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철퇴?”

좌자장팔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양하원이 흑산적 진영 쪽으로 말을 달려 들어왔다. 허벅지에 매달고 있던 철퇴는 어느새 오른손으로 옮겨 가 있었다.

“너 이 새끼, 아까 내 정인을 두고 패륜아라고 욕했지?”

“그건 소저가 부추겼…….”

뻐억!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철퇴가 흑산적 좌자장팔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투구가 함몰되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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