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상산의 의종
후한 13주 중 중국 대륙의 북동쪽에 위치한 유주, 기주, 청주를 통틀어 하북(河北)이라고 부른다. 황하의 북쪽 지방이라는 뜻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등의 강국들이 이 지역을 기반으로 패권을 다투었다.
동탁의 폭정으로 조정의 권위가 무너진 후 이 지역에는 수많은 군웅들과 이민족들이 난립했으나, 후한 초평 4년(193년)에 이르러서는 두 개의 큰 세력이 각축하고 있었다. 유주의 공손찬과 기주의 원소였다.
공손찬은 192년의 계교 전투에서 원소에게 패한 후 외교를 통한 세력 확장을 꾀한다. 그가 선택한 동맹 세력은 병주 동부를 기반으로 기주 서부에 걸쳐서 세력을 가지고 있는 흑산적의 대두령, 장연이었다.
이곳, 기주 상산국 북쪽에 있는 진정현이라는 고을이 대표적으로 그런 장연의 세력권이었다.
진정현의 현령은 조백이라는 지역 호족이었다. 따로 조정에서 임명한 현령이 있었으나 흑산적들의 손에 죽은 지 오래다. 조백은 본래 진정현의 유력한 호족으로, 장연에게 줄을 대서 현령직을 겸하고 있었다.
조백은 현령이 되었지만, 따로 관아에 등청하지 않고 호화롭게 꾸며진 그의 저택에서 밤낮없이 환락만을 즐겼다. 정무가 너무 밀려서 처리해야 할 때가 되면 현의 관리들을 저택으로 불러들여서 날림으로 일을 처리하고 다시 환락에 몰두했다. 지방관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었으나 장연의 비호를 받고 있는 한 그런 그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백의 저택 안으로 한 청년이 들어왔다. 단정한 차림새를 한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키는 크지 않았으나 탄탄한 체격과 힘 있는 걸음걸이가 무예를 익힌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청년은 가노의 안내를 받아 조백이 기다리는 후원으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대인?”
청년이 후원에서 양옆에 기녀들을 끼고 앉아 있는 거구의 사내에게 말했다. 진정현령 조백이었다.
길에서는 피골이 상접한 평민들을 흔히 볼 수 있는 난세였지만 향락에 몰두한 조백의 몸은 비대하게 부풀어 있어 500근(약 130kg)을 넘을 듯 보였다.
“하후란이, 수하들이 떠받들어 주니까 아주 건방져졌어? 현령이 부르면 빨리빨리 좀 들어와라. 꾸물거리지 말고.”
하후란이라고 불린 청년은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왜 불렀는고 하니, 너희 의종(義從) 놈들이 또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닌 것이 아닌가 싶어서 그렇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최근 병주에서 장연 중랑장의 휘하에 있는 소두령들의 산채가 네 곳이나 털렸다. 그런데 네 곳 다 같은 놈들의 소행인 듯싶단 말이야.”
“산채 네 곳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병력이 삼사천은 있어야 할 텐데요. 흉노의 짓입니까?”
“살아남은 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고작 사오백 기의 기병대라고 하더군. 그런데 말이야, 그놈들이 스스로 너희 단원 이름을 대면서 분탕질을 치고 다녔다는 말이야.”
“그놈들이 저희 의종의 일원이라는 말입니까? 대인,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의종을 소집할 수 있는 건 단주인 저뿐이고, 아시다시피 저는 지난 몇 달간 상산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좋아, 다 좋은데 그놈들 스스로 너희 단원이라고 자칭했다니까?”
“단원 누구를 말입니까?”
조백과 하후란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후원 한쪽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스스로 자기 이름이 조자룡이라고 했다더군.”
남들보다 키가 작은 사내는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산적의 대두령, 평난중랑장 장연이었다.
장연을 본 하후란이 군례를 취했다.
“하후란이 중랑장 어르신을 뵙습니다.”
“예의는 됐다. 하후란, 어떻게 생각하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룡은 공손 장군 휘하에 있다가 형님의 상을 치르기 위해 혼자서 상산으로 돌아온 지 불과 열흘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말이야, 그렇다면 내 휘하의 산채들을 털고 부하들을 죽인 건 대체 누구지?”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하후란, 내 말이 무슨 뜻이냐면 말이다.”
장연이 하후란의 옆으로 다가와서 얼굴을 바싹 붙였다. 하후란은 옆에 서 있는 장연을 무시하고 묵묵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종을 풀어서 놈들을 찾아내라. 이 상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의종의 눈과 귀를 피할 수 없으니까.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아낸 후, 네 말대로 그놈이 가짜라면 가짜 조자룡의 목을 들고 와서 누명을 벗어라.”
“알겠습니다. 가짜의 목은 반드시 들고 오겠습니다. 누명이라고 하셨지만, 중랑장 어르신께서도 우리 의종이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왜냐면 당신이 바로 선대의 단주였으니까.
하후란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장연은 이제 유협집단 의종의 단주가 아니라 백만 흑산적의 대두령이었다. 그리고 하후란이 이끄는 의종은 장연에게 충성의 맹약을 하고 있었다.
“한 가지 단서를 주마. 그놈들 사이에 강족들이 껴 있다는 증언이 있다.”
“그렇다면 강족들이 많이 사는 서량이나 관중에서 온 놈들이겠군요. 아마도 이각이나 곽사의 휘하 부대가 모종의 이유로 이탈하여 이곳까지 흘러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듣기로 이각과 곽사의 휘하에는 강족과 선비족 부대가 많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지. 그렇다면 먼 길을 와서 말이 지치고 상했을 것이니, 곧 마방에 들를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방에 기별을 넣어 두겠습니다. 강족이 껴 있다면 더더욱 저희와는 무관한 것을 중랑장 어르신께서도 알아주십시오.”
“란아.”
장연이 쓴웃음을 지으며 하후란을 예전에 부르던 호칭으로 불렀다.
장연이 의종의 단주이던 시절 하후란은 의종의 신입 단원이었다. 그리고 같은 스승 밑에서 무예를 배운 사형제이기도 했다.
“너는 예나 지금이나 눈치가 없구나. 그놈들의 입에서 조자룡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너희와 무관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네 말대로 그놈들이 이각, 곽사의 수하라고 치자. 그렇다면 어떻게 자룡의 이름을 알고 있겠느냐? 자룡이 공손찬 휘하에서 몇 개의 전투에서 활약했다고 그 이름이 장안까지 알려지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그것은…….”
“자룡은 형의 상을 치른다고 상산에 돌아와 놓고 나에게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놈이 며칠간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내가 무슨 수로 알겠느냐? 그래, 너와 나와 자룡이 다 같은 의종의 일원이었던 것도 맞고, 같은 스승님 밑에서 창술을 배운 사형제인 것도 맞다. 그런데 지금은 각자의 처지가 다르다. 자룡을 자칭하는 놈이 내 부하들을 도륙하고 다니는데, 내가 동문 사제라고 자룡을 감싸면 우두머리로서 영이 서겠느냐?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남들 보기에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말이다.”
하후란은 장연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곧 기주목 원소와 한판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 시국에 후방에서 어떤 놈이 내 동문 사제라고 자칭하면서 내 부하들을 죽이고 다니는데 내가 뜨뜻미지근하게 대처할 수가 없다.”
“중랑장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앞으로 열흘을 주겠다. 열흘 안에 그놈을 찾아서 목을 가져와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자룡을 잡아다 물고를 낼 수밖에 없다.”
“그리하겠습니다.”
하후란의 머릿속으로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보름 후에는 나의 혼례가 있다. 그 전에 이 일을 마칠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무엇입니까?”
“여기 조 현령이 따로 너에게 용건이 있다는군. 조 현령의 말을 들어 보고 어지간하면 시키는 대로 해라.”
장연은 그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하후란은 장연의 뒷모습을 향해 머리를 깊이 숙였다.
장연이 떠난 후, 하후란은 실실 웃고 있는 조백을 향해 눈을 돌렸다.
“대인, 용건이 무엇입니까?”
“그게 말이다. 너희 패거리 중에 번씨 성 쓰는 계집이 있지? 내가 그 계집을 첩으로 좀 들이려는데 말이다.”
하후란의 얼굴이 구겨졌다. 조백의 저택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표정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 * *
마초 일행은 양주 천수군을 출발해서 병주를 가로질러 기주의 접경까지 이동했다.
천하에서 고속 행군에 가장 능하다는 마가군 기병대이다. 그러나 익숙지 않은 길에서, 중간에 흑산적 영채를 털어 가며 3천 리(약 1,0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했으니 후유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덕이 말을 점검해 보니 적지 않은 말이 상해 있었다.
“맹기, 이제 예비마가 남아 있지 않다. 이래서는 처녀들을 구해 낸다고 해도 농현으로 돌아가는 길이 험난할 것이다.”
마초 일행은 행군의 속도를 위해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비마가 없으면 말에 문제가 생긴 병사는 보병이 되어 전체 속도가 느려진다. 미리 예비마를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월길도 한마디 거들었다.
“말들이 건초를 먹은 지 오래된 것도 문제에요. 우리 강족 말들이야 원래 야생 풀을 뜯어 먹고 자라지만, 한족들이 키우는 말은 건초를 먹여서 키웠으니 계속 야생 풀만 먹으면 배탈이 납니다. 미리 건초를 배불리 먹여 둬야 쌩쌩하게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의 말에 전부 일리가 있었다. 마초는 서황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먼저 가까운 마방에 들러 말과 건초를 사들여야겠군. 서황, 근처에 마방이 있는가?”
서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산을 따라 내려가면 기주 상산국입니다. 정찰을 해 보니 상산에서는 좋은 말이 많이 나서 지역 청년들이 대를 이어 가며 말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상산국에 큰 마방이 있으니 건초와 말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좋아, 그곳에 먼저 들르도록 하세.”
마초는 50여 기를 이끌고 마방에서 보급을 하기 위해 산을 내려갔다. 방덕, 서황, 월길, 나관중도 함께였다.
“월길, 너는 강족이라 눈에 띄니까 웬만하면 가만히 있지, 그래?”
“무슨 말씀을? 이 먼 기주까지 왔는데 하나라도 더 구경하고 가야지요.”
월길은 한족 말을 능숙하게 구사할 정도로 호기심이 많은 자였다. 꼭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마초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서황의 말처럼 마방은 상당히 규모가 컸다. 마초 일행이 들어서자 열두어 살 정도로 보이는 동자가 차를 먼저 내왔다.
“좋은 말 삼십 필과 건초 오백 근을 사야겠다. 이곳에서 준비가 되겠느냐?”
“아이구, 그렇게나 많이요? 알겠습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어르신을 불러오겠습니다.”
동자는 붙임성 있게 말을 건네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동자는 강족의 복식을 한 월길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보고 갔지만 일행은 눈치채지 못했다.
마초는 원래 천하에 이름을 날린 기병대장이었다. 먼 기주까지 와서 말을 사기 위해 마방에 들렀으니 어떤 말들이 있는지 호기심을 떨치기 어려웠다. 마초는 마방의 말들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말이라면 서북쪽 서량과 병주의 말을 최고로 치지. 동북쪽 유주와 기주의 말은 그다음이고. 그런데 이 마방에 있는 말들은 하나같이 서량의 말에 뒤지지 않는 명마로군.”
마초는 방덕을 돌아보며 말했다. 방덕도 이 상산국의 마방에 감탄하고 있었다.
“체격들이 상당히 좋아 보이는군. 좋은 종마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제대로 먹이면서 키운 말들이다. 이 마방의 일꾼들은 분명히 말을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이야.”
“그래, 내 생각도 같다.”
마초는 방덕과 이야기를 주고받다 어느 한 마리 말 앞에 멈춰 섰다.
마초의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준마가 있었다. 다른 말보다 덩치가 큰 흑갈색의 말이었다. 미끈하지만 단단하게 근육이 올라서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힘이 느껴졌다. 길고 풍성한 갈기는 금빛이었다.
“대단한 준마로군. 기주에 이런 좋은 말이 있었다니.”
말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다. 최고의 말이라고 평가하는 명마들도 서역, 즉 중앙아시아에서 나온다. 한나라에서는 이러한 명마들을 대완국(우즈베키스탄) 일대에서 나온다고 대완마, 쉬이 지치지 않고 체온 조절이 용이하다고 한혈마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서량의 마등은 서역의 명마를 구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끊임없이 준마를 사들이고 그 준마의 종자를 받아서 말의 품종을 개량한다. 그렇게 개량한 말을 서량의 넓은 목초지에서 야전에 적합한 군마로 키운다. 그러다 보니 마등의 부하들은 하나같이 좋은 말을 보유하고 기마에 능할 수밖에 없었다. 마초는 그중에서도 발군이었다.
그런 마초가 보기에도 이 금빛 갈기의 흑갈색 말은 대단한 명마였다. 지금 타는 말도 마등에게 빌려 온 서역의 준마였지만 이 말은 그보다도 등급이 높은 대단한 명마였다. 말을 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을 냈을 것이다.
마초가 말을 유심히 보자 방덕이 물었다.
“맹기, 그 말을 살 텐가?”
“그건 안 되겠어. 이 정도 말이면 부르는 게 값이다. 우리가 가진 재물로는 턱도 없어. 나도 명마를 갖고는 싶지만, 이번은 때가 아니다.”
원래 민가에서 군량을 징발할 때 대금으로 쓰려고 했던 재물은 쓰지 않고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흑산적을 털어서 군량을 충당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흑산적 영채를 털면서 챙긴 재물까지 합치면 적지 않았다.
문제는 이 말이 너무 뛰어난 명마라는 것이다.
‘천하를 다 뒤져도 이만한 말은 다섯 마리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천하제일 명마일지도 모르겠군.’
그러니 하북의 군웅이나 대호족 정도가 아니라면 탐내지 못할 정도의 가격표가 붙어 있을 것이다.
일행이 말 구경을 하는 사이 동자가 어르신을 모시고 도착했다.
마방을 통솔하는 어르신이라는 자는 겨우 이십 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선비의 의관을 단정하게 갖추고 있었지만, 그 안으로 언뜻 드러나는 탄탄한 몸은 그가 단순히 옷 잘 입는 상인이 아님을 말해 주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소인이 이 마방의 주인 하후란이라고 합니다. 좋은 말 삼십 필과 건초 오백 근이 필요하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우리가 말을 좀 볼 줄 아는데, 대강 둘러보니 이 마방의 말들은 죄다 상등마로군.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은 길게 하지 않겠으니 주인장이 적당히 삼십 필을 골라 주시오.”
하후란은 마초를 바라보며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척 주변을 훑어보았다. 강족의 복식을 한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후란은 강족이 동행하는 것을 보자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겨서 눈앞의 이 남자를 떠보기로 했다.
“과연 안목이 출중하시군요, 조자룡 장군.”
말 상인의 입에서 뜬금없이 조자룡의 이름이 나오자 마초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마초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자 하후란은 지체없이 외쳤다.
“의종!”
구령이 떨어지자 마방의 일꾼들은 하던 일을 내려놓고 바닥에서, 벽장에서 창을 꺼내서 저마다 한 자루씩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백여 자루의 창이 마초 일행에게 겨누어졌다. 하후란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자, 이제 정체를 밝혀라, 가짜 조자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