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무를 통해 벗을 만나다
하후란은 수하들을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싸움은 끝났다. 우리 의종이 졌으니 약속대로 창을 놓고 싸움을 그치도록 한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는 여기 마 공자와 내가 직접 이야기하겠다.”
의종의 단원들은 저마다 표정과 작은 몸짓으로 안타까움과 분함을 표출했지만, 그 이상의 선을 넘는 자는 없었다. 비록 싸움에 졌지만, 단주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인 모양이었다.
마초도 마가군 병사들을 돌아보며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코와 입에서 계속 피가 흘러서 말을 하기 어려웠다. 그 모습을 본 방덕이 나서서 마가군 병사들을 단속했다.
“이제 싸움이 끝났으니 우리도 적대를 멈춘다. 우리는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인 것이 아니라 힘을 겨루었을 뿐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전군은 편히 쉬되 여기 의종의 단원들에게 예의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
하후란은 마초와 방덕을 보며 군례를 올려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배려에 감사드리오. 권장으로 겨루었지만 비무에 참여한 무사들의 몸이 상했으니 일단 치료를 하는 게 좋을 듯싶소. 별채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여전히 대답하기 힘든 마초를 대신해서 방덕이 군례로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마초 일행은 하후란이 이끄는 대로 마방 한켠에 딸린 별채로 이동했다. 의종에서는 하후란을 비롯해서 비무에 참여한 조운, 자응, 자상이 함께 했다.
“잠시 상처를 치료할 사람들을 들게 하겠소.”
하후란이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뭔가 지시하자 잠시 후, 세 사람의 여인이 들어왔다.
그중 가운데 있는 여인이 말했다.
“단주, 부르셨습니까?”
“오늘 서량 마가군의 호걸들과 비무가 있었다. 자응과 자상이 상처를 입었으니 살펴보도록 하라. 이분은 마가군의 수장 마초 공자이신데, 자룡의 권장을 여러 번 받아내셨으니 내상이 있을 것이다. 선의 그대가 각별하게 살피고 잘 치료해 드리도록 하라.”
“그리하겠습니다.”
양옆에 있는 두 여인이 자응과 자상의 상처를 살폈지만, 그들에게는 큰 외상이 없었다. 일격에 쓰러졌기 때문이다. 가운데 있는 여인은 마초의 곁으로 다가와서 세심하게 상처를 살피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마초의 얼굴은 엉망이 돼 있었다. 조운에게 실컷 두들겨 맞은 얼굴은 시간이 지나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몸통도 어지간히 많이 맞아서 몸 움직임도 불편해 보였다. 패배를 인정한 조운이 멀쩡한 모습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여인은 마초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말했다.
“번선의라고 합니다. 잠시 공자의 상처를 살피겠습니다.”
“이래서는 마치 내가 참패한 것 같군. 번 소저께서 상처를 치료해 주겠다는 건 고마운데 비무에서는 내가 이겼다는 걸 잊지 마시오.”
“그렇군요.”
번선의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여인은 무슨 헛소리냐는 듯이 마초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상처 치료에만 집중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누가 봐도 조운이 이기고 마초가 진 것처럼 보이리라.
남녀가 유별한 시대다. 하후란은 마초가 여인의 손길이 닿는 것에 불편해하지 않도록 여인들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공자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시고 치료하도록 맡기십시오. 우리 의종 전체의 사부이신 동연 노사께서는 창술의 달인이면서 또한 의원이시기도 합니다. 이들은 여인의 몸이라 창술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사부님께 의술을 배웠으니 우리 의종의 동문 사매나 다름없습니다. 의원으로서의 솜씨는 뛰어난 사매들이니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참아 주십시오.”
“걱정하지 말게. 나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으니까.”
마초는 그렇게 대꾸하고 가만히 누워서 번선의가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몸을 맡겼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젊은 청년으로만 보이겠지만, 사실 마초는 온갖 풍파를 다 겪은 중년 남자의 정신을 갖고 있었다. 청년이라면 또래의 젊은 여인의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 긴장될 수 있었겠지만, 마초는 달랐다.
‘치료는 제대로 하는 것 같군. 그나저나 늙으니 아무 감흥이 없는걸.’
치료를 받는 마초 본인은 여인의 손이 닿거나 말거나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관중을 비롯한 마초의 일행들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옷자락 안으로 언뜻 드러나는 번선의의 몸 선이 너무나도 육감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관중과 월길은 뭔가에 홀린 듯 번선의의 허리와 엉덩이와 허벅지로 이어지는 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으음…….”
나관중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자 월길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마궁수 선생, 조용히 좀 하세요. 우리가 훔쳐보는 게 티가 나잖아요.’
‘미, 미안합니다.’
육감적인 몸매의 번선의는 그런 사내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치료를 마치고 일어났다.
“끝났습니다. 뼈가 부러진 곳은 없으나, 내상이 있을 수 있으니 며칠간은 자리에 누워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며칠간 누워 있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노력은 해 보겠소.”
마초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뒤이어 하후란이 번선의를 치하했다.
“선의, 고생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번선의는 하후란의 치하를 받고 겸양의 말을 남긴 후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는 조운을 흘긋 쳐다보고는 이내 몸을 돌려서 별채 밖으로 나갔다. 조운은 번선의 쪽을 보지 않은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관중은 문득 뭔가가 떠올라서 마초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비장군, 저 소저의 이름이 번선의라고 하였지요?”
“그랬지. 그게 왜?”
“번 씨라면 혹시… 저 소저가 조범의 형수 아닐까요?”
“조범? 그게 누구야? 조범의 형수는 또 누구고?”
마초는 조범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조범은 유비가 형주에 있던 시기에 항복했던 자이니 마초와는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관중은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조범은 건안 연간에 형주 계양군의 태수였던 자입니다. 적벽대전 이후, 유비군에 항복했는데, 당시에 조자룡에게 과부가 된 자신의 형수 번 씨와의 혼사를 주선하다가 거절당했다는 얘기가 기록에 남아 있지요.”
“흠, 그래? 그냥 우연이겠지. 중원에 번 씨가 한두 명도 아니고, 여기 상산에서 계양까지는 엄청나게 먼 거리라고.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자룡은 애초에 여색에는 관심이 없는 자라서 굳이 무리해서 첩을 들였을 것 같지도 않아. 항복한 태수의 형수를 취하는 건 모양새가 좀 그렇잖아? 자룡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내가 아니야.”
“하긴 그것도 그렇겠군요.”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사이 하후란이 입을 열었다.
“공자의 상처 치료가 끝났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합시다. 정당한 비무에서 그대들이 승리했으니 우리는 그대들의 거취에 대해 뭐라 할 명분이 없소. 이제부터 어쩌실 셈이오?”
방덕과 서황, 월길, 나관중이 전부 마초를 쳐다봤다.
그들 또한 의문이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마초는 뭔가 자신이 있는 표정이었다.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마초는 일행들에게 눈짓을 해서 안심시킨 후, 하후란을 보며 말했다.
“하후 단주, 그 전에 내가 먼저 물어보겠네. 논어에 이르기를 글로써 벗을 만나고, 벗으로서 어질게 되도록 도우라(이문회우以文會友, 이우보인以友輔仁)고 하였다. 이는 비단 문사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치는 아닐 것이다. 나 또한 그대들 의종처럼 문이 아니라 무의 세계에 사는 사람으로, 무로써 벗을 만나고 벗으로서 의롭게 되도록 돕는 것(이무회우以武會友, 이우보의以友輔義)을 추구하면서 사는 무사다. 오늘 이렇게 무를 통해서 벗을 만났으니, 서로가 의롭게 되도록 도울 수 있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나? 지금 의종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 주게.”
마초가 문자를 쓰자 일행은 모두 놀라서 마초를 쳐다보았다. 다들 마초가 문자를 쓰는 걸 처음 본 것이다.
놀라서 묻는 월길.
“논어가 공자님 말씀이죠? 논어에 진짜 그런 말이 있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서황.
“…논어 안연편에 이문회우 이우보인이라는 말이 틀림없이 있소.”
서황을 보며 농담을 던지는 방덕.
“오, 과연 서 사마는 현위 출신이라 뭔가 다르군.”
“방 교위, 논어 정도를 읽는 것과 현위 출신인 게 무슨 상관이 있소? 명문세가에서는 열 살짜리가 논어를 암송하고 다니기도 하지 않소?”
“논어를 암송할 정도면 서량에서는 고학력자요. 그럼 이무회우 이우보의는 맹기가 만들어 낸 말인가?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그럴싸한데?”
그리고 빙글빙글 웃는 방덕을 뒤로 한 채 마초에게 묻는 나관중.
“비장군, 그런 근사한 말은 언제 배우셨습니까?”
이렇게 네 사람이 한마디씩 하자 마초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배우긴 뭘 배워? 그럼 내가 의랑까지 지낸 양진 선생에게 사사했는데 그까짓 논어를 모를까 봐?”
마등은 마초를 고학력자로 만들고 싶어 했지만, 마초의 학문은 영 시원치 않아서 논어조차 더듬더듬 외우는 수준에 불과했다.
‘무를 통해 벗을 만나고 벗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말은 사실 출처가 따로 있었다. 마초가 회귀 전, 촉한의 연회 석상에서 우연히 조운이 읊조리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때 상당히 멋진 말이라고 생각해서 기억해 두길 잘했군. 이런 식으로 써먹을 줄이야. 저 녀석이 좋아하는 말이니 저 녀석도 감동 받겠지?’
마초는 조운과 하후란 쪽을 슬쩍 훔쳐보았다.
조운과 하후란, 자응과 자상까지 모두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라, 반응이 기대 이상인데?’
“공자, 그것은…….”
하후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200년 전부터 내려온 우리 의종의 창립 이념입니다.”
‘역시 그랬군. 그래서 조자룡이가 이런 말을 외우고 다니는 거였어.’
마초도 대강 짐작했던 바였다. 그러나 짐짓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런가? 진정으로 의를 좇는 무사라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의종의 역사가 200년이나 되는가?”
“그렇습니다. 공자께서 이처럼 의기를 갖고 계시니 말이 통할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종의 기원에 대해 하후란이 들려주는 얘기는 이랬다.
* * *
의종은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전한이 멸망한 직후 생겼다.
역적 왕망이 국호를 신나라라고 바꾸고 천자를 참칭하고 있었던 시기의 일이다. 당시 상산 일대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 창술에 능한 한 협객을 중심으로 지역의 청년들이 조직된 자경단이 바로 의종, 의를 좇는다는 뜻의 유협 집단이다. 광무제에 의해 천하가 안정되어 가자 의종은 광무제에게 귀부하였으나, 나중에 다시 한번 난세가 도래하더라도 고향 상산을 지키기 위해 대를 이어서 의종을 유지하며 실력을 쌓기로 하였다.
의종의 힘은 자금줄이 되어 줄 말 장사와 무력이 되어 줄 상산창술 두 가지에서 나왔다. 지역의 청년들이 이 두 가지를 대물림하며 유협집단 의종을 유지해 왔고, 그 결과 상산에서만은 호족의 횡포나 지방관의 수탈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우리가 수련하는 상산창술 덕분입니다. 상산창술을 수련하면 평범한 청년은 무사가 되고, 무사는 전장을 주름잡는 선봉장이 될 수 있지요.”
하후란은 그렇게 말했다. 마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만들어진 무공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만약 원래부터 선봉장의 자질을 갖춘 자가 수련한다면?”
“그런 자라면 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전인이 되면 혼자서 천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일기당천의 강자가 됩니다.”
“그렇군. 상산창술의 전인은 지금 몇 명이나 되나?”
“두 명입니다. 한 명은 저쪽에 있는 조자룡.”
하후란은 한쪽 벽에 팔짱을 끼고 기대 있는 조운을 가리켰다.
“음, 조자룡의 실력은 내가 방금 확인했지.”
마초는 퉁퉁 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명은 평난중랑장 장연입니다. 저와 자룡에게는 사형이 됩니다.”
“그래? 장연도 상산창술의 전인인가?”
흑산적의 대두령 장연이 조운과 같은 상산창술의 전인이라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마등의 둔영에서 상산까지는 천 리가 넘는 길이다. 마초가 양하원을 되찾기 위해 이토록 먼 길을 단시간에 주파하면서도 위험하지 않았던 이유는 개인의 무력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중간중간 흑산적의 영채를 습격해 가면서 보급을 해결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장연이란 놈이 일기당천의 무예를 가지고 있다면 막무가내로 쳐들어가서는 쉽지 않겠군.’
잠시 인상을 쓰고 생각에 잠겼던 마초는 이내 하후란을 돌아보며 말을 잇도록 했다.
“우리 의종은 그렇게 상산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9년 전부터 상황이 변하게 되었지요.”
“9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당시 의종의 단주는 장연 사형이었습니다. 무공이 뛰어나고 의협심이 높아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를 의협으로 살게 내버려 두지 않았지요.”
하후란은 담담한 어조로 장연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