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백파적을 베는 야차
우미(牛尾)는 성은커녕 이름조차 없는 평민이었다.
그가 살던 마을에는 불교의 승려가 포교를 하고 있었는데 그 스님이 그에게 우미, 소꼬리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자신이 평민이라는 사실을 특별히 원망해 본 적은 없었다. 우미에게 이름을 붙여 준 스님도 현세의 처지를 지나치게 원망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나이 스무 살 되던 해 정혼하기로 한 처녀가 마을 호족의 아들에게 욕을 당한 날만은 스스로가 평민이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홧김에 호족의 아들을 때려죽이고 산속에 숨어 살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백파적이 되어 있었다.
백파적은 원래 황건적과 같이 도가(道家)의 이상을 표방했는데, 결국은 더 빨리 많은 사람을 모아서 더 효과적으로 도적질을 하기 위함이었다. 우미가 소속된 패거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악독하다는 호재라는 두령의 패거리였다. 타고 나기를 기운이 셌던 우미는 호재군에서 제법 활약을 해서 소두령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번 출행에서 털었던 마을은 천수군 농현이라는 제법 큰 고을이었다. 마가군이라는 강력한 군벌의 세력권이라는 게 좀 불안스럽긴 했지만, 호재 두령은 망설이지 않았다. 농현에서 호재군의 산채가 있는 북지군 야고산까지는 제대로 된 길이 없는 산맥 지대였다. 그나마도 산세를 잘 아는 백파적들이니 열흘만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갑옷 입고 말을 탄 기병대라면 산을 넘어 찾아올 수나 있을지 의문스러운 곳이었다.
농현에서도 우미는 맹활약했다. 닥치는 대로 재물을 쓸어 담고 여인들을 겁탈했다. 우미에게 욕을 당하던 어느 여인은 우미를 보고 야차라고 불렀다. 예전에 스님에게 듣기를 야차라는 괴물이 있어서 사람을 마구 해치고 다닌다고 하던데 우미가 꼭 야차처럼 보였나 보다.
‘그 여인도 안 되긴 안 됐어. 그런데 어쩌겠나? 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걸. 내가 야차로 태어난 게 아니라 살다 보니 야차가 된 거지.’
우미에게 죄의식 같은 것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이날은 농현을 턴 것을 자축하는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두령인 호재는 누군가로부터 농현에서 여인 몇을 납치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막대한 재물을 약속받았다고 했다. 농현에서 납치해 온 여인들을 약속대로 팔아넘기고 금과 비단을 잔뜩 얻었다. 그러고 나서 금과 비단을 사람마다 배분하는 작업이 오늘에서야 끝났다.
호재의 패거리들은 오늘 저녁까지 실컷 마시고 내일 아침부터 야고산 산채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지기로 했다. 혹시라도 마가군의 추격대가 오면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만나기로 한 곳은 먼 병주의 통천산이었다. 아마 거기서 합류할 때쯤이면 그새 유흥과 환락으로 재물을 다 써버린 자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러나 우미는 달랐다.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중간에 슬쩍 새서 서평 쪽으로 가야겠다. 소두령이라 재물도 넉넉하게 받았으니, 이만하면 그곳에서 땅을 사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백파적 생활도 이제 청산해야지.’
우미는 자신의 계획에 뿌듯해하며 잔치판 한쪽을 바라보았다. 두령 호재가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부하들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부하들은 뭐가 좋은지 호재를 보며 깔깔거렸다.
“두령, 그동안 신세 많았소. 이제 나는 내일부터 백파적을 그만두고 성실하게 살려오.”
우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생활도 오늘까지만이다.
우미는 눈을 돌려 망루를 바라보았다. 망루에는 번을 서기로 한 병사들이 올라가 있었지만, 그들도 키득거리며 잔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깊은 산골까지는 행인이 다니지 않는다.
만약 마가군이 농현이 털린 사실을 알고 쫓아 온다고 해도 앞으로 열흘 이상이 소요될 것이다. 마가군은 장안 쪽으로 원정을 나가 있어서 소식이 전해진 지도 이제 3, 4일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농현으로 돌아오는 데만 이틀이나 사흘, 농현에서 빨리 추격대를 꾸려 출발해도 열흘 정도는 걸리는 거리였다.
그러나 그들이 농현에서 열흘 걸리는 길을 출발했을 때 백파적 호재군은 이동을 시작할 것이다. 우미는 흡족한 마음으로 술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휘이이잉!
어디선가 째지는 듯한 낯선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어리둥절해 있는데 두령 호재는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명적, 명적이다!”
호재는 원래 군관 출신으로 도위 벼슬까지 해 봤다고 했다. 명적이라면, 이건 군대에서 쓰는 신호용 화살인가?
우미가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밤하늘에 무언가가 새까맣게 떠올랐다. 그게 무엇인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화살인가?”
퍽! 퍽! 퍽! 퍽!
새까만 화살비가 잔치를 벌이는 백파적들 사이로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술이며 고기를 먹던 백파적들이 픽픽 쓰러져 나갔다.
“이런 제기랄!”
우미는 이를 악물고 화살에 맞아 쓰러진 동료 하나를 들쳐업었다. 살리고자 함이 아니라 방패로 쓰기 위함이었다. 두 번째 화살비가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우미가 들쳐업은 동료는 죽지 않은 모양인지 갑자기 몸부림을 쳤다. 우미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동료의 목을 찔렀다. 동료는 죽어서야 얌전해졌다. 죽은 동료의 바지춤에서 뭔가 불쾌한 것이 흘러 나와 우미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예상대로 곧 두 번째 화살비가 쏟아졌다. 두 번째 사격까지 보니 어디서 쏘는지 알 수 있었다. 망루의 반대편 방향이었다. 백파적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챙겨 들었다. 관군에게 노획한 것들이라 나름대로 그럴싸했다.
화살비가 쏟아졌던 곳에서 군기가 올라가고 병사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우미는 깃발을 보며 경악했다. 군기에는 말 마(馬) 자가 큼직하게 씌어 있었다.
마가군이었다.
“말도 안 돼! 분명히 열흘 거리인데, 저놈들은 이제 소식을 들은 지 3일밖에 안 됐을 거란 말이다!”
호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어떤 까닭인지는 몰라도 마가군이 열흘 거리를 삼 일만에 육박해 온 것은 분명했다.
돌입한 마가군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중앙에서 젊은 청년이 혼자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가군의 우두머리로 보였다.
“호재가 어떤 놈이냐?”
청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호재는 대답 대신 부하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의 목을 따라!”
청년은 얼굴이 희고 몸이 호리호리했다. 키가 약간 크기는 했지만, 겉보기에 그렇게 힘이 세 보이지는 않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백파적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십여 명이 일제히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청년은 말없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5척 길이의 장도를 뽑아 들었다.
스르릉.
우는 듯한 소리와 칼이 뽑혔다. 청년은 두 손으로 칼을 잡고 천천히 치켜들었다. 백파적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왔을 때, 청년이 앞으로 뛰어들며 칼을 내리쳤다. 청년의 푸른 눈에서 불꽃 같은 안광이 튀었다.
퍼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백파적들의 몸이 크고 작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청년이 휘두르는 칼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는 마치 백파적들을 제압하려는 게 아니라 두 쪽으로 가르려는 것 같았다.
“이런 제기랄…….”
우미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당해낼 수 없는 상대였다. 도망치기 위해 뒤쪽을 살폈다.
콰앙!
그때 뒤쪽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하들 몇몇이 하늘로 날았다.
남들보다 두 배는 큰 체격에 두건을 쓴 장사가 뒤쪽에서 나타났다. 뒤에서 나타난 장사는 양손에 든 대형 방패와 극을 휘두르며 혼자서 백파적 대열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딱 봐도 당해낼 수 없는 상대였다.
“젠장, 그럼 이제 이판사판이야!”
어차피 살아남으려면 저들을 죽여야 한다. 우미는 앞쪽의 청년에게 달려들기 위해 칼을 단단히 쥐었다. 청년이 시야에 들어오자 우미는 있는 대로 괴성을 지르며 청년에게 달려 들어갔다.
턱.
그러나 청년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우미는 제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췄다.
그 눈이 뿜어내는 살기는 숱한 도적질을 하면서 한 번도 마주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우미를 향해 청년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칼을 옆으로 휘둘렀다.
퍽!
칼이 허리를 자르는 소리가 울렸다. 우미의 시야 속에서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갑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청년의 모습이 뒷모습으로 바뀌었다.
그제서야 우미는 청년의 검격 한 번에 자신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음을 깨달았다.
상체만 남아서 바닥을 기고 있는 우미는 뒤를 돌아보는 청년과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서역인처럼 눈에 푸른빛이 돌았다. 흰 얼굴에 긴 눈매와 우뚝한 콧날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러나 푸른 눈에서 뿜어내는 살기가 그의 잘생긴 용모를 가렸다.
우미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야차, 저놈은 야차로구나…….’
* * *
마초는 피를 뒤집어쓴 채로 호재가 이끄는 백파적 무리를 베고 또 베었다.
농현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마초는 농현에 들르지도 않고 견현의 둔영에서 바로 백파적 산채가 있는 야고산으로 달렸다. 마가군 보호 하의 마을을 이렇게 대담하게 털었다면 필시 해산해서 도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시간과의 싸움이니 서둘러야 했다.
마초 휘하의 부곡 중 말을 타고 산을 넘을 수 있는 정예 기병들과 철리길이 지원해 준 강족 기병들만이 뒤를 따랐다. 강행군을 버틸 수 있는 건 이들뿐이었다.
야고산에 도착해서 산채를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마초에게는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 있었다. 기습을 성공시키려면 침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황이 이끄는 별동대가 뒤쪽에서 포위망을 구축해서 기습에 필요한 조건이 다 갖춰지자 마초는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바로 백파적 진지로 돌입해서 살육을 시작했다.
찌르고 베다 보니 칼이 한 자루인 게 아쉬웠다. 주변의 쓰러진 백파적이 들고 있던 도끼를 한 손에 들었다. 칼과 도끼를 양손에 들고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둘렀다.
“전부 죽여 주마!”
분을 이기지 못한 마초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졌다. 마초는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두 쪽으로 가르기 위해 칼과 도끼를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무예의 기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동작이었지만 마초의 칼을 받아낼 수 있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히, 히이익…….”
“저놈은 사람이 아니라 악귀인가?”
호재 휘하의 백파적들은 다들 어지간히 대가 세다는 소리를 듣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마초를 보니 몸이 얼어붙었다. 바닥에 오줌을 지리는 자들도 있었다.
몇 명이나 되는 백파적이 죽었을까. 칼과 도끼를 정신없이 휘두르다 보니 체력은 빠르게 바닥났다. 마초는 이내 숨을 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호재는 한 줄기 희망을 본 것만 같았다. 마초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네 이놈! 수하들을 상하게 하지 말고 우두머리끼리 결판을 내자. 투장을 청한다! 내가 바로 야고산의 대두령 호재다.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투장? 건방진 도적놈이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마초는 이름을 말하는 대신 성큼성큼 호재를 향해 다가갔다. 호재는 마초가 지쳐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두 손으로 치켜들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 들어갔다.
“이야아압!”
그러나 호재의 용기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마초는 왼손에 쥔 칼을 한껏 당겼다가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퍽!
칼날이 살을 베는 소리와 함께 호재의 두 손목이 통째로 날아갔다.
“크아악!”
호재는 제자리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이 있던 자리에 잘린 손목만 남아 있으니 비명이 절로 나왔다. 그런 호재의 머리 위로 마초가 오른손의 도끼를 들어 올렸다.
그대로 도끼가 호재의 머리 위로 낙하하려는 찰나였다.
턱.
누군가 마초의 오른손을 잡았다.
“맹기. 저 녀석에게 물어볼 말이 많다. 숨을 끊는 건 잠시 미뤄 둬라.”
방덕이었다.
마초는 그제서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오백 명에 달하던 백파적 무리들 절반 이상이 시체로 변해 있었는데 시신이 온전한 자를 찾기 힘들었다. 나머지들은 항복해서 저마다 손을 들고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마가군과 아단부의 강족 기병을 합쳐서 100명에게 당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