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8화 (28/306)

28화. 절영을 타면 낙마하지 않아

“우리를 벗으로 여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벗끼리 도움을 받기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공자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하후란이 말하자 마초가 대답했다.

“말했다시피 우리는 여인들을 되찾기 위해 서량에서 기주까지 먼 길을 왔다. 우리 둔영이 있는 농현의 처녀들 일곱 명이 장연의 수중에 있고, 그중의 한 명과 혼례를 올리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지. 혼례 날짜는 지금부터 14일 뒤. 그 전에 처녀들을 장연에게서 구해 내야 하네.”

“그렇군요. 처녀들이 어디 있는지는 아십니까?”

“흑산적들을 심문해서 이곳 상산에 있다는 것까지는 들었다. 그러나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나 또한 의종의 도움이 필요하네. 유협 집단이라면 거리의 소문에 밝을 터이니 장연이 잡아 온 처녀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봐 주게.”

“그리하겠습니다. 정확한 사실은 알아봐야겠지만, 아마 공자께서 찾으시는 처녀들은 조백의 저택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조백의 저택은 이 일대에서 가장 호화로운 곳이면서 장연 사형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기도 합니다.”

“조백? 그게 누구인가?”

“진정현의 현령입니다. 원래 상산의 부패한 호족인데, 흑산적의 군자금을 대면서 현령 자리를 얻었습니다. 장연 사형과는 매우 돈독한 관계입니다.”

“돈독한 관계?”

“그렇습니다. 조백의 아우를 무재로 천거한 게 바로 장연 사형입니다.”

“흑산적이 관리를 천거해?”

장연이 관리의 추천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들을수록 기가 막힌 현실이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나관중이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하후란에게 물었다.

“단주, 그 조백의 아우 이름이 무엇입니까?”

“조범입니다. 나름대로 이 일대에서는 글을 잘한다고 이름이 나 있던 자입니다.”

“여…역시!”

나관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계양태수 조범의 형이 이곳 상산의 호족이었구나. 그렇다면 아까 그 번선의라는 소저가 바로… 조범의 형수 번 씨?’

하지만 아직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있다. 번선의가 조범의 형수가 되려면 조백과 혼인을 해야 하지 않는가?

다시 마초가 끼어들었다.

“만약 처녀들이 그 조백이라는 자의 저택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구하면 되겠나?”

“조백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과 진정현의 병사들을 합치면 천 명이 넘습니다. 그러나 며칠 안으로 저희가 조백의 집에 초청받을 일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때를 틈타는 것이 가장 쉬울 듯합니다.”

“조백의 집에 초청을 받는다? 그럴 수 있다면 일이 쉽게 풀리겠으나, 어찌 호족의 집에 초청을 받겠나?”

“조백이 우리 사매를 첩으로 요구했습니다. 그러니 곧 혼례식이 있을 것입니다.”

하후란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자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만 있던 조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란, 사매란 설마 선의를 말하는 것인가?”

“그래.”

“만약 일이 틀어지면 선의를 조백의 첩으로 들일 생각이었나?”

“자룡,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선의는 너와 정혼한 사이가 아니냐?”

조운과 하후란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의종의 단주다.”

이윽고 하후란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내 어깨에 수백 명 식구들의 명운이 걸려 있다. 의종의 단주는 사욕이 아니라 의종만을 생각하는 것이 원칙이다.”

조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리 알았기에 다행이군. 몰랐으면 둘 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자룡, 선의 또한 동의한 일이다.”

“바보 같은 소리!”

조운의 목소리는 낮지만 단호했다.

“정혼자를 남의 첩으로 내어 주면서까지 무엇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냐? 결국 사형을 버리고 원소에게 붙는 것은 피할 수 없었던 일이군. 여기서 마 공자를 만난 것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자룡…….”

정혼자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의종을 지키려는 하후란의 입장. 의종 전부가 죽더라도 단주와 사매를 지켜야 한다는 조운의 입장. 정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마초의 등장으로 상황이 변했다. 이제 마초를 통해 원소의 힘을 빌려서 단원들과 하후란, 번선의를 동시에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하후 단주, 자네는 나와 함께 업성의 원소에게 가세. 내가 원소를 만나게 해 줄 테니 그 자리에서 원소에게 귀부하도록 하게.”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조자룡, 그대가 해 줄 일이 있네.”

마초가 조운을 돌아봤다. 조운은 마초의 뜻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의종을 이끌고 처녀들의 행방을 수소문해 두겠소. 예상대로 조백의 저택에 처녀들이 있을 경우, 선의를 첩으로 들이기로 하고 혼례식 날짜를 잡을 것이오.”

의종이 다 같이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서일까? 조운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 * *

며칠 후, 조백의 저택.

“그래서, 이제부터 의종의 단주가 바뀌었다?”

“그렇소. 하후란은 달아났소. 이제부터는 나, 조운이 새로운 단주요.”

“가짜 조자룡은 어찌 되었나?”

“잡고 보니 서량의 한수 휘하에 있는 염행이라는 자였소. 죄를 짓고 도망쳐 왔다고 해서 산 채로 잡아 놨는데 하후란이 포박을 풀어주고 같이 달아났소.”

이곳의 후원을 방문한 자는 조운이었다.

장연은 조운에게 따로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자신은 조백과 함께 후원의 정자에 앉고 조운은 그대로 세워 둔 채 응대했다.

“서량의 염행이라, 뭐 좋아. 가 봐야 원소한테나 갔겠지.”

장연에게 중요한 건 가짜 조자룡이 누구인지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들은 버리는 말로 쓸 작정이었다. 진짜 조자룡이 직접 나타나서 이번 일과 관계없다는 것을 증명하기만 하면 충분했다.

‘차라리 잘 됐군. 앞으로 있을 싸움에서는 하후란보다 자룡이 더 쓸모가 있지. 저 녀석도 상산창술의 전인이니까.’

장연은 그보다 다른 곳에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조 단주는 전임 하후 단주에 비해 말이 좀 짧아졌군. 내가 아직도 너희 사형인 줄 아는가?”

“중랑장 어르신이야말로 의종의 단주에 대해 예의를 갖추시오. 우리는 왕망이 천하를 어지럽게 한 때부터 200년간 상산에 큰 난리가 없도록 지켜 왔소. 어르신께서는 지금 관부의 인물이지 않소? 관부와 의종은 서로 불침이라는 점을 잊지 마시오.”

백만 흑산적의 수장 앞에서도 조운은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실제로 의종이 상산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특별한 것이었다. 상산과 지척에 있는 거록에서 장각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을 때도 상산은 전쟁의 참화를 피해 갈 수 있었다. 의종이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대현량사(장각)가 너희들이 무서워서 피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대현량사의 편에 설 때 상산은 건드리지 않는 걸 조건으로 걸었다. 상산을 전쟁에서 구한 건 너희들이 흑산적이라고 멸시하는 나란 말이다.”

“그 일은 계속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장연은 조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건방진 녀석. 그래, 그러니까 네 말은 여기 있는 조 현령이 번선의를 첩으로 요구했고, 하후란은 선의와 정혼한 사이라서 선의를 첩으로 들이기 싫어해서 너희끼리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인가?”

“그렇소. 그러나 사사로운 감정으로 큰일을 결정할 수는 없는 법. 의종의 전통에 따라 비무를 통해 내가 새로운 단주가 되었소.”

“왜 죽이지 않았나?”

“옛정이 있으니 도망쳐서 목숨은 부지하게 하였소.”

“너다운 말이구나. 그런데, 내 기억에 따르면 선의는 어릴 때부터 너를 좋아해서 따라다녔던 것 같은데.”

“벌써 십 년이 가까운 어린 시절 일이오. 하후란이 그녀를 마음에 둔 지 여러 해라고 하오.”

장연은 별안간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릇이 깨지는 듯한 탁한 웃음소리였다.

“자룡, 너답지 않은 말을 하는구나. 항상 원리원칙만 말하던 네가 선의를 조 현령의 첩으로 들이면서까지 세력을 지키겠다고? 친구의 정혼자이자 사매인 선의를?”

“나도 공손 장군 휘하에서 관직 생활을 한 지 오래요. 진흙탕을 구를 만큼 굴러 보았소.”

조운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 시대의 관리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백성을 착취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유명한 공손찬군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공손찬 밑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면 사람이 왜 변했는지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될 터였다.

“곧 길일을 택해 선의를 조 현령의 댁으로 들이도록 하겠소.”

조운이 내뱉듯이 말하자 옆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던 비대한 사내, 조백이 반색하며 조운을 쳐다보았다.

“조 단주, 그게 정말인가?”

조운은 얼굴에 떠오르려는 경멸의 표정을 애써 감추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렇소, 조 현령. 혼례식을 준비하시오.”

장연이 끼어들었다.

“뭐 좋아. 요즘 같은 난세에 상산 대호족의 첩이라면 선의에게도 나쁜 얘기는 아니겠지. 자룡, 곧 원소와의 싸움이 끝나면 이곳 상산은 새로운 시대의 중심이 된다.”

“그게 무슨 소리요?”

장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켠에 놓아둔 창을 꺼내 들었다. 자루까지 철로 된 철창이었다. 창을 든 채로 후원을 거닐던 장연이 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자연석을 깎아 만든 작은 절벽 앞이었다.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다.”

장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절벽에서 세 발짝 떨어져서 섰다. 한 발을 내디디며 창을 찌르면 닿는 거리였다.

“그러니 하북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썩어 빠진 한의 왕후장상들을 전부 죽일 것이다. 유씨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땅을 범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 상산 땅에 새로운 나라의 도읍을 건설할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장연은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강맹하게 진각을 밟으며 절벽을 향해 창을 찔러 갔다. 장연이 두 발을 딛은 곳은 땅이 움푹 패였다. 장연의 창은 제자리에서 핑그르르 회전하며 최단 거리로 절벽을 향해 날아갔다.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 절벽이 부서져 나갔다. 창이 닿은 곳을 중심으로 사람 한 명 크기의 원이 움푹 패여서 장연의 한 수가 얼마나 강맹했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절벽에 창흔을 새긴다는 뜻의 상산창술 절기, 애각(崖刻)이었다.

장연은 다시 정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 한 수로 절벽이 부서지는 것을 본 조백은 입을 쩍 벌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반면 조운은 초연했다. 그 또한 상산창술의 전인이니 절기 애각을 전수받았으리라.

장연은 철창을 가로로 뉘어 잡고 조운 쪽으로 던졌다.

척.

조운은 왼손을 뻗어 날아오는 철창의 중간을 잡고 받아냈다.

“자룡, 이제 곧 원소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 창을 들고 의종을 이끌어 선봉에 서라. 원소는 우리보다 우세한 기병 전력을 앞세워서 진격해 올 것이다. 의종은 상산창술의 전인이 이끌면 강력한 기병대가 된다. 네가 선봉에 서서 원소의 예봉을 꺾어라.”

“그리하겠소이다.”

조운은 짧은 대답을 남기고 조백의 저택을 나왔다.

“후우.”

조운은 짧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방금 나온 조백의 저택을 올려다봤다.

‘기다려라, 조백. 네놈의 혼례식을 피로 물들여 주마.’

자응과 자상이 단원들을 풀자 빠르게 정보가 들어왔다. 얼마 전부터 타지 처녀 예닐곱 명이 조백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초가 찾는 농현의 처녀들이 분명했다.

번선의와 조백의 혼례식이 있는 그 날, 의종과 마가군이 이 저택을 들이쳐서 처녀들을 구해 낼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혼란한 마음을 떨쳐버린 조운은 이내 다른 쪽에 생각이 미쳤다.

‘마 공자가 잘 해내야 할 텐데…….’

원소를 만나러 간 마초를 떠올린 것이다.

* * *

그 무렵, 마초와 나관중, 하후란은 원소의 근거지 업성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마초가 타고 있는 말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흑갈색 털에 금빛 갈기를 한 거대한 말이었다.

“과연 천하의 명마로구나!”

마초는 말에 올라탄 채 연신 감탄했다.

“장군, 말이 마음에 드십니까?”

나관중이 마초의 옆으로 와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물었다.

“그래, 꼭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움직여 주는 영특한 말이군. 나도 수없이 많은 준마들을 타 봤지만 이렇게 영리한 말은 처음이야. 이걸 타면 전쟁터에서도 낙마할 일이 없겠는걸?”

마초는 새 장난감을 손에 넣은 어린애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의종과 마가군이 비무했을 때 각자 조건을 걸었다. 의종이 이기면 마초가 얌전히 하후란과 함께 장연에게로 가고, 마가군이 이기면 마초가 찍는 말을 한 마리 내어 주기로 했었다.

지금 마초가 타고 있는 말이 바로 의종이 데리고 있던 명마, 절영(絶影)이었다.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닌가 보군요. 그런데 비장군, 하후 단주는 본래 이 말을 연주목 조조에게 팔 작정이었다고 했었죠?”

“그래. 조조가 명마를 좋아하니 천금을 지불하고 이 말을 사려 했겠지. 내가 지난 생에서 만나 본 조조도 항상 아주 좋은 말을 타고 있었다.”

마초는 과거에 조조를 두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포판진에서 황하를 건너는 조조군을 기습해서 조조를 거의 죽일 뻔했었다. 이후에는 한수와 함께 조조와 말 위에서 회담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그때 조조가 타고 있던 말도 좋은 말이었지만 분명히 절영은 아니었다고.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절영은 조조의 것이 되었을 텐데.”

나관중이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조조가 완성에서 장수를 쳤을 때 야습을 받아서 탈출한 적이 있죠?”

“그래. 과부가 된 장수의 숙모하고 간통하니까 장수가 화가 나서 야습을 했다고 들었지.”

“그때 조조가 대완(大宛,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의 명마를 타고 탈출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 탔던 말이 이 절영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조도 몸에 화살을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아마 말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흠, 그렇다면 이 절영이 아마도 조조의 목숨을 구했던 말이겠군. 유부녀 간통범의 목숨도 구해 줬으니 아마 내 목숨도 구해 주겠지?”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나관중은 잠시 간통이 나쁜지 패륜이 나쁜지 생각했으나 결론을 내지 않고 그만두었다. 어차피 말이 주인의 도덕성을 가려가며 목숨을 구할 리는 없지 않은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