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1화 (21/306)

21화. 내가 바로 상산의 조자룡이다

마초 일행의 가까이에 천여 명이 지키고 있는 흑산적 영채가 있었다. 마초는 그곳을 털기로 하고, 본대를 대기시킨 후 삼십여 기만을 이끌고 영채에 접근했다.

마초 일행이 접근하자 영채를 지키는 초병들이 막아섰다.

“네 이놈, 상산의 조자룡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하였느냐!”

마초는 눈앞에 있는 흑산적 졸병에게 다짜고짜 호통부터 쳤다.

“상산의 조자룡이 누구요?”

“네 이노오옴, 감히 나를 몰라보다니!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성은 조, 이름은 운, 자는 자룡이라고 하며 공손찬 장군의 막하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몸이시다! 네놈도 흑산의 무리라면 지금 흑산 대두령 장연 장군과 공손찬 장군이 힘을 합쳐서 원소와 싸우고 있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런데 감히 공손찬 장군께서 가장 신뢰하시는 이 조자룡을 박대할 셈이냐! 어서 가서 두령께 이르거라. 상산의 조자룡이 왔다고!”

마초가 너무나도 당당하게 외쳤기 때문에 흑산적 졸병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알았소, 그럼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내 들어가서 확인을 좀 해 보고 나오겠소.”

졸병이 영채 안으로 사라지자 나관중은 그제서야 뒷목을 잡았다.

“비장군, 다짜고짜 호통부터 치면 어찌합니까?”

“음, 역시 좀 어색했나?”

“좀이 아니라 많이 어색한데요?”

“어색해도 속아 주기만 하면 그만이지. 내가 일전에 연회 자리에서 듣기로 자룡은 공손찬 휘하에서부터 이름을 크게 날려서 상산의 소년 장수하면 일대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군. 정확히 조운이라는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공손찬 휘하에 영준한 젊은 장수가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을 거야.”

“그렇군요. 조운 장군에게 직접 들은 것입니까?”

“아니, 자룡은 워낙 재미없는 녀석이라 술자리에서도 말이 없었어. 나는 장익덕에게 들었는데… 가만, 그렇다면…….”

“어쩌면 술자리 허풍일 수도 있겠네요?”

“…설마 아니겠지. 일단 아니라고 믿어 보자고.”

나관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냥 방 교위에게 맡기는 게 나을 뻔했습니다. 방 교위는 능청스럽게 연기를 잘 하지 않습니까?”

“그건 안 돼. 저렇게 겉늙은 조자룡이 어딨어? 조자룡 역할을 하려면 나 같은 미남자가 해야지.”

“그야 비장군의 용모가 조자룡 장군과 비슷하기는 하겠지만…….”

나관중은 방덕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방덕은 팔짱을 끼고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대단한 미남 나셨군. 그 조자룡이라는 자가 맹기 네가 꿈에서 같이 싸웠다는 동료인가?”

“그래, 싸움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녀석이야.”

일행이 그렇게 조운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영채 안에서 흑산적 졸병이 다시 나왔다.

“조자룡 장군, 두령께서 안으로 드시랍니다.”

“알았다.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라고.”

마초는 나관중과 방덕을 돌아보며 눈짓을 보냈다. 서황만 마초의 뒤를 따랐다.

영채는 목책을 세워 만든 담장 안에 작은 요새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제법 높은 망루가 곳곳에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삼삼오오 모여 있는 흑산적들이 고개를 돌려 마초와 서황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정규군처럼 보이는 갑옷을 잘 차려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초와 서황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걸었다.

‘생각보다 숫자가 많군. 우두머리를 처리하지 않고 바로 전면전을 했으면 병사들이 꽤 상했겠는걸.’

졸개는 마초와 서황을 영채 깊숙한 곳의 큰 건물로 안내했다. 건물 내부는 제법 군영처럼 꾸며져 있었다. 지도를 펼쳐 놓고 군의를 할 수 있는 큰 탁상이 있고 탁상의 건너편 상석에는 눈이 부리부리한 사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삼십여 명의 병사들이 호위하듯이 양옆에 시립했다.

“흑산적 두령 이대목이오. 공손찬군의 조자룡 장군이시라고?”

흑산적들은 대부분 평민 출신이라 제대로 된 성, 이름, 자가 없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대목(大目)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저 부리부리한 눈을 보고 누군가 붙여 준 이름일 것이다.

“그렇소. 소장이 바로 공손찬 장군을 모시는 조운이오. 자는 자룡이라 하오.”

“공손찬군이면 먼 동북쪽 유주에 있을 터인데, 어쩐 일로 기별도 없이 이 먼 병주까지 오셨소?”

이대목은 마초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놓지 않은 듯했다.

“공손 장군이 흑산의 두령들께 전하는 밀지를 받고 왔소이다.”

“밀지?”

“그렇소, 밀지요.”

“그 밀지가 어디 있소?”

이대목이 묻자 마초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절대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물건이라 소장이 품 안에 간직하고 있었소. 이제 보여 드리겠소.”

“아니, 그럴 필요 없소.”

이대목은 큰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우리 조자룡 장군께서 밀지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계시다고 하니 가슴을 열어서 꺼내 봐야겠구먼. 얘들아, 조 장군을 모셔라.”

“예, 두령!”

마초와 서황을 둘러싼 흑산적 삼십여 명이 일제히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일이 잘못된 것 같군요.”

“그런 것 같군.”

눈앞에 서른 개의 병장기가 펼쳐져 있었지만, 서황과 마초는 매우 평온한 태도로 문답을 주고받았다.

이대목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곧 죽을 놈들이 허세를 부리는구나. 네 이놈, 감히 조자룡 장군을 사칭했느냐?”

“사칭이 아니라 내가 진짜 조자룡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내 일찍이 장연 대두령을 따라 종군했을 때 먼발치에서 소년 장수 조자룡을 본 적이 있다. 나이는 어리지만 실로 사내답고 영웅의 기상이 넘치는 장수였었다. 어딜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이 조자룡을 사칭한단 말이냐?”

마초의 미간에 주름이 팍 패였다. 그는 본래 모욕을 참지 않는 성격이었다.

“이 산적놈이 오냐 오냐 해주니까 이제 내 얼굴 평가를 해? 조자룡이라면 조자룡인 줄 알 것이지 어디 토를 달아?”

조용히 듣고 있던 서황이 앞으로 나섰다.

“비장군, 일이 틀어졌으니 전부 베겠습니다.”

“좋아, 상석에 앉은 이대목이란 놈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내가, 왼쪽은 자네가 맡는다.”

마초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탁상 위로 뛰어올라서 상석의 이대목을 향해 달렸다.

“모두 저놈을 잡아라!”

흑산적 몇몇이 창칼을 들어 마초를 찌르려고 했으나 탁상 위로 뛰어 올라간 마초의 동작이 더 빨랐다. 이대목은 당황해서 칼을 빼 들어 대항하려 했으나 마초는 세 걸음 만에 육박해 들어가서 네 걸음째에 이대목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퍽!

“크악!”

이대목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이미 장도를 뽑아 든 마초가 이대목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대목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모습은 장도를 휘두르는 마초의 모습이었다.

쉬익!

마초의 칼이 한 번 번득이자 이대목의 머리가 목에서 떨어져 땅바닥을 굴렀다.

서황은 거대한 탁상을 두 손으로 잡았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아래 팔뚝에 핏줄이 솟았다.

“흡!”

서황이 힘을 한 번 쓰자 탁상이 공중으로 떴다. 거대한 탁상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자 병사들의 얼굴에 경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서황은 탁상을 왼쪽으로 휘둘러 던졌다.

우당탕!

“으아악!”

왼쪽에 있는 병사들 대여섯 명이 한 번에 탁상에 얻어맞고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탁상을 집어던진 서황은 자신의 무기 극(戟)을 틀어쥐었다. 극은 이 시대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병기였다. 베거나 찍을 수 있도록 장대의 끝에 ㄱ자로 날붙이를 단 무기를 과(戈, 꺽창)라고 한다. 극은 과의 끝에 창날을 달아서 찌르기와 베기를 동시에 할 수 있도록 고안된 무기였다.

서황이 한 번 극을 휘두를 때마다 흑산적 두세 명이 피를 뿜으며 한꺼번에 쓰러졌다. 창날에 찔리거나 과에 찍힌 자는 물론이거니와, 자루에 맞은 자도 피가 튀고 뼈가 부러져 나갔다.

마초 쪽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제길, 누구라도 저놈 칼을 막아 봐라!”

“칼놀림을 눈으로 따라가기도 버거운데 어떻게 검을 부딪친다는 말이오?”

흑산적들은 마초의 움직임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마초가 휘두르는 5척 장도가 번뜩일 때마다 그저 피를 뿜으며 쓰러질 뿐이었다.

두 사람이 삼십여 명의 흑산적을 베어 넘기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좋아, 그러면 이제 흑산적들의 항복을 받아 볼까.”

상황이 정리되자 마초는 이대목의 머리를 집어 들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이대목의 목이 떨어졌다! 어서 항복하라!”

항복 권고였다. 그러나 흑산적들은 항복 권고에 반응할 여유조차 없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의 일제 사격에 쓰러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덕과 월길이 이끄는 본대가 때맞춰 영채의 문을 부수고 쳐들어온 것이다.

“훈련된 군대와 산적의 차이는 창칼보다 활로 싸울 때 가장 크게 드러나는 법.”

방덕이 말하자 월길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가군이 일제 사격을 통해 화망을 치기 시작하자 흑산적들은 손을 쓰지 못하고 쓰러져 나가고 있었다.

마가군의 사격이 끝나자 마초는 다시 한번 이대목의 목을 치켜들고 항복을 권했다. 흑산적들이 하나둘씩 병장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숫자는 아직 흑산적들이 많았지만 이미 승패가 기울고 사기가 꺾인 다음이었다.

마가군의 전사자는 한 명도 없었다. 대승이었다.

“좋아, 항복한 흑산적들의 뒤처리를 한 뒤, 오늘 저녁은 영채에서 묵는다.”

예상대로 흑산적 영채에는 충분한 식량이 쌓여 있었다. 전투에서 대승하고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니 군졸들의 사기도 올랐다.

그러나 나관중만은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없었다. 항복한 흑산적들에 대한 ‘뒤처리’ 과정을 봤기 때문이었다.

흑산적들 중 가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은 감금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악행을 저질러 온 자들은 전부 처형되었다.

지금은 난세이기 때문에 악인의 목숨까지 돌볼 수 없다. 흑산적을 토벌하여 전멸시키는 것은 의롭지 못한 학살과는 다르다. 그러나 막상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직접 보게 되니 속이 편치 않았다.

나관중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병주의 밤하늘에는 쏟아져 내릴 듯 많은 별이 떠 있었다.

별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는 나관중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 쳤다.

“비, 비장군?”

“그래. 오늘 전투에서 대승할 수 있도록 계책을 짜낸 군사가 고민이 큰 것 같아서 와 봤지.”

마초였다.

“군사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그저 얕은 꾀를 내 보았을 뿐입니다.”

“그 얕은꾀로 인해 쉽게 이길 수 있었다. 나와 공명(서황의 자)이 우두머리를 먼저 처리하지 않았다면 적들도 체계적으로 반격했을 것이고 우리의 피해도 컸을 것이다. 오늘의 승리의 가장 큰 공은 너의 것이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마초는 나관중의 옆으로 다가와서 나란히 섰다.

“그래, 무슨 일로 고민하고 있는가?”

“별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게 아직 익숙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

마초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군문이란 곳은 그런 곳이다. 나도 30년을 난세의 무장으로 살았지만, 아직도 가끔 토악질이 난다고. 예전에는 그런 생각도 했었지.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로 무장으로 살지 않겠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돼 버렸지만 말이야.”

“장군께서도 아직 괴로울 때가 있으십니까?”

“당연하지. 무장의 삶이 뭐가 그리 재미있겠어? 하루 종일 흙먼지를 마시며 말을 달리고, 병사들과 악다구니를 쓰고, 손에 다른 이의 피를 묻히고, 끔찍하게 맛이 없는 음식으로 요기를 하고 추운 군막에서 잠을 청하는 게 무장의 삶이지. 그리고 눈을 뜨면 다시 그 하루가 반복되고 말이야.”

“장군께서 그리 생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장군이 그저 전투의 달인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은 맞아. 허나 나라고 재미있어서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당장은 그 일을 해야 하니까 하는 것뿐이지.”

나관중은 마초의 눈을 바라보았다. 기분 탓인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나는 천하 제패니, 난세 평정이니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 그저 지난 생에서 내 실수로 죽게 만들었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지키고 싶을 뿐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싸워서 마가군의 세력을 키워야 해. 관중,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앞으로 십 년만 나와 같이 싸우도록 하자. 나도 십 년 안에는 제후가 되든 호족이 되든 결판을 내고 남은 생을 조용히 살아야겠다.”

나관중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난세를 평정하고는 싶으나 자신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나관중 자신은 흑산적 몇 백이 죽어 나가는 걸 보고 비위가 상해서 밥도 넘기기 힘든 서생일 뿐이다.

마초에게는 힘이 있다. 마초는 뛰어난 무장이고 이제는 미래의 지식까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 힘만으로 정말 난세를 끝낼 수 있을까? 마초 본인은 그에 회의적이었다.

무엇보다 난세 평정이라는 힘든 길을 가기에는 마초가 회귀 전의 힘겨운 삶으로 인해 입은 상처가 너무나도 컸다.

나관중은 결국 마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게다가 저는 장군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장군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풍익의 호족 밑에서 가노로 있을 것이고 생사조차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 목표를 달성하실 때까지 장군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초의 눈이 다시 날카롭게 빛났다. 눈동자 깊숙이 푸른 빛이 떠올랐다.

“빼앗긴 정인을 되찾아야겠지.”

* * *

마초가 이끄는 마가군의 500 기병대는 황하를 건너 동쪽으로 계속 진군했다.

중간에 필요한 보급은 흑산적의 영채를 약탈해서 해결했다. 마초가 공손찬군의 장수 조운을 사칭해서 흑산적 우두머리와 대면한 뒤 우두머리를 베면 방덕이 군사들을 이끌고 몰아쳐서 항복을 받아내는 식이었다.

그렇게 세 군데의 영채를 더 약탈했을 때 농현에서 끌려간 처녀들의 행방을 알 수 있었다. 병주와 기주의 접경지역인 태행산맥에 있는 산채로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마초 일행은 지체없이 태행산맥의 산채로 향했다. 높은 망루까지 갖춰서 제법 요새처럼 만든 산채였다.

“길게 끌 필요 없다. 바로 돌입한다.”

마초가 결정하자 서황이 품속에서 뿔피리를 꺼내 힘껏 불었다.

부우우우—

그 소리가 신호였다. 숨어 있던 마가군 기병대가 영채를 향해 짓쳐 들어왔다. 서황은 어느새 도부수들을 이끌고 영채의 목책을 넘어뜨리고 있었다.

“방덕, 월길, 돌입하라!”

서황이 넘어뜨린 목책을 뛰어넘어 마초와 방덕, 월길이 이끄는 기병대가 영채로 쳐들어갔다.

영채의 규모는 상당히 컸지만, 영채 안에는 생각보다 수비병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우두머리인 청우각이 없는 상황이라 저항은 생각보다 거세지 않았다.

짧은 전투가 끝나고 일행은 어렵지 않게 영채를 제압했다.

마초는 심문을 위해 높은 망루를 골라서 자리를 잡고 흑산적 간부들을 끌고 올라오게 했다. 밧줄로 고리를 만들어서 그중 한 놈의 목에 걸고 무릎을 꿇렸다.

“그러면 흑산적 친구들, 이제부터 내가 원하는 답변을 줘야 할 시간이다. 먼저 너희들 산채에 왜 두목이 없는지부터 물어보자. 내가 듣기로는 청우각이라는 놈이 여기를 지키고 있다고 했는데 왜 없지?”

영채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적고 두령도 없었다. 만약 청우각이라는 자가 본대를 이끌고 갑자기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 마초는 그것을 먼저 확인할 생각이었다.

밧줄에 목이 묶인 흑산적은 어지간히 대가 센 자인 모양이었다. 마초를 잔뜩 노려보며 말했다.

“모른다.”

“그래?”

마초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목이 묶인 흑산적에게 다가가 발로 가슴팍을 내질렀다.

퍽!

밧줄에 목이 묶인 채로 가슴을 채인 흑산적은 망루 밖으로 튕겨 나갔다. 밧줄 끝은 병사들이 쥐고 있었다. 밧줄이 스르륵 풀려나가며 이내 팽팽해졌다. 목이 매달린 꼴이 된 흑산적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밧줄을 쥐고 풀어 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팔에 힘이 빠지자 이내 흑산적의 몸은 축 늘어져서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고문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바로 죽이는 것이다.

병사들은 흑산적의 시체를 끌어 올리고 밧줄을 다른 간부의 목에 걸었다. 이 자는 벌벌 떨고 있는 게 조금 심약한 자인 모양이었다.

“귀찮게 하지 말고 모르면 모른다고 빨리 대답해라. 빨리 교수해야 되니까.”

“처, 청우각 두령은 장연 대두령의 명을 받고 상산으로 갔소! 장연 대두령이 휘하의 두령들을 모두 불러 모았소이다!”

“그래? 흑산적을 모두 모아서 무슨 짓을 벌일 셈이라더냐?”

“대두령이 혼례식을 올린다고 하더이다. 상대는 이번에 데려온 처녀들 중의 한 명이오.”

“혼례식이라.”

마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좋아. 너희들이 농현에서 납치해 간 처녀는 일곱 명이다. 장연이라는 놈이 신부로 삼겠다는 건 그들 중 누구냐?”

“그중에 유독 키가 크고 기가 센 처녀였소.”

옆에서 듣고 있던 방덕이 끼어들었다.

“맹기, 그렇다면 양 소저가 틀림없다.”

“내 생각도 그렇다. 그래, 장연이 신부로 삼겠다고 하니 그 처녀는 뭐라고 하더냐?”

“이, 이렇게 말했소이다. ‘소녀는 본래 먼 서량 땅의 여인으로서 대인과 배필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서량은 이곳 병주와는 풍토도 다르고 먹는 음식도, 쓰는 말씨도 다릅니다. 소녀가 대인의 배필이 된다 한들 고향 생각에 하루하루가 괴로울 것입니다. 그러니 고향 친구들을 곁에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처녀들 모두를 제 시비로 삼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장연이 그렇게 하라고 하더냐?”

“그, 그렇소.”

“그러니까 뭐라고 대답하더냐?”

“그게… ‘서방님을 뵈옵니다. 저는 본래 서량에서 밥 짓던 하찮은 계집으로 서방님의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성심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었소.”

“자세히도 기억하고 있군. 틀림없느냐?”

“물론이오. 자랑은 아니지만, 여자 목소리를 들은 게 하도 오랜만이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흑산적은 장연이 처녀들을 자신의 고향인 상산으로 끌고 갔으며, 상산에서 혼례식을 올릴 예정이라는 것까지 주절주절 말했다.

마초는 당시 청우각과 장연의 대화를 들었던 몇 명을 추가 심문하여 내용을 재확인했다. 흑산적의 말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좋아, 아무래도 네 말이 맞는 것 같군.”

“그, 그럼 저는 교수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래. 대답을 잘했으니 교수하지 말아야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자! 장군! 어르신!”

“대신 너는 참수.”

마초는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흑산적 간부들을 끌고 가서 전원 참수하게 했다. 특히 기껏 자백까지 해 놓고 목이 달아나게 된 간부는 끌려가며 고래고래 악을 썼지만, 마초는 들은 척을 하지 않았다.

“하여튼 시끄럽기는. 그러게 진작에 사람답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아?”

방덕이 마초의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맹기, 저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양 소저의 성정이 불같은 건 우리 모두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갑자기 장연과의 혼사를 받아들였다니 솔직히 믿어지지 않는다.”

“영명, 내 생각에는 저자의 말이 맞을 것이다. 이건 양하원의 계략이다.”

“계략이라고?”

“그래, 보아하니 다른 처녀 여섯 명과 함께 탈출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모양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서량 출신이라 풍토가 달라서 적응하기 어려우니 서량 출신의 다른 처녀들과 같이 있어야 된다고 했지? 하원은 본래 서량이 아니라 낙양 출신이다. 스승님이 벼슬을 버리고 농현으로 오실 때까지 낙양에 살았다. 필시 다른 처녀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꾀를 내었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군.”

“그리고 장연에게 ‘서방님을 뵈옵니다.’라고 했다고 했지? 하원은 절대로 그런 말투를 쓰지 않는다. 장연이라는 놈을 안심시키기 위해 계략을 쓰고 있는 게 틀림없다. 무엇보다…….”

‘내 마누라가 그렇게 귀여울 리 없지.’

마초는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양하원은 절대로 애교 있는 말투를 쓰지 않는다. 20년 가까운 결혼생활 동안 그런 말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다른 처녀들을 구하기 위해 계략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래야만 해.’

마초는 그 자리에서 임시 군의를 소집했다. 방덕, 서황, 월길, 나관중이 마초를 둘러싸고 모여 섰다.

“이제부터 우리는 기주 상산국으로 간다. 상산은 흑산적 대두령 장연의 본거지이다. 곧 흑산적과 원소군과의 충돌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극히 위험한 곳이다. 우리는 그들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납치된 처녀들만 구해서 서량으로 돌아간다.”

혼례식 날짜까지는 아직 보름이 남아 있었다.

그 안에 양하원과 다른 처녀들을 구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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