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피의 혼례식 (2)
의종의 단원들은 순식간에 조백의 사병들을 제압하고 조백의 침소에서 번선의를 구해 냈다.
서로 간의 숫자는 비슷했지만 사기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제압당한 사병들은 무기를 빼앗기고 줄줄이 묶여서 창고에 갇혔다.
의종이 조백의 사병들을 제압하는 동안 삼백 명의 흑산적 무사들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은 것은 조운, 방덕, 서황이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조백의 사병들을 제압한 의종 단원들은 지체없이 세 사람을 지원하러 갔지만, 흑산적들은 이미 궤멸되어 있었다. 삼백 명이서 세 명을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 사이 월길은 강족 전사들을 이끌고 저택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맹기 공자, 처녀들이 있는 곳을 찾았어요! 저는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월길. 가서 처녀들을 구해서 이쪽으로 데려와라.”
마초는 월길에게 그렇게 지시하고 수하 십여 명을 거느린 채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후원에 있는 별채였다.
“여기에 뭔가 있군.”
이렇게 저택이 시끄러운데 담장에 붙은 이 별채만은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봐서 누군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나관중은 마초의 지시대로 그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칼을 쥐고는 있었지만 쓸 줄도 모르기 때문에 그저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수장의 옆에 붙어 다니는 방법밖에 없었다.
마초는 병사 둘을 시켜서 별채의 빗장을 따게 하고 돌입했다.
예상대로 별채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제법 차림새를 갖춘 무사들이 비단옷 차림의 한 남자들 둘러싸고 있었다. 무사들은 마초를 보자 칼을 뽑아 들었다.
“그만, 달려들지 마라. 무공을 익힌 자다.”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무사들을 제지하고는 철창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중랑장 어르신, 위험합니다!”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무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말을 듣자 마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중랑장이라, 그렇다면 저자가…….’
“흑산적 대두령 장연인가?”
마초가 물었다. 비단옷 차림의 남자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많이들 그렇게 부르더군.”
“하! 여기서 이런 대어를 낚을 줄이야. 오늘이 네놈 제삿날이 되겠구나.”
“상당히 무례한 놈이구나. 어디서 온 누구냐?”
마초는 장연을 보면서 다시 한번 악당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통성명을 하려는 순간, 조운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만약 장연이 가짜 조자룡의 정체를 묻거든 일단 내 이름은 이야기하지 마시오. 내가 마가군 소속이라는 것을 알면 농현 처녀들을 구하러 왔다고 눈치챌 수 있소.
—알겠소. 뭐라고 하면 되겠소?
—음… 염행이라고 하시오.
염행은 서량의 또 다른 군벌 한수 휘하에 있는 무장이다. 마초와는 어린 시절 악연을 가지고 있는 이름이기도 했다.
이제는 처녀들을 구하기 일보 직전이니 굳이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을 듯도 하였으나, 마초는 마지막까지 신중하기로 하고 장연을 보면서 말했다.
“내가 바로 서량의 염행이다!”
“염행? 아아, 가짜 조자룡 말인가. 역시 자룡 그놈이 배신한 거였군.”
장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는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염행, 이 치욕은 곧 너희들에게 되돌려 주마. 단 네놈의 목은 이 자리에서 가져가야겠다.”
“그런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마초도 피식피식 웃으며 장연의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애용하는 장도가 아니라 창을 든 채였다.
“오늘은 염행이니까 염행답게 상대해 주지. 받아라, 흑산적!”
마초는 창을 들어 빠르게 장연에게 찔러 갔다.
마초는 철창을 쓰지 않는다. 지금 들고 있는 창도 나무 자루를 가진 평범한 창이었다. 마초에게 창은 소모품이었다. 창이 부러지면 다른 창으로 교체하거나 장도를 뽑아 드는 것이 마초의 전투 방식이었다.
반면 장연은 묵직한 철창을 들고 있었다. 속도는 느리지만 무게와 강도가 있는 철창을 활용해서 마초가 찔러 오는 빠른 공격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쩡!
마초와 장연의 창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두 사람은 그대로 십여 합의 공격을 주고받았다.
휘이익.
마초와 장연의 창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바람이 일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눈으로 좇아가기도 버거울 정도로 빠른 공격과 방어가 교차 되었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나관중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높은 수준의 대결이었다.
“비장군의 무공이 대단한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장연도 대단하구나.”
나관중은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다 염행이라는 이름에 생각이 닿았다.
‘그런데 비장군이 염행답게 상대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잠시 생각해 보니 역사서 <위략>의 기록이 떠올랐다.
염행은 지난 생에서 마초에게 큰 상처를 입혔던 인물이었다. <위략>에는 어린 시절의 마초가 염행과 단기접전을 하다가 염행이 부러진 창으로 목을 찔러서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 그러면 혹시 비장군은… 그때 염행에게 당했던 초식을 사용하려는 건가?’
나관중이 염행과의 일화를 떠올린 사이, 장연은 철창으로 마초가 내지른 창끝을 내려쳤다.
깡!
마초의 창끝이 땅바닥에 박히고 장연의 철창이 마초의 창을 내리눌렀다.
턱.
장연은 마초의 창을 발로 밟아 무력화시켰다. 이대로 승부가 갈릴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마초는 침착했다.
“흑산적 주제에 창술은 뛰어나군. 하지만 그렇게 무술에 자신이 있을 때가 제일 위험하지.”
마초는 씩 웃고는 손에 힘을 줬다.
우직!
바닥에 처박힌 창날 부분을 경계로 창대가 부러졌다. 창날이 바닥을 굴렀다. 마초는 날카롭게 부러진 창대를 들어 지체없이 장연을 찔러 갔다. 목표는 장연의 목이었다.
쉬익!
“응?”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경악할 만한 대담한 기습이었으나 공격은 빗나갔다.
장연이 몸을 살짝 틀어서 손쉽게 마초의 공격을 피한 것이다.
“이런 잔재주가 특기였나? 비열하지만 좋은 공격이었다, 염행. 머리가 아주 나쁜 애송이라면 이 공격으로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다, 닥쳐!”
마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난 생의 자신이 당했던 치욕적인 패배를 남에게 그대로 맛보여 주고 비웃어 주려던 마초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장연이 상산창술의 전인이라는 점은 하후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연은 마초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강했다.
‘자룡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수준이다. 설마 이 정도의 고수일 줄이야.’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심기일전해서 전력을 다해 다시 싸우는 것이다.
마초는 심호흡하며 부러진 창을 던지고 장도를 뽑아 들었다.
그때 마초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연 사형?”
먼발치에서 조운이 마초와 장연을 발견했다. 옆에는 방덕과 서황도 함께였다.
마초를 상대하던 장연은 멀리서 달려오는 조운 등을 보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 염행이라는 놈이 생각보다 무공이 있어서 상대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자룡까지 나타났군.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가는 게 좋겠다.’
“염행, 네놈의 목은 나중에 반드시 취해 주마.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다.”
“뭐라고? 어이, 기다려!”
장연은 마초의 대꾸를 듣지도 않고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주변의 부하들이 몸으로 마초 앞을 막아섰다.
장연은 부하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별채의 벽을 부수고 담벼락 앞에 섰다. 세 발짝 뒤에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돌담에 창을 찔러 넣었다.
쾅!
창격에 맞은 돌담이 부서져 나가며 바깥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상산창술의 애각인가?”
마초는 지난 생에서 조운과 몇 번 대련한 적이 있다. 당연히 절기 애각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장연의 애각은 돌담을 부술 정도로 실로 강맹했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애각은… 자룡의 애각보다 더 강하다.’
창술은 조운과 호각. 절기의 완성도는 조운보다 위. 백만 흑산적을 이끄는 장연은 마초가 처음 생각한 것보다 더 강한 고수였다.
그때 장연이 부순 돌담 너머로 말을 탄 흑산적 부하들 몇이 나타났다.
“어르신, 어서 피하십시오!”
장연은 훌쩍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장연을 추격하려는 마가군 병사들을 남아 있는 흑산적 부하들이 막아섰다. 대두령을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이들인 만큼 최정예로 구성된 모양이었다. 부하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대두령을 위해 시간을 끄는 임무에 목숨을 던졌다.
난전 끝에 흑산적 부하들을 제압하자 이미 장연의 자취는 사라진 뒤였다.
“잘하면 여기서 거물을 잡을 수 있었는데, 아쉽게 됐군.”
장연은 백만 흑산적의 수장이다. 아버지인 마등과 비교해도 그 영향력이 오히려 윗줄에 있는 거물이다. 만약 잡았다면 엄청난 업적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마초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난 생에서 장연은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았다. 세력이 약화되자 조조에게 귀부해서 천수를 누렸다. 앞으로 몇 년간은 기주목 원소의 앞을 막아서는 강력한 적수가 될 것이다.
‘역사를 너무 많이 바꾸면 일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나는 굳이 저자의 목숨을 취할 필요 없이 처녀들만 구해서 돌아가면 그만이다.’
마초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장연이 머물던 별채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 자는 왜 굳이 조백의 저택에서 머물고 있었을까?”
부하들 몇 명만을 거느리고 돌아다니는 것은 본인이 절정고수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다니며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마초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별채 안을 뒤졌다.
별채에는 병서와 행정문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벽에는 큼지막한 지도가 걸려 있었다. 책상 위에 펼쳐 놓은 문서에 먹을 쏟아 버린 흔적도 보였다. 아마 밖이 소란해지자 보안을 위해 기밀문서를 지워 버린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전투 계획을 짰나 보군.”
어느새 옆에 다가온 조운이 마초의 말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오. 사형은 원소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면 새 나라를 세우고 상산을 도읍으로 할 예정이라고 했었소. 이 저택은 진정현령의 치소(治所)이기도 하오. 아마 전쟁 이후, 상산의 행정계획까지 같이 수립하기 위해 굳이 이곳에 머물렀을 거요.”
“그렇다면 장연은 아마도 지겠군.”
“어째서 그렇소?”
“총대장이 싸움 전에 전리품이나 생각하고 있으면 지게 마련이오.”
마초의 말에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때, 조조와 협상을 통해 서량의 자치권을 보장받는 따위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승패가 달라졌을까?’
마초는 잠시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마 공자, 마 공자!”
“아, 금란인가?”
월길이 마초에게도 익숙한 얼굴을 데려왔다. 농현의 처녀 금란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금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금란, 우리가 이 먼 곳까지 그대들을 구출하러 왔는데 좀 더 기뻐해 달라고. 하원은 어디 있나?”
“마 공자, 하원 언니는 이곳에 없어요!”
“뭣이?”
마초는 금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혼례를 준비한다고 하원 언니만 먼저 흑산적 본영으로 보내졌어요!”
금란이 하는 얘기를 통해 마초 일행이 짐작한 바는 이러했다.
함께 끌려온 여섯 명의 처녀들은 양하원이 장연과 혼인하면서 전부 그녀의 시비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는 조백의 저택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원래 장연의 계획은 상산에서 혼례를 치르고 원소군과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계획에 변경이 생겼다. 첩자들을 통해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원소군의 출진 준비가 예상보다 빨랐다. 빠르면 혼례일을 즈음해서 상산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상산에서 혼례를 치를 경우, 혼례일에 맞춰서 원소군의 습격을 받아야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래서 장연이 북쪽으로 혼례 장소를 옮겼다고?”
“맞아요! 호타하를 건너면 흑산적 본영이 있는데 그곳으로 갔다고 하더군요.”
장연의 계획은 상산으로 원소군을 유인한 뒤, 원소군이 호타하를 건너서 본영 쪽으로 북상할 때 들이치려는 셈일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본영까지는 침범당할 일이 없으니 혼례를 치르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전쟁 준비를 하느라 수레가 모자라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틀 전 하원 언니만 먼저 본영으로 보내졌어요. 저를 포함한 여섯 명은 여분의 수레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마 공자에게 구출된 거구요.”
“이런 제길!”
마초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양하원을 구하기 위해 천 리 길을 달려서 상산까지 왔다. 갖은 고생을 해가며, 기주의 정세에까지 개입하며 처녀들을 구해 냈지만, 그중에 하필 양하원만 빠져 있었다.
‘이대로 물러나면 하원은 흑산적 두령의 아내가 된다.’
그렇다고 물러나지 않으면 백만 흑산적의 본영으로 쳐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를 부드득 가는 마초의 곁으로 하후란이 다가왔다.
“공자, 아직 한 명의 소저를 구하지 못했으니 약속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구할 때까지 저희가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하후 단주.”
“지금 바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그래서는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장연과 싸움을 하려면 군사와 치중(輜重, 수레를 끄는 보급부대)이 필요하다.”
양하원이 끌려간 곳, 그리고 장연이 도망친 곳은 흑산적의 본영이다. 마가군과 의종만으로 들이치는 것은 자살행위다. 게다가 호타하를 넘어 행군하려면 보급이 필요하니 치중도 있어야 한다.
마초에게 지금 당장 군사와 치중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다시 원소에게 간다. 그의 도움을 받아 장연을 칠 것이다.”
마초는 나관중, 방덕, 서황, 월길, 하후란, 조운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그들의 생각도 마초의 생각과 같았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마초가 말했다.
“백만 흑산적을 다 죽여서라도 되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