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상산 전투 (2)
오늘 우저근에게 일어난 일은 말도 안 되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행군하는 기병대를 만났다.
하필 그 기병대는 말로만 듣던 수준 높은 궁기병 전술을 구사하는 부대였다. 그 지휘관이라는 짧은 수염의 청년은 100장 밖에서 적장을 노려서 맞출 수 있는 궁술의 달인이었다.
그리고 젊은 미남자 하나가 엄청나게 빠른 말을 타고 쳐들어와서 진영을 파괴했다. 혼자 힘으로 전황을 바꿀 수 있는,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무위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수적 우세가 어디 가지는 않는 법. 기껏 이 자를 잡기 위해 창병을 물리고 도부수를 비롯한 경보병대를 전위에 세우니, 그새 도부수를 잡기 위해 중기병이 강을 건너서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무거운 갑옷을 입은 중기병들이 이렇게 빨리 강을 건널 수 있는 거냐! 대체 저놈들은 누가 이끌고 있는 것이야!”
원소군 중기병을 이끄는 것은 상승장군 서황. 마초의 지난 생에서는 조조 밑에서 수많은 군공을 세웠던 명장이다.
당대 최고의 전술가 조조로부터 고대의 명장 주아부의 현신이라는 극찬을 들었던 서황이다. 빠른 기동으로 흑산적의 허를 찌르는 정도는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서황이 이끄는 1500 중기병이 육박해 들어오자 흑산적 도부수들은 그대로 짓밟히기 시작했다.
서황은 자신의 애병인 극을 들어 도부수 몇을 베다가 내친김에 상대가 두고 간 도끼를 집어 들었다. 생각보다 도부수들이 빠르게 와해되고 있으니 조금 더 속도를 낼 참이었다.
“으아아악!”
왼손에 극을, 오른손에 자루가 긴 도끼를 든 서황이 양손으로 흑산적들을 베어 넘겼다. 양손에 든 극과 도끼가 가는 곳마다 흑산적들의 비명이 울렸다.
서황의 기병대 뒤쪽에 껴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관중은 도끼를 든 서황을 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서 사마가… 서 사마가 도끼를 들었어!”
나관중은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져 가며 큰 도끼를 들고 날뛰는 서황의 모습을 지켜봤다.
‘저렇게 뛰어나고 용맹한 장수에게 나는 참 몹쓸 짓을 많이 했구나. 연의를 다시 쓸 기회가 온다면 서황을 좀 더 활약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에서 서황의 분량을 대폭 줄이고 그나마도 소인배로 그렸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봐도 서황의 활약을 늘려주기는 애매했다.
소설의 재미라는 것은 결국 이야기의 큰 줄기를 잘 살려야 하는데, 서황은 주로 주인공 유비 일행의 상승세에 찬물을 끼얹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서라면 서황의 활약을 굳이 늘릴 필요가 없었다.
만약 장료처럼 대 오나라 전선에 배치되어 큰 활약을 했다면 충분히 분량을 늘려 줄 수 있었으리라.
‘아니면 하후돈처럼 박망파에서 대패를 당하든지.’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인 유비 일행에게 대패한 사실이 있다면 얼마든지 띄워 줄 수 있다. 처음에 강력함을 보여준 후 나중에 주인공들이 극복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뚜렷한 패배가 없는 서황을 띄워줘 버리면 작가로서는 나중에 이야기를 쓰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차라리 서황이 형주 공방전에서 관우에게 패해서 전사했었다면 지금처럼 비중이 공기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의의 주역 중 하나인 관우가 마지막에 극복하는 강력한 적으로 포장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대부를 하나 만들어서 선물할까? 아니, 내친김에 청룡언월도나 장팔사모도…….’
나관중의 머릿속에 농현으로 돌아가면 <삼국지연의>에서 설정한 무기들을 도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그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총 2500기의 마초군은 흑산적의 2만 선봉대를 완전히 헤집어 놓았다.
방덕은 마가군 기병대 500기를 이끌고 주변을 맴돌며 흑산적의 두령들을 겨냥해 끊임없이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좋아, 순우경 장군의 본대가 도하에 성공했군.”
방덕은 본대가 강을 다 건넌 것을 확인하자 바로 뿔나팔을 불었다.
부우우우—
뿔나팔 소리가 상산의 하늘에 퍼졌다. 마초의 부대는 바로 말머리를 돌려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자리는 새롭게 강을 건너온 순우경의 부대가 채웠다.
이미 진영이 흐트러지고 지휘 체계가 마비된 흑산적을 상대하게 된 순우경군은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순우경이 이끄는 원소군이 용감하게 싸우니 흑산적은 당해 낼 방법이 없었다. 이미 흑산적의 진형은 다 흐트러지고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퍽!
“으아악!”
마초가 적진을 헤집는 사이 방덕과 조운은 흑산적 장수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방덕의 화살과 조운의 철창이 한 번 번득일 때마다 흑산적 장수 한 명의 목이 떨어졌다. 그렇게 장수들을 잃은 흑산적은 지휘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활을 넣어라! 돌격이다!”
마가군 500기의 기병대는 화살을 다 쓰자 만도를 들고 대열이 무너진 적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원소군은 용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흑산적 2만 명 중 죽은 자와 도망친 자가 태반이었다.
대승이었다.
마초 일행의 싸움을 직접 본 순우경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마초… 저자가 정녕 약관의 젊은이가 맞는가?”
마초는 적의 포진을 보고 전략을 정확히 간파하고 대응 전략을 세웠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놀라운 기동력으로 우회해서 적을 허를 찔렀다.
개인의 무용은 또 어떤가? 마초가 절영을 타고 단기필마로 돌격하자 적진이 붕괴되었다.
마초와 같이 싸우고 있는 방덕, 서황, 조운이라는 장수들 역시 하나하나가 일기당천의 용장들이었다.
그렇게 감탄하는 사이 전장에는 원소가 이끄는 본대가 도착했다. 마초의 활약에 힘입어 흑산적 2만 선봉대가 패주했다는 사실을 듣자 원소 또한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마 공자, 설령 여포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대승을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오. 오늘 그대가 세운 군공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오.”
마초는 양하원을 구하러 가기 위해 마음이 급했다. 바로 원소를 보며 말했다.
“명공, 이 정도면 군사를 빌리는 대가로 충분한 군공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저는 약조한 대로 제 부대와 빌린 군사를 이끌고 흑산적 본영으로 진격하겠습니다.”
원소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약조한 바는 지키겠소. 그러나 마 공자의 군공이 당초의 기대보다 너무 크니 우리도 마땅히 약조를 수정해야 할 것이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마 공자가 이끌고 가려는 부대 중 치중대를 제외하면 정병은 2500기밖에 되지 않소. 만약 흑산적 본영 근처에서 적의 대부대를 만날 경우, 어려움에 처할 수 있소이다. 순우경 장군의 기병을 더해 줄 터이니 정병 5000기를 이끌고 진격하시오. 첫 싸움에서 승기를 잡았으니 나 또한 바로 따라가겠소.”
예상보다 더 큰 공을 세웠으니 병력을 더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마초는 깊이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명공, 오늘 베풀어 주신 후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 원모야말로 공자께 큰 은혜를 입었소이다.”
원소 또한 한참 어린 마초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가며 답례했다. 누구라도 진심이라고 느낄 만큼 정중한 몸짓이었다.
마초가 물러가자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순우경이 원소를 보며 말했다.
“주공께서는 어째서 마초에게 군사를 더해 주겠다고 하셨습니까?”
원소는 순우경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 이유는 그대가 더 잘 알 것이오. 나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그대는 마초의 무용을 직접 보지 않았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자이니 충분한 숫자의 병력을 쥐여주면 그만큼 더 큰 공을 세울 것이오.”
“그러나 객장에게 맡기는 병력치고는 지나치게 많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제가 마초를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준다면 좋겠지. 허나 만약 마초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그대는 무리해서 싸우지 말고 몸을 피하시오.”
원소는 만면에 떠오르는 웃음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상산 전투의 첫 싸움이 예상 이상의 대승으로 끝났다. 만약 마초가 장연에게 또 한 번의 큰 피해를 입혀 준다면 자신의 하북 통일 계획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느끼고 있던 원소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내가 10년 후에도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 안에 하북을 통일하고 중원으로 진출하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지도 못한 객장이 나타나서 큰 싸움을 이겨 준다는 건…….’
“천명이 나에게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
원소는 무심코 속내를 내보였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오. 그보다 순우 장군이 직접 본 마초의 무용은 어느 정도였소?”
순우경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천하제일을 다툴 수 있는 무장입니다.”
“허허, 그 정도인가? 그렇다면 저자가 본거지인 서량에서 튼튼한 기반을 잡게 된다면 상당히 위험한 존재가 되겠군. 십만 대군이라도 이끌게 되면 꽤 곤란하겠는걸.”
원소는 그렇게 말하고 껄껄 웃었다.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마초가 그 정도의 기반을 잡기 전에 자신이 중원 최강의 세력이 되리라는 확신이었다.
‘출중한 젊은이다. 그러나 시대를 잘못 만났어. 이십 년, 아니 십 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나와 천하를 다툴 수 있었겠지.’
원소도 마흔 살을 넘겨 보니 세상살이에서 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었다. 이는 마초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천하를 다투기에는 너무 늦게 태어났다.
그러나 마초의 활약을 직접 본 순우경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만약 마초가 서량에서 십만 대군을 이끌게 된다면…….’
순우경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때는 마초가 천하의 주인을 결정할 것이다.’
* * *
원소와 순우경이 각자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조운은 마초에게 다가갔다.
“맹기, 대승이다. 오늘의 이 승리는 자네의 용맹 덕분이다.”
조운은 마초에게 포권하며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마초는 그 모습을 보자 픽 웃었다.
“자룡, 자네야말로 더 돋보일 수 있었지만, 일부러 자제하고 의종을 지휘하는 데 전념했지?”
마초가 지난 생에서 만났던 장년의 조운도, 지금 다시 만난 청년 조운도 똑같았다. 그는 전장에서 공을 탐내거나 자신이 돋보이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해야 할 일만 묵묵히 수행할 뿐이었다.
특별히 호승심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남을 질투하지도 않았다. 지금처럼 큰 공을 세운 동료들을 담담하게 치하할 뿐이었다.
“그저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겸양이 과하군. 그나저나 이제부터는 흑산적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아마 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창을 들고 싸우는 자에게 위험은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지.”
조운은 담담한 말투로 마초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의종은 자네에게 큰 신세를 졌다. 그러니 나는 의종의 일원으로서 어떤 위험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만약 흑산적과 싸우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나에게 맡겨 주게.”
“그래, 약속하지.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하겠네.”
마초는 조운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