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일해라, 서황
마초는 사람 좋은 척 한껏 미소를 지으며 서황을 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아랫것들이 내 말을 잘못 알아듣고 장사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모양이오. 내가 대신 사죄드리리다. 장사께서는 시장하실 테니 일단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드시오. 소생은 정서장군의 장자, 기도위 마초라 하오.”
서황이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공자의 뜻은 알겠으니 어색한 연기는 이제 그만두시오. 서모는 싸움에 패했으니 도망치지 않겠소.”
“음? 하하, 티가 났소? 그러나 장사를 후히 대접하려는 이 마음은 진심이오.”
마초는 넉살 좋게 서황의 말을 받았다. 서황은 자리에 앉아서 말없이 음식을 먹고 술을 털어넣었다.
서황이 대강 식사를 마치자 마초가 물었다.
“장사께서는 어찌하다 백파적의 무리와 행동을 같이하게 되셨소?”
“백파적과 함께 한 적은 없소. 반년 전, 양 장군이 조정의 벼슬을 받은 후 양 장군의 휘하로 들어갔을 뿐이오. 나는 본래 하동군의 해현에서 현위 벼슬을 하고 있었소. 세상이 이토록 혼란하니 무장으로서 공을 세우고자 했는데, 양 장군의 휘하 외에는 마땅히 귀부할 만한 곳이 없었소. 이후에 백파적 무리들이 양 장군에게 다수 귀부하면서 그런 소문이 나게 된 것이오.”
‘하동군 해현? 예전에 누군가 고향이 거기라고 했었는데… 누구였지?’
마초가 아는 사람 중에 서황이 현위로 있던 해현 출신이라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꽤 싫은 녀석이었나 보군. 뭐 아무려면 어때.’
마초는 기억도 나지 않는 하동 출신의 옛 지인은 잊어버리고 눈앞의 서황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장사 정도의 실력이라면 어느 곳에 있더라도 눈에 띄었을 것인데, 하필 양 장군의 휘하에 몸을 둔 것이 안타깝소. 진실이야 어찌 됐든 양 장군은 백파적의 두목으로 알려져 있소.”
서황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양 장군은 원래 도적떼의 두목이 아니라 하동군 양현의 현령이시오. 백파적 토벌을 둘러싸고 하동태수 왕읍과의 사이가 틀어져서 졸지에 모함을 받아 죄인의 몸이 된 것이오. 양현의 군사들을 이끌고 산중에 은거하는 중 백파적의 무리를 수습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백파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오.”
서황의 말인즉 원래 양봉은 현령까지 지낸 번듯한 관리였는데 모함을 당해서 도적떼 취급을 받게 돼 버렸다는 얘기다. 이 시대에는 흔한 얘기였다.
“대강의 사정을 짐작하겠소. 그러면 장사도 원래 양 장군과 아는 사이였겠구려.”
“양 장군이 양현 현령을 지내는 동안 나는 인접한 해현의 현위로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벼슬을 빼앗기고 관부에 쫓기는 몸이 되었소이다. 나로서는 양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소.”
‘현위 벼슬을 하다가 어쩌다 쫓기는 몸이 된 거지?’
마초는 서황의 과거가 궁금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서황은 능력과 성실성을 겸비한 뛰어난 인재다. 어차피 앞으로 잘할 것이 확실하니 과거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마음이 열리면 본인이 차차 말해 줄 것이다. 지금은 괜한 호기심으로 꼬치꼬치 묻기보다 과거에 신경 쓰지 않는 척을 해서 서황의 마음을 얻는 게 더 나았다.
“좋소. 장사께서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나서 결국 나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 아닌가 싶소. 정서장군부에 귀부하시오. 정서장군께서 그대를 크게 쓰실 것이고 반드시 큰 무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오.”
서황은 말이 없었다.
마초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서황은 군공에 대한 욕심이 강한 자다. 고작 3천 명을 거느린 양봉 휘하에서 기도위로 있으면서 더 큰 기회에 목말라 있을 터였다.
그러던 차에 정서장군 마등의 휘하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으니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황은 생각만큼 흔쾌히 답변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후 서황은 눈앞에 있는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그제서야 결심이 선 듯 말을 꺼냈다.
“공자의 말이 옳소. 그러나 두 가지 조건이 있소. 공자께서 둘 모두를 들어 주신다면 항복하겠소. 그렇지 않다면 서모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오.”
‘이놈은 생긴 건 떡두꺼비처럼 생겨서 뭐가 이렇게 까탈스러워?’
마초는 기가 막혔으나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되물었다.
“호걸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별것 아니오. 조건이 무엇인지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서황이 대답했다.
“첫째, 양봉 장군의 목숨을 보장해 주시오.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 준 은인이시오.”
“그건 어렵지 않소. 양봉 장군이 삼보 지역을 떠난다는 약속만 해 준다면 그리하겠소.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이오?”
“두 번째 조건은…….”
* * *
사흘 뒤, 마가군 둔영.
마등과 마초는 둔영 입구에 팔짱을 끼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마등이 물었다.
“그래서 사흘 뒤에 우리 둔영으로 찾아온다는 말을 믿고 놓아 주었다고?”
“양봉군 군영에 서황이 이끌던 부곡 삼백 명이 있는데 하동에서부터 따르던 부하들이라고 합니다. 곧 죽어도 그들을 데리고 와야 되겠다는데 어쩌겠습니까?”
마등이 피식 웃었다.
“그 서황이라는 자가 오지 않으면 부하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기 딱 좋겠구나.”
“올 겁니다. 아마도…….”
마초는 말끝을 흐렸다.
서황의 요구 조건을 들은 순간 마초는 회귀 전에 들었던 손책의 일화를 떠올렸다. 손책이 강동을 평정할 때 용장 태사자를 얻으면서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고 했다. 손책은 흔쾌히 태사자를 떠나보냈고, 태사자는 약속한 시간에 틀림없이 나타나서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이름이 길이 남게 되었다.
‘손책이 했는데 내가 못 할 건 또 뭐야?’
이런 생각으로 흔쾌히 서황을 떠나보냈다. 그러나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여튼 서황이라는 자도 어지간히 골치 아픈 놈이군. 하도 당당하게 말하길래 설마 괜찮겠지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거 말이 안 되는 상황이잖아? 내 딴에는 과거의 적장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한 건데 이렇게 제멋대로 굴다니…….’
마초는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왔다.
“돌아오면 노예처럼 부려 먹어야겠다.”
“응? 뭐라고 했느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등은 시간을 보기 위해 땅에 꽂아 놓은 장대를 살폈다. 그림자가 다시 지기 시작했다. 약속한 정오가 지난 것이다.
“맹기, 사람을 믿는 건 좋지만 믿어야 할 상황이 있고 의심해야 할 상황이 있는 법이다. 그 서황이라는 자와 전혀 신뢰가 쌓이지 않은 상황에서 다짜고짜 믿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너는 아직 젊으니까 사람에게 한 번 속는 건 괜찮지만 두 번 속으면 속은 쪽 책임인 거다.”
마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먼발치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설마?”
마등과 마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각 정도가 지나자 흙먼지가 가까워지며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구분할 수 있었다.
남들보다 훨씬 큰 체격에 푸른 두건을 쓴 장수가 선두에 서 있었다. 서황이었다.
“와하하하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영웅호걸끼리는 서로 알아보는 법입니다.”
마초는 언제 불안해했냐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둔영 앞으로 다가온 서황이 말에서 뛰어 내렸다. 마등과 마초의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와서 박력 있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군례를 취했다.
“서황이 주공을 뵙습니다.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저를 따르기에 수습해 오느라 시간이 늦었으니 죄를 청합니다.”
마초는 서황이 이끌고 온 부하들을 보았다. 원래는 삼백 명의 부곡을 데려오겠다고 했는데 어림잡아 육백은 넘어 보였다.
서황과 약속한 대로 양봉을 풀어 주기는 했다. 그러나 양봉군 병사들도 참패를 당한 우두머리에게 더 이상 의탁하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서황이 원래 이끌던 부곡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서황을 따라 마등에게 귀부하고 싶어 했다. 서황은 그들 중 백파적 출신을 제외하고 하동의 관군 출신만 추려서 왔는데도 그 수가 육백이 넘었다.
마등은 마치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던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황을 맞이했다.
“관중 최고의 장사가 우리 마가군에 합류했으니 천군, 만마인들 이보다 더 든든할 수 있겠는가? 오늘 그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 이 마모의 큰 복일세.”
마등은 서황의 어깨를 두드리며 연신 격려했다.
그날 저녁, 마가군 둔영에서는 새로 합류한 서황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렸다.
연회가 무르익었을 무렵 장수들과 막료들이 모인 가운데 마등은 인사이동을 발표했다.
“여름 보리가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나 이번 출병의 성공으로 다행히 기근을 면하게 되었소. 공이 큰 이들을 마땅히 치하해야 할 것이오.”
부간을 비롯한 막료들이 후한 포상을 받았다. 방덕은 큰 공을 세운 것을 인정받아 기도위에서 교위로 승진했다.
“기도위 마초는 이번 출병에서 가장 공로가 크다. 능히 일군을 지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니 비장군(卑將軍)으로 삼는다.”
비장군은 장군이라는 호칭이 붙은 직위 중 최하위의 직위이지만, 군문에 들어온 지 1년이 되지 않은 마초에게는 파격적인 직위였다. 약관의 나이로 일약 장군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마등은 또한 서황을 별부사마로 삼아 본인이 이끌던 부곡을 그대로 지휘하게 하면서 비장군 마초의 군에 배속시켰다. 서황을 자신의 휘하로 배속시켜 달라는 마초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마초는 잠시 자리를 떠서 밖으로 나왔다. 서황이 바위에 걸터앉아서 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초가 서황의 옆에 걸터앉자 서황이 축하의 말을 건넸다.
“승진을 경하드립니다, 비장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드리오.”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은 후 마초가 본론을 꺼냈다.
“지금은 아버님이 이각과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오. 내년에는 이각을 치게 될 것이오.”
“짐작했던 대로군요.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그대에게는 큰 공을 세울 시기로 생각될 테지. 해서 말인데 내가 이끄는 군의 연병을 그대가 맡아 보시오.”
“연병을 말입니까?”
“그렇소. 내 휘하의 2천 병력 중 이번에 모집한 신병들과 그대가 이끌고 온 양봉군 출신이 절반이 넘소. 어떻게든 올해 안으로 그들을 강병으로 조련해야 하오. 서 사마에게 연병의 전권을 줄 테니 엄정하게 군율을 세워서 강병으로 만들어 주시오.”
“장군, 저는 항장입니다. 아직 공을 세우지도 못했는데 군사들이 쉬이 명에 따르겠습니까?”
“하하, 내 휘하의 전군을 모아 놓고 별부사마 서황에게 연병의 전권을 맡긴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사람을 쓸 때는 의심이 가면 쓰지 말고,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고 했소. 우리의 만남이 짧았지만, 그대의 기량과 성품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하오. 거절하지 말고 맡아 주시오.”
서황은 감동한 눈치였다. 각진 턱이 파르르 떨렸다.
“비장군께서 이토록 믿어주시는데 소장이 어찌 개와 말의 수고로움을 사양하겠습니까? 반드시 비장군의 군사들을 강병으로 조련할 것입니다.”
“뭐 그 정도를 가지고. 핫핫하하하!”
마초는 호쾌하게 웃었다.
‘이로써 연병에서 해방이구나. 일해라, 서황!’
마초의 검은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황은, 벌써부터 머릿속으로 연병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