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30화 (30/306)

30화. 피의 혼례식 (1)

“으흐흐흐, 선의야. 내가 드디어 너를 품게 되었구나.”

혼례식이 있는 날, 조백은 하루 종일 들뜬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상산의 호족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 온 그다. 나이 오십에 이르기까지 여색도 탐할 만큼 탐해 보았다.

그러나 진정현의 의원에서 일하는 번선의를 처음 본 순간, 오십이 넘은 부호에게 소년 같은 열정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번선의는 실로 총명했다. 그 어렵다는 의술을 배워서 사내들도 힘들어하는 의원 일을 하는 처녀였다.

대충 걸친 듯한 작업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몸의 굴곡은 늙은 부호의 눈을 돌아가게 했다.

‘그보다 더 음심을 자극하는 건… 이 아이가 억센 사내들 틈에 둘러싸여 있다는 거지.’

고아였던 번선의를 거둔 것은 진정현의 의원 동연이다. 그는 유협집단 의종의 일원이면서 지금의 의종 단원들에게 상산창술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동연에게서 의술을 배운 번선의는 의원에서 일하면서 의종의 주치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의종의 단원들도 그녀를 같은 스승을 둔 사매로 대했다.

“젊은 사내놈들 수백 명이 사매라고 싸고도는 여인, 그리고 그 사내놈들의 우두머리 하후란이가 혼인하겠다고 공언한 여인. 그 여인을 내가 이렇게 품는 것이다.”

남의 여자를 빼앗는 재미.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눈살을 찌푸리겠으나, 조백은 자신의 취향이 생각보다 흔한 것이며 언젠가는 이런 취향이 널리 인정받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의종이라는 놈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아서 그동안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지.”

그러나 조백은 결국 해냈다. 흑산적 장연에게 대놓은 줄을 이용해서 번선의를 첩으로 삼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때부터 일은 일사천리였다. 의종 내부에서 단주까지 교체되는 소동이 일어났지만 누가 감히 장연에게 줄을 댄 자신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의종의 새 단주 조운은 번선의를 조백의 첩으로 들였다.

그렇게 혼례식이 끝나고 저녁이 되어 두 사람은 신방에 마주 앉았다.

그래서 번선의는 지금 조백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어르신, 너무 쳐다보지 마세요. 부끄럽습니다.”

번선의의 목소리에는 교태가 전혀 없어서 호족의 첩 같지 않았다. 환자에게 상태를 설명하는 의원의 목소리처럼 무뚝뚝했다. 그러니 조백은 더욱 흥분했다.

내친김에 조백은 최고로 흥분하기 위해 번선의의 남성 편력을 캐기 시작했다. 남의 여자일수록 더욱 흥분되기 때문이었다.

“선의야, 원래 하후란이하고 정혼했던 사이지? 그럼 조자룡이하고는 어떤 사이냐? 듣자 하니 어릴 때는 조자룡이하고 뭔가 있었다고 하던데.”

번선의는 조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후 단주하고 혼사 얘기가 오갔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지금 이렇게 현령 어르신 댁에 와 있으니 의미 없는 얘기지요. 자룡 오라버니는…….”

번선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존경하는 사형입니다. 난세일수록 여인도 무예를 알아야 한다고 저에게 일초 반식을 전수해 주었지요. 그런 마음 씀씀이가 존경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그것뿐인데 주변 사내들은 제가 오라버니를 연모하는 것처럼 말을 꾸며 내더군요.”

한때 조운을 연모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진정현을 떠나 무장으로서 큰일을 해야 할 사람. 이미 그에 대한 마음을 접고 하후란에게 마음을 연 지 오래되었다.

번선의는 마치 자신을 다잡는 것처럼, 조운에게는 애초부터 아무 감정이 없었다고 말했다.

“오호, 그래? 무예를 배웠다? 그럼 어디 한 초를 보여 봐라. 이 방에는 우리 둘만 있지 않느냐?”

“이제 다 잊었습니다. 저는 무사가 아니라 의원으로 살았으니까요. 그보다 어르신,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의원에서 배운 재주로 맥을 짚어 보겠습니다.”

“기특한 것. 오냐, 그리하거라.”

“그러면 이쪽으로 누워 보시지요.”

번선의는 자신의 무릎을 가리키며 조백이 머리를 베고 눕도록 했다.

조백은 벌쭉 웃으며 허벅지 위에 거대한 머리를 대고 누웠다.

조백이 무릎을 베고 눕자 별안간 머리카락에 꽂힌 비녀를 뽑는 번선의다. 비녀가 풀리자 위로 틀어 올린 머리가 흘러내렸다.

“으흠, 감촉 좋고…으응? 무얼 하느냐?”

한참 뒤통수로 다리의 감촉을 만끽하던 조백은 번선의의 흘러내리는 머릿결이 얼굴에 닿자 간지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간지러움이 가시기 전에,

콱!

하는 소리와 함께 번선의가 틀어쥔 비녀가 조백의 목줄기에 박혔다.

“으억! 으윽, 으으으…….”

“이곳이 사혈. 여기를 찌르면 죽습니다.”

번선의는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무릎에 누운 조백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얼굴에 튈 정도로 높이 솟았다. 사혈에 박아 넣은 비녀를 손목에 힘줄이 솟을 만큼 강하게 틀어쥐고 몇 번 휘젓자 튀어 오르는 핏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끄악! 끄아아악!”

“조자룡에게 배웠던 무예를 보여 달라고 하셨지요?”

조백의 괴성을 뒤로 한 채 번선의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자룡 오라버니가 그러더군요. 싸움에서 살아남는 것은 더 힘이 센 자가 아니라 더 대담한 자라고. 그러니 항상 대담하게 행동하라고. 그것이 모든 무예의 정수라고.”

번선의는 피가 튀거나 말거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왼손으로 비녀를 쥔 오른 손목을 잡았다. 체중을 실어 누르자 조백의 목에 꽂힌 비녀가 손가락 한 마디만을 남기고 쑥 들어갔다.

“끄…헉…….”

조백은 그렇게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절명했다.

“그러면 안녕히. 고마웠습니다.”

번선의는 죽은 호족에게 하는 말인지, 무예를 가르쳐준 사형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겼다.

잠시 후 침소의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숨어 있던 의종의 단원들이 조백의 단말마를 듣고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 * *

조백의 저택에 소란이 일자 하인들 몇몇이 관아를 향해 달렸다. 구원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진정현의 관군은 어차피 조백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저택에서 변고가 일어났다는 하인들의 말을 듣자 관군 오백이 조백의 저택을 구원하기 위해 밤길을 달렸다.

그들이 저택 앞에 다다랐을 무렵, 그들을 막아선 것은 의종의 단주 하후란이었다.

“멈춰라. 상산도위 하후란이다.”

하후란은 기주목 원소에게 받은 상산도위의 인수를 내보이며 관군들을 저지했다.

관군들을 이끄는 것은 진정현위였다. 그는 조백에게 돈을 받아먹은 세월이 있으니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지 않았다.

“하후란, 거리의 유협 패거리 주제에 어디서 개수작이냐? 현령 어르신을 해치려고 이제 벼슬까지 사칭해? 이런 짓을 하고서 삼족이 무사할 것 같으냐?”

“관원의 몸으로 더러운 뇌물 부스러기나 먹던 놈들이 말은 잘하는구나. 이 인수가 보이지 않느냐? 내가 바로 기주목이 임명한 상산국 도위니라.”

같은 지방관이라고 하더라도, 상산국의 도위가 당연히 진정현의 현위보다 위에 있었다.

현위는 하후란이 당당하게 나오자 움찔하며 말했다.

“네, 네 이놈, 그렇다고 현령 어르신을 해치는 게 정당화될 성싶으냐?”

“현령 어르신? 아아, 전(前) 현령 말인가?”

하후란은 품속에서 두루마리 족자를 꺼내 펼쳤다.

“기주목의 이름으로 포고한다. 진정현령 조백은 그 패역함이 극에 달해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으니 파면하고 참수한다. 진정현의 현령직은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상산국 도위가 대리한다.”

상산은 장연의 영역이다. 장연은 평난중랑장으로 자기 마음대로 관리를 추천할 수 있다. 원소는 기주목으로서 기주 상산국의 인사에 대해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정의 정식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자칭하고 있는 신세였다. 그러니 장연과 원소가 동시에 관리를 추천하면 조정에서는 장연의 추천을 우선으로 승인할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승인 따위를 누가 신경 쓴다는 말인가?

관리들의 판단 기준은 하나였다. 장연의 세력이 강한가, 원소의 세력이 강한가.

‘하후란, 이놈이 기주목 원소를 뒷배로 삼았구나. 하지만 장연 중랑장의 세력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계산한 현위는 하후란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후란, 원 기주에게 벼슬 좀 받았다고 상산 관리들이 바로 네 밑으로 들어갈 줄 알았더냐? 조 현령의 저택은 장연 어르신의 수하들이 지키고 있다. 흑산적 중에서 가려 뽑은 무사들이 무려 삼백 명이다. 네 수하들이 창술을 조금 한다고 그 무사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하후란은 현위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그야 지켜보면 알겠지. 곧 조백의 저택에 의종의 깃발이 오를 것이다. 깃발을 확인하거든 내 앞에 부복하고 무기를 내려놓거라. 그렇게 하는 자는 죄를 묻지 않겠다.”

“저, 저놈이…….”

몸을 바들바들 떠는 현위를 뒤로 한 채 하후란은 조백의 저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깃발은 아마 저곳에 오르겠군.”

하후란이 손끝으로 저택 정문의 망루를 가리켰다.

현위는 설마 하면서도 하후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현위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망루에서 의종을 상징하는 의(義)자 깃발이 오르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조백의 저택을 호위하기 위해 가려 뽑은 흑산적 무사 삼백 명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들 중 백 명 가까이가 이미 죽어서 시체가 되었다. 남은 이백 명도 저마다 상황이 편치 못했다.

“저놈들은 아귀다, 아귀가 틀림없어.”

“아니야, 저분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이다.”

“어르신! 저는 그저 먹고살기 위해 흑산적이 된 것입니다! 용서하십시오!”

가려 뽑았다는 무사들은 정작 자신의 똥과 오줌은 가리지 못하고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자, 염불을 외는 자, 반쯤 미쳐서 삶을 포기한 자, 땅바닥에 엎드려 비는 자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백 구 가까운 시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세 개의 호상(胡床, 접는 의자)을 놓고 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시신의 가운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었다.

“방 교위, 이렇게까지 많이 죽일 필요는 없었지 않나 싶소. 조금 후회가 되는군.”

“서 사마, 흑산적은 어차피 참수가 답인데 우리가 죽이나 망나니가 죽이나 무슨 차이가 있소?”

“두 분 다 그만두시오. 갈 길이 머니 숨이나 잘 고르시오.”

세 사람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침착하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흑산적들은 경악했다.

“나, 나무아미타불…….”

“으흐흐흑…….”

염불을 외던 자는 고음에서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오줌을 지리던 자는 오줌 줄기가 더욱 강맹해졌다.

흑산적 무사 삼백 명이 기거하는 처소에 단 세 사람이 쳐들어왔을 때는 모두가 코웃음을 쳤었다.

그러나 이들 셋은 삼백 명의 적을 일방적으로 살육하기 시작했다. 셋 다 아무리 봐도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두건을 쓰고 덩치 큰 사내는 양손에 철극을 하나씩 들고 작대기처럼 휘둘렀다. 그의 극이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의 머리가 보리 이삭처럼 떨어졌다.

짧은 수염의 청년은 이민족 양식의 만도(彎刀)를 들고 귀신같은 솜씨로 한칼에 하나씩 사람을 벴다. 그러다가 덩치 큰 사내에게 일하는 속도가 느리다고 타박을 듣고 한 손에는 만도, 한 손에는 장검을 든 채 역시 두 손으로 살육을 벌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질인 것은 잘생긴 청년이었다. 창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화려한 기예를 펼치는데 창으로 허공에 그리는 원이 닿는 곳마다 사람의 팔다리가 떨어져서 하늘을 날았다. 그렇게 흑산적 무사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은 뒤 강하게 진각을 밟으며 찌르기를 날리면 한 번에 너덧 명이 쓰러져 나가기 일쑤였다.

두건을 쓴 서황과 짧은 수염의 방덕은 이 살육의 와중에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방 교위, 아까처럼 꾀부리지 말고 두 손으로 베시오.”

“아니, 꾀부리는 게 아니라 나는 원래 활잡이라 단병접전은 좀 약한데?”

“핑계를 대도 꼭 졸렬한 핑계를 대는군.”

“서 사마, 나보고 졸렬하다고 하지 말고 그렇게 힘이 남아돌면 본인이 솔선수범해서 내 몫까지 좀 하시오. 아직도 칼질을 200번이나 더 해야 하는 거 아니오? 힘들어 죽겠네, 진짜.”

서황과 방덕은 추수하러 온 일꾼들처럼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흑산적이야 몇 명이 오든 개의치 않는 달인들이었지만 수급을 일 인당 백 개나 거두어야 하니 고된 노동인 것은 분명했다.

옆에서 보던 조운이 말했다.

“자, 다 쉬었으면 다시 시작합시다. 아직 많이 남았소.”

시체 더미 속에 의자를 펴고 앉아 있던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이 다가오자 남아 있는 흑산적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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