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난세의 황후 (1)
방덕은 전장을 수습하고 두 손이 잘린 호재와 몇몇 생존자들을 모아서 심문을 시작했다.
“농현은 마가군 주둔지에서 가까이 있는 고을이다. 마가군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을 텐데, 어찌하여 농현을 습격해서 여인들을 납치했느냐?”
백파적 하나가 눈물 콧물을 쏟으며 대답했다.
“저희는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요. 얼마 전 호재 두령에게 사람이 찾아와서 비싼 값을 치르겠으니 농현에서 처녀 일곱 명만 잡아 와 달라고 했습니다요. 일곱 명 모두를 콕 집어서 누구인지 알려 주었는데 반드시 그 처녀들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요. 그래서 그가 값을 치르고 처녀들을 데려갔습니다요.”
방덕은 두 손이 잘린 채 망연자실해 있는 호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처녀들을 데려오라고 의뢰한 놈이 누구냐?”
호재가 퀭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귀찮게 묻지 말고 그냥 죽여라. 어차피 죽을 목숨 내가 왜 네놈들을 도와주겠느냐?”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마초가 다가와서 한 손으로 호재의 목을 틀어쥐고 들어 올렸다. 호재의 몸이 공중에 붕 뜨고 두 다리가 대롱대롱 매달렸다.
마초는 숨이 막혀서 컥컥거리는 호재를 바라보았다.
호재는 모든 것을 체념했기 때문에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초의 눈을 마주 본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놈은 사람이 아니다.’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는 동안 수많은 이들의 원한 서린 눈빛을 웃으면서 받아냈던 호재다. 그러나 마초의 눈은 호재조차도 생전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같은 아내를 두 번 잃은 사내의 눈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초의 목에서 갈라진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구나.”
방덕은 곧 이어질 일을 짐작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마초를 산채 안으로 들어가게 해서 마초가 하는 행동을 병사들이 보지 않도록 했다. 힘을 보이는 것은 좋지만 잔혹함을 보이는 것은 병사들의 마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끄아아악!”
산채 안에서 차마 다 옮기기 어려운 끔찍한 고문이 호재에게 가해졌다. 마초는 무미건조한 손짓으로 호재의 팔다리를 조금씩 부숴 갔다.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방덕이 잠시 마초를 말리고 호재에게 물었다.
“고집을 부리면 피차 힘들어진다. 의뢰한 자가 누구인지 빨리 말하라.”
“크윽, 크윽… 흑산적, 처, 청우각…….”
“흑산적 청우각? 너와는 원래 알던 사이인가?”
호재가 악형을 이기지 못하고 토해 놓은 말은 대략 이러했다.
흑산적 청우각은 호재가 병주에서 관군 도위로 있을 때부터 결탁해 있던 자였다. 청우각은 과거에는 병주 통천산 일대를 근거지로 하였는데 지금은 근거지를 한 번 옮겨서 오원군 일대에 있다고 했다. 그 청우각이 보낸 자들이 사흘 전에 금과 비단을 지불하고 일곱 명의 처녀를 데려갔다.
“그들이 왜 농현의 처녀들을 납치했는가?”
“자, 자기도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호재도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 어쨌든 흑산적에게는 양하원을 비롯한 농현 처녀들이 필요한 사정이 있으며, 천수군 농현은 흑산적의 본거지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백파적 호재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라 했다.
그동안 서황은 다른 백파적 졸개들을 심문하고 있었다. 서황이 졸개들에게 들은 답변도 대략 호재의 말과 유사했다.
“좋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군. 병주의 흑산적 청우각이라는 놈을 쫓는다.”
병주까지는 먼 길이다. 추격하려면 단단히 준비가 필요했다.
“그 전에 이 쥐새끼들을 처리해야겠지.”
마초는 묶여 있는 백파적 포로들을 돌아보았다. 이백여 명을 헤아리는 숫자였다.
마초와 눈이 마주친 백파적 포로들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마초의 발아래에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장군, 제발 살려 주십시오!”
“장군, 저희는 그저 먹고살려다 보니 도적이 된 것입니다.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다시는 도적질을 하지 않겠습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사람?”
마초는 무표정하게 그들의 말을 듣다가 사람이라는 말에 꿈틀했다.
“나는 30년간 전장을 떠돌았기에 너희 같은 놈들을 잘 안다. 짐승처럼 살다가 꼭 죽을 때가 되면 인간성을 회복하지.”
마초는 격렬한 분노를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어째서 사람이냐? 너희들은 사람으로 태어났을지는 몰라도 짐승으로 살았다. 지금 관중 전체가 기근이라 사람 먹을 곡식도 모자란 판이다. 짐승을 먹일 곡식은 없다.”
마초는 병사들을 돌아보며 지시했다.
“죽여라.”
병사들이 울부짖는 백파적들을 끌어내서 하나씩 참수하기 시작했다.
* * *
마등은 농현의 피해 상황을 파악한 후 빠르게 병력을 모아서 백파적의 요새 야고산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야고산에 채 닿기도 전에 되돌아오는 마초의 선발대와 마주쳤다.
예상대로 야고산의 백파적들은 마초의 선발대에 의해 전멸한 후였다.
마등은 호재의 수급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임시 군의를 열었다.
마초가 먼저 물었다.
“농현의 피해 상황은 어떻습니까?”
“가볍지 않다. 허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사람이 많이 상하지는 않았구나. 네 스승이신 양진 선생은 양 소저가 납치되는 과정에서 백파적들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치료가 될 듯하다.”
“불행 중 다행입니다. 처녀들을 납치한 것은 병주의 흑산적 무리라고 확인했습니다. 아버지, 병주까지 가서라도 그들을 되찾아 와야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좋다. 농현은 마가군의 보호를 받는 고을이니 이는 마가군에 대한 도전이다. 마가군은 식구를 버리지 않는다.”
마등은 시원스럽게 허락했다. 그 또한 군웅으로 살고 있는 사내다. 힘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등은 그 자리에서 추격대를 편성했다.
“병주는 우리의 세력권 밖이니 기동에 신중해야 한다. 도적, 관부, 군웅을 불문하고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라. 백파적 영채에서 노획한 금과 비단을 넉넉히 챙겨 가거라. 현지의 마을에서 군량을 징발할 때는 반드시 금이나 비단으로 값을 지불해서 약탈이 되지 않도록 하라.”
마등은 계속해서 방침을 지시했다.
“적의 상황을 파악한 후 청우각의 수급을 취할 수 있으면 취하되, 상황이 어려울 경우 무리하지 말고 사람만 구출해서 돌아와라. 총지휘는 비장군 마초가 맡는다.”
이번 원정은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생명이다. 마초는 기병 5백만을 동원하기로 했다. 숫자가 부족하더라도 최대한 속도를 높일 작정이었다.
5백 중 1백은 월길이 이끄는 강족 기병대였다. 강족 기병은 어떤 산이든 올라갈 수 있고, 누구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최고의 척후병이었다. 하나같이 숙련된 궁수들이기도 했다.
마초는 원정군에 서황을 포함시켰다. 병사의 수는 적지만 전부 정예병이다. 자신과 서황의 무위가 더해지면 어지간한 적은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방덕이 끼어들었다.
“맹기, 나도 가겠다.”
“영명, 너는 아버님을 도와야 하지 않느냐? 너까지 나서면 본영에 손이 부족할 것이다.”
방덕은 그래도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가 보기에 마초는 양하원이 납치된 이후 정신이 불안정했다. 서황이 있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마초가 고집을 부린다면 얼마 전에 합류한 서황보다는 오랜 친구인 자신이 말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원정에 끼어들었다.
“비장군, 저도 가게 해 주십시오.”
“관중, 너에겐 무리다. 마가군 중에서도 말을 가장 잘 타는 자들로만 편성했으니 속도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저도 본래 소금 장사를 하러 말을 타고 화북 일대를 돌아다녔으니 어지간히 쫓아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병주는 제 고향이라 길을 알고 있습니다. 천 년의 시간 차이가 있으니 길의 모양은 다르겠지만 중간에 산과 강의 모양으로 방향을 찾아야 할 때 제 지식이 요긴하게 쓰일 것입니다.”
병주가 고향이라면서 나관중이 끼어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마초는 나관중을 원정에 참여시키기로 했다. 길잡이가 없었기 때문에 대충이라도 길을 아는 사람이 필요한 참이었다.
마초, 나관중, 방덕, 서황, 월길, 기병 5백으로 원정군이 꾸려졌다.
* * *
“일단 먹자. 먹고 기운을 차려야 탈출을 도모할 수 있어.”
양하원은 눈앞에 있는 죽그릇을 두 손으로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무거운 나무 수갑에 두 손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릇을 들고 마시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같이 끌려 온 처녀들은 여전히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너무들 걱정하지 마. 저놈들이 해코지를 하려고 했으면 진즉에 했지. 지금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걸로 봐서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야. 우리끼리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기회를 엿볼 수 있어. 그러려면 일단 먹고 체력을 회복해야 돼.”
양하원은 계속 처녀들을 독려해서 억지로 죽을 마시게 했다.
농현이 습격을 당한 날, 백파적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젊은 처녀만 콕 집어서 일곱 명을 납치했다. 양하원은 백파적 세 명을 때려눕히며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끝내 뒤통수에 날아드는 곤봉을 피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틈에 납치당했다.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백파적 정도는 얼마든지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하필 그날은 여러 가지 이유로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그까짓 실연 때문에 칠 일간 곡기를 끊지만 않았어도!’
이를 갈던 양하원은 이내 머리를 내젓고 한숨을 쉬었다. 몸 상태가 좋았다면 백파적은 몇 명 더 때려잡았겠지만, 혼자 힘으로 다른 처녀들이 납치되는 것까지 막는 것은 무리다.
처음에는 젊은 처녀들만 납치된 걸로 봐서 끔찍한 욕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백파적들은 처녀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야고산 인근에서 다른 도적떼들에게 인계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곱 명 처녀들은 말등에 짐짝처럼 실려서 수천 리 길을 달려갔다. 오가는 말들로 미루어 보면 이들은 백파적이 아니라 흑산적의 패거리들인 듯했다.
‘도대체 이놈들은 무슨 꿍꿍이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으나 양하원은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때 절망이나 원인 파악보다는 대책을 먼저 생각하는 성격이었다. 일신의 무예로 도적들 몇 명쯤은 상대할 수 있고 기마술에도 자신이 있다. 그러니 식사 시간을 틈타 몸을 빼낼까도 생각해 보았다. 잘하면 그런 식으로 혼자서 몸을 피할 수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나 혼자 도망치면 같이 끌려 온 여섯 명은 어떻게 해?’
양하원은 일단 일곱 명이 같이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노려보기로 했다.
한참을 동쪽으로 달려서 얼마나 왔을까? 종일 짐짝처럼 말 위에 실려 있느라 몸은 축나고 공포는 더해 갔지만 양하원은 항상 머릿속으로 탈출의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어느 산채에 도착했다. 일곱 명이 함께 큰 방 안에 감금되었다.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탁한 남자 목소리였다.
“농현에서 잡아 온 처녀들이 이 안에 있느냐?”
“그렇습니다, 대형(大兄).”
“좀 보자.”
대형이라는 자의 말에 문이 열렸다.
대형이라는 자는 작고 마른 체격을 한 30대 남자였다. 왜소한 몸을 부풀려 보이려는 듯 어깨를 펴고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흑산적 부하들이 처녀들을 일으켜 세우자 대형은 시장에서 닭을 고르듯이 한 명 한 명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녀들은 저마다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대형의 체격은 작아도 표정과 몸짓은 고관대작처럼 여유와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사람을 닭 고르듯이 쳐다보는 태도는 누가 봐도 상스러웠다.
‘흑산적 놈이 되게 귀족 흉내를 내네.’
대형은 양하원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대형의 키는 양하원보다 반 뼘 작았다.
“대단한 미인이군. 키가 큰 것도 마음에 들어. 소저는 이름이 무엇이오?”
양하원은 대형의 눈을 피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허허, 내가 묻지 않소? 소저를 뭐라고 부르면 되겠소?”
대형이 여유롭게 웃으며 양하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대형의 얼굴에서 코피가 터졌다.
양하원이 박치기로 대형이라는 사내의 얼굴을 갈긴 것이다.
“이런 개 같은 도적놈이 감히 수작을 걸어? 정 나를 부르고 싶으면 스승님이라고 불러라. 그릇됨을 말하는 자는 스승으로 모시라고 했으니까.”
“음, 순자인가?”
대형은 피가 흐르는 코를 감싸 쥔 와중에도 양하원이 순자의 말을 인용했음을 알아챘다. 대형의 부하가 얼른 다가와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대형, 저 계집이 바로 의랑 양진의 딸입니다. 아비가 조정에서 관리를 지냈던 문사이니 글월을 좀 얻어들은 듯싶습니다.”
“그래? 나는 그저 미색이 가장 빼어난 여인을 찍어 본 것인데 하필 우리가 노렸던 그 여인인가. 이것도 운명인가 보군.”
“코는 좀 괜찮으십니까?”
“하하, 너도 조심하거라. 박치기를 당해 보니 저 소저는 학문만 있는 게 아니라 무공도 익힌 몸이다. 학문에, 무예에, 미인에, 내가 좋아하는 장신이라.”
사내는 코피를 닦고 씨익 웃으며 양하원을 마주 보았다.
“게다가 나에게 이렇게 대하는 기백이 있는 여인이라니, 내가 항상 찾아 헤매던 난세의 황후 감이구나.”
양하원은 난세의 황후라는 말을 듣자 기가 막혔다.
“이제 곧 관부에 끌려가서 죽을 날만 남은 도적놈이 말은 많구나.”
“하하, 관부라면 이곳이 바로 관부인데, 어디로 끌려간다는 말인가?”
이곳이 관부라는 말을 듣자 양하원은 흠칫 놀랐다.
그렇다면 흑산적들에게 대형이라고 불리는 이 사내는 관직이 있단 말인가?
양하원은 머릿속에 뭔가 짚이는 바가 있었다.
사내는 여유가 넘치는 태도로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본관은 천자를 대신해 병주를 다스리는 평난중랑장(平難中郞將) 장연이라 하오. 양 소저는 나의 신부가 되는 것이 어떻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