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7화 (17/306)

17화. 가후의 우울

장안성, 대사마의 관저.

“오홍…….”

거친 목소리로 신음 소리를 흘리는 자는 대사마 이각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서역에서 들어 온 과일이 있었다. 이 과일은 포도라고 하는데, 과거 동탁이 포도를 맛본 후 장안 인근에서 몇 번이고 재배해 보려고 했으나 풍토가 맞지 않는지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올해는 포도가 그럴싸하게 열매를 맺었다. 보리농사가 완전히 파할 정도로 날씨가 덥고 건조한 탓이었으리라.

“아항…….”

포도알이 한 알씩 입으로 들어갈 때마다 이각의 신음 소리는 점점 더 격해졌다.

이각의 양옆에는 시녀 둘이 앉아서 부채를 부쳐 주고 있었다. 많아야 10대 초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동녀들이었다. 두 소녀는 이각이 먹고 있는 포도알을 부러운 듯이 바라봤지만, 이각은 포도를 나눠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때 문밖에서 부산한 소리가 났다. 누군가 이각을 찾아온 것이다.

“대사마, 가 상서가 왔습니다.”

“들라 이르렴.”

이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상서 가후는 항상 심각한 용건을 들고 왔는데, 대체로 들으면 과일 맛이 떨어지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문이 열리고 가후가 들어왔다.

사십 대 중반쯤 된 여윈 사내였다. 깡마른 체격과 움푹 들어간 뺨이 눈에 띄었다.

“오호호호, 가 상서는 오늘도 피곤해 보이네. 일도 좋지만 가끔은 몸을 쉬어 줘야 한다구.”

가후는 이각의 인사말을 무시하고 바로 용건부터 말했다.

“대사마, 오늘은 마등이 미오성 옆의 군량고를 털어 간 사건 때문에 왔습니다.”

“호호호, 하여튼 가 상서는 성질이 급해. 그래서 살이 안 찌나? 그래, 마수성이가 자꾸 짜증 나게 군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근데 그게 왜?”

이각은 뭐가 좋은지 손뼉을 치며 깔깔 웃었다.

‘정말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자다.’

가후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이각을 응시했다.

이각은 약간 마른 듯한 평범한 체격의 중년 사내였는데 귀부인들처럼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얼굴인데, 원래의 얼굴 모양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무녀들처럼 눈꼬리를 길게 그린 후 끝을 살짝 들어 올려서 고양이 같은 눈매를 꾸몄다.

이각은 무당들의 점성술에 푹 빠져 있었는데 어찌나 심취했는지 자신의 복장과 행동거지를 무녀처럼 꾸미고 있었다. 사대부라면 누구라도 눈을 흘길 만한 짓이었지만, 이각의 앞에서 눈을 흘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장안에서 당할 자가 없다는 검술의 달인이었고, 동탁에게 인정받은 용병의 귀재였으며, 대사마로서 한나라의 병권을 한 손에 틀어쥔 최고 권력자였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자는 바로 죽이는 잔혹한 자였다. 누구도 그의 면전에서 그를 욕할 수 없었다.

가후는 속으로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마등이 큰아들 마초를 앞세워서 양봉군을 공격하고 군량고를 털어 갔습니다. 이 과정에서의 전투 흐름이 과거 마등이 군사를 부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라, 양봉군의 패잔병들을 모아서 전투 기록을 분석해 봤습니다.”

“응, 그래그래. 분석하니까 어땠길래?”

“먼저 마초가 이끄는 부대는 기동 속도가 아주 빠릅니다. 게다가 허를 찌르는 양동작전과 매복계, 개인의 무력에 크게 의존하는 전투방식까지 ‘그자’와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가후의 말을 듣던 이각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자’와 비슷하다고?”

“그렇습니다. 마치 빼다 박은 듯 흡사한 전투방식입니다.”

“하지만 마등의 아들놈은 아직 어린 애송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자’처럼 싸우려면 그만한 용력이 있어야만 하는데, 어린 놈이 무예가 뛰어나면 얼마나 뛰어날까?”

“용력 또한 대단한 자입니다. 몇 달 전에 양봉군에 서황이라는 장교 하나가 합류했는데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는 달인입니다. 그 서황과 투장(鬪將)을 해서 십여 합 만에 서황을 낙마시키고 승리를 거뒀다고 합니다.”

“으흥, 그렇단 말이지.”

이각은 뭔가 흥미가 동하는 듯 가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 상서, 그래서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대사마, ‘그자’를 다시 불러들이십시오.”

“‘그자’를 말이야?”

이각은 얼굴을 찡그리고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마등의 아들놈이 싸움을 잘한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그런 애송이 하나 잡자고 굳이 그자까지 다시 불러들여야 할까?”

“이유가 있습니다. 마등과 마초는 이번에 강족 부락과 협상해서 그들을 귀부시켰습니다. 마등의 모친이 강족 여인인 까닭도 있어서 그들은 강족 사회에 얼굴이 잘 통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력 부대 중에도 강족을 비롯한 이민족 부대가 있지 않습니까? 마등과 마초가 대사마를 당해 낼 리는 없겠지만, 강족 사이에서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우리 주력을 뒤에서 교란한다면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면 마등이 날뛰기 전에 우리가 먼저 혼내주면 되잖아? 숫자도 이제 일만 남짓밖에 안 되는 놈들인데 말이야.”

“마등을 쫓아내기는 쉬우나 완전히 격멸하기는 어렵습니다. 마가군은 서량에서 가장 빠르다고 이름난 부대입니다. 또 군세는 적으나 민심을 크게 얻고 있으니 당장 싸움에서 진다 해도 도망쳐서 일이 년이면 재기할 것입니다. 그러니 마가군을 끝까지 쫓아가서 격멸해야 하는데, 패주한 마가군을 끝까지 추격할 수 있는 건…….”

“그만큼의 기동력을 가진 ‘그자’의 부대뿐이라는 얘기군. 좋아요, 좋아요. 그런데 그자가 다시 우리에게 올까?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니?”

이각이 주변에서 시중드는 어린 동녀들에게 끈적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이각은 성인이 되지 않은 동녀들을 좋아해서 항상 동녀들의 시중을 받는데 싫증이 나면 몇 달 만에 죽인다. 이 두 소녀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가후는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간신히 억누르며 동녀들 대신 대답했다.

“대사마께서 한 가지만 배려해 주시면 올 것입니다.”

“그게 뭐지?”

“그자를 불러들이거든 미오성을 그에게 맡기십시오. 그리고 미오성에 유폐되어 있는 ‘그 여인’을 그자에게 내리십시오. 그자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재물과 여인입니다. 미오성의 재물과 함께 그자가 예전부터 눈독 들이던 그 여인을 내린다면 그자는 틀림없이 움직일 것입니다.”

“흠… 그렇게까지 해야 돼?”

이각은 뭔가 마땅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이내 수긍했다.

“할 수 없지. 어차피 그 아이는 갑자기 너무 자라 버려서 흥미가 떨어졌던 참이었어. 그 자에게 줘 버리지 뭐.”

요컨대, ‘그 여인’은 이각이 좋아하는 어린 동녀였는데, 갑자기 성장해 버려서 흥미를 잃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가 상서, 그자를 미오성에 두면 확실히 마등을 토벌해 주겠지?”

“그렇습니다. 마등이 변경을 어지럽히는 것은 군량을 얻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마등의 목적은 결국 군량이 쌓여 있는 미오성이 될 것입니다. 그자가 원하는 것은 재물과 ‘그 여인’이니, 그자의 목적도 결국 미오성이 될 것입니다.”

“으흠. 둘이 동시에 미오성을 노린다?”

“이는 두 마리의 늑대가 미오성이라는 먹이를 두고 경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이 싸우면 하나는 죽고 하나는 상처 입을 것입니다. 대사마께서는 싸움이 끝난 후 상처 입은 쪽을 사냥하십시오.”

“호호호호, 그러면 되겠구나. 가 상서는 참 똑똑하기도 하지.”

이각이 가후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가후는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자의 일은 가 상서가 하고 싶은 대로 처결해요. 그리고 가기 전에 여기 포도 한 송이 들고 가요. 올해는 다행히 비가 안 와서 포도가 제대로 익었네. 맛이 아주 기가 막힌다우.”

이각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가후에게 포도를 권했다. 이각의 시중을 들던 두 동녀의 시선이 포도로 향했다. 어지간히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대사마, 비가 안 오는 것은 다행이 아닙니다. 가뭄으로 여름 보리가 걷히지 않아 백성들은 이미 식량난을 겪고 있습니다. 가을 밀도 제대로 걷히지 않을 것이니 곧 대기근이 들 것입니다.’

가후는 속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자신은 죽지 않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곧 죽을 사람들에게 약간의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제 몫의 포도 한 송이는 동녀들에게 내려 주십시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대사마의 관저에서 나오면서 가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하늘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보다는 자신의 생존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가후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각을 도와야 한다. 그러나 이각을 돕는 것은 또한 수많은 타인을 희생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창천(蒼天) 밑에 살면서 계속 이각을 도와도 되는 것일까?

가후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만약 마초라는 젊은이가 그자와의 싸움마저 이겨낸다면 천하제일의 영웅이 될 자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때는 내 몸을 마초에게 의탁해도 괜찮겠지.”

* * *

며칠 후, 마등의 둔영에 전령이 찾아왔다.

천수군 농현의 수비병이었다. 온몸에 화살을 맞아서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모습이었다. 마등은 전 막료들을 자신의 군막에 모은 후 전령에게 말을 전하게 했다.

“급보! 농현에 도적떼가 쳐들어와 사람이 많이 상했습니다. 정서장군, 도와주십시오.”

“도적떼라니, 어떤 도적떼가 감히 마가군의 세력권을 침범한단 말인가? 소상히 말하라.”

“백파적입니다. 자기들끼리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백파적 호재라는 자의 부하들이라 하였습니다.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재물을 약탈했습니다. 그들의 손에 죽고 다친 이들이 백 명이 넘습니다.”

“호재라는 놈이 단단히 미쳤구나. 알았다.”

마등은 마초를 돌아보며 말했다.

“비장군 마초, 백파적 호재라는 자를 찾아내서 목을 가져와라.”

“존명!”

마초는 짧게 대답했다.

그때 서황이 마등의 앞으로 나섰다.

“주공, 저도 비장군과 동행하게 해 주십시오.”

“서공명 자네가? 무슨 이유가 있는가?”

“이 근처에서 활동한 지 오래되어 지리를 잘 압니다. 백파적 호재라면 제가 알기로 야고산에 있는 무리들입니다. 농현에서 병력을 꾸려서 야고산으로 출발하면 10일이 넘게 걸리지만, 여기서 제가 아는 길로 바로 출발하면 7일 만에 갈 수 있습니다. 말을 타고 산을 넘을 수 있는 최정예 병사들만 데려간다면 5일 만에 가는 것도 가능합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서황에 이어서 끼어든 자는 월길이었다. 월길은 군량 탈취 작전에 성공한 후, 부족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족 전사 백여 명과 함께 마가군 둔영에 머무르고 있었다. 마등에게 얼른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말을 타고 산을 넘는 것이라면 우리 강족 전사들이 최고입니다. 한인 경기병들보다 행군이 빠르니 척후로 쓰면 비장군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초가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 서황과 월길을 데려가겠습니다. 농현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서공명은 5일이 걸린다 하나 우리 마가군이라면 더 빠르게 주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알았다. 지금 바로 출발하도록 하라.”

마등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마초는 당장 백파적 호재라는 자를 잡으러 갈 셈이었다.

그런데 전령이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전령은 숨을 고른 후 다시 말을 꺼냈다.

“정서장군, 그리고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 백파적 놈들이 젊은 처녀 일곱 명을 납치해 갔습니다.”

“처녀 일곱 명?”

마등의 눈썹이 꿈틀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마초가 앞으로 나섰다.

“그 일곱 명이 누구인가?”

“양진 선생 댁의 외동딸 양하원 소저, 그리고…….”

양하원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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