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15화 (15/306)

15화. 마등의 경고

양봉군의 추격대는 마초의 매복계에 걸려서 궤멸되었다. 살아 돌아간 자는 열에 하나 정도였다.

대장 양봉과 선봉장 서황이 동시에 사로잡히자 양봉군은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었다. 잔당들은 군영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았고, 몰래 탈주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마초는 양봉군의 움직임을 무시하고 바로 기산 남쪽 기슭의 보조 군량고로 기동했다. 군량고에는 예상을 웃도는 규모의 군량이 있었다. 군량은 밀과 보리를 합쳐서 4만 석에 달하는 양이었다. 만만치 않은 규모의 비단과 금붙이도 있었다. 다 가져가기에는 수레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부간이 이끄는 치중대가 군량고를 접수했다. 치중대는 미오성 앞을 지나지 않도록 기산을 빙 돌아서 견현의 숙영지까지 군량을 운반했다. 새롭게 정서장군부에 편입된 아단부가 군량 운송을 도왔다. 수레가 모자라서 가져가지 못하는 분량은 깨끗이 포기하기로 했다.

미오성을 지키는 중랑장 이몽에게 소식이 전해진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이몽의 방은 명목상은 중랑장의 집무실이었으나 실제로는 궁궐이나 다름없는 호화로운 방이었다. 실제로 동탁은 미오성을 별장으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니 궁궐처럼 화려하게 만든 것이다.

양봉군에서 온 전령은 그 화려한 미오성에서 부복하고 울면서 이몽에게 고하고 있었다.

“장군, 마등의 아들 마초라는 자가 연회를 여는 척하고 양봉 장군을 납치했습니다! 게다가 그 수하들이 지금 기산의 군량고를 털어 가고 있습니다. 마땅히 장군께서 출진하시어 저 밀 도둑놈들을 벌해 주십시오.”

그러나 이몽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 마등의 아들놈은 이제 스무 살 먹은 애송이 아닌가? 그런데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납치를 당했다고?”

“그, 그러합니다.”

“하여튼 양봉도 어지간히 덜떨어진 자로군. 그러게 그런 어중이떠중이까지 받아들일 필요 없다고 내가 간언했었는데, 대사마께서는 그런 얼간이가 뭐가 그리 마음에 드셨는지.”

이몽은 투덜거리기만 하고 요지부동이었다. 전령이 용기를 짜내 다시 고했다.

“하오나 장군, 그들이 발칙하게도 대사마의 비밀 군량고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이는 나라의 물건을 도적질하는 것이니 장군께서 엄히 다스리셔야 할 것으로 아룁니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이제는 마등도 아는데 비밀은 무슨 놈의 비밀 군량고야? 비밀 군량고라고 뭐 대단한 것인 줄 아느냐? 미오성을 건설할 때 인부들 숙소로 쓰던 것을 개조해서 별동대가 쓸 군량이나 보관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별동대가 바로 너희 양봉군 아니냐? 너희 군량을 너희가 지키지 못하고 깡그리 털려 놓고 이제 와서 뭘 어쩌라고?”

“하, 하오나 장군, 이대로라면 마등의 무리들이 군량을 무려 4만 석이나 도적질해 갈 것입니다.”

“4만 석?”

“그러합니다.”

이몽은 옆을 흘끗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가 지금 보유한 양곡이 얼마나 되지?”

“창고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일단 150만 석을 상회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전령의 입이 떡 벌어졌다. 150만 석이면 10만 명이 15년을 버틸 수 있다. 지금 흉년이 들고 있는 관중에서 상상하기 힘든 정도의 양이다.

“하여튼 별것도 아닌 걸로 시끄럽게 하기는. 알았다, 내 일단 출진해서 그 마초라는 놈 얼굴을 좀 봐야겠다.”

이몽은 귀찮은 듯이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고 했다. 마초라는 애송이는 마등의 아들이니 나름대로 무용이나 담력을 갖췄을 것이다.

그러나 이몽이 살아 온 세상이라는 곳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어린놈이 재주 좀 있다고 마음대로 날뛸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이다.

‘그놈이 마등의 아들이니 당장 잡아 죽이면 대사마도 입장이 곤란하겠지. 하지만 놈이 이끌고 있는 부곡을 전멸시키고 몇 대 쥐어박아 주면 버릇을 고쳐 줄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막 나가는 놈인지 얼굴이나 봐야겠군.’

그러나 마초의 얼굴을 보겠다는 이몽의 목적은 실현되지 못했다.

추격대를 편성해서 미오를 나와 기산 방향으로 이동하자, 의외의 인물이 이끄는 대부대가 이몽의 앞을 막아섰다.

“마수성(수성은 마등의 자)이 이곳에는 어인 일이시오?”

이몽과 마등은 진작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이몽 또한 마등처럼 양주 자사부의 일개 군관이었던 자였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양주 자사 경비의 폭정으로 양주가 혼란해졌을 때 마등은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독자 세력화의 길을 택했고, 이몽은 동탁의 휘하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몽인가. 여기에 있으면 오랜만에 자네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다렸네.”

마등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받아쳤다. 이몽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대의 철없는 아들이 사고를 친 줄 알았더니, 그대가 직접 일을 꾸민 거였소?”

“아들의 죄는 곧 아비의 죄나 다름없지만, 아들의 공은 그냥 아들의 공이지. 자꾸 백파적 무리가 얼쩡거리길래 토벌을 좀 시켰는데 나를 닮아서 씩씩하게 잘하더군.”

“수성 형은 양봉이 대사마께 귀부하여 조정의 편장군이 되었다는 걸 알고 하시는 말씀이오?”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저 백파적 무리가 조정의 벼슬을 받은 건 받은 거고 하는 짓거리가 딱 도적떼인데, 이각 대사마께서 설마 약탈이나 하는 도적떼를 수하로 두셨겠는가?”

“허허, 참.”

마등이 능청을 떨자 이몽은 혀를 찼다.

“예전에는 원리 원칙만 말하더니 몇 년 사이에 아주 사람이 못 쓰게 되었구려. 밀 도둑질도 모자라서 사기까지 치려는 거요?”

“도둑질에 사기라면 벼슬아치들이 매양 하는 일 아닌가? 나도 이제 정서장군씩이나 됐으니 좀 벼슬아치답게 변했나 보구만. 그나저나 자네도 내가 조정에 백파적 토벌의 표를 올려서 승인을 받은 건 알고 있겠지?”

“허허, 수성 형…….”

“자자, 회포는 이쯤 풀었으면 됐고, 말싸움 길게 하지 말고 헤어지세.”

마등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껄껄 웃었다.

이몽은 난감했다. 그러나 그로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등은 백파적 양봉을 토벌했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군량은 백파적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노획한 것이 된다. 게다가 마등은 작년에 이미 관중 일대의 백파적을 토벌하겠다는 표를 올려 둔 상태였다. 정서장군이라는 직함도 백파적 토벌을 명분으로 받은 것이다.

여기서 명분을 내세우는 마등을 건드리는 것은 마등 세력과 이각 세력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이몽이 비록 이각의 최측근이지만 전면전을 벌이는 것까지는 그의 권한을 넘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등에게 완전히 물먹은 셈이 되었으니 기분이 나쁜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백파적을 토벌하는 게 수성 형의 일이라고 하셨소? 밀 도둑놈이 있으면 토벌하는 게 나의 일인데, 이것 참 난감하게 되었구려.”

“이몽아.”

마등이 마치 과거 군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친근하게 그를 불렀다. 그러면서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을 몰아 이몽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두 사람이 듣는 대화를 다른 병사들이 못 들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마등군의 막료들은 저러다가 봉변을 당하지 않을지 애가 탔으나 마등은 태연했다.

이몽에게 가까이 다가간 마등이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 크기로 말했다.

“너 진짜 뒈지고 싶냐?”

마등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그가 전하려는 의도는 분명했다. 조용히 꺼지라는 뜻이었다.

이몽은 순간적으로 칼을 뽑고 싶을 정도의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셈이 빠른 자였다. 그래서 칼을 뽑아도 되는지 다시 한번 빠르게 셈을 해 보았다.

‘그랬다간 뒈지겠군.’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마등이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서량에서 하급 군관 신분으로 군웅까지 올라선 자다.

그래서 이몽은 모욕감을 빠르게 갈무리할 수 있었다.

“뒈지기는 싫으니 물러나겠소.”

“잘 생각했네. 역시 자네는 참 셈이 빨라. 중원에서 태어났으면 좋은 관리가 됐을 텐데.”

마등은 이몽의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이몽은 싸울 자리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전군에 퇴각의 명령을 내렸다. 다만 한 마디 싫은 소리는 해 주고 싶었다.

“마수성, 내 오늘은 별수 없이 물러가겠소만 대사마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소. 계속 이럴 수는 없을 것이니 자중하시오.”

마등이 대답했다.

“대사마의 권세야말로 한계가 있지. 계속 누릴 수는 없을 테니 자네가 잘 좀 말씀드리게.”

마등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여전히 여유 있는 미소를 띤 채였다.

* * *

마초는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기산 자락에 있는 아단부의 부락으로 들어왔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양봉과 서황을 사로잡았고, 그로 인해 아군의 피해가 거의 없이 양봉군을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기산의 군량고는 부간이 탈취해서 견현의 둔영까지 군량을 운반하고 있었다. 미오에서 이몽의 추격대가 출격했지만 마등이 직접 막아서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철리길은 부락에서 가장 큰 천막을 마초에게 내어주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마초는 나관중과 늦은 식사를 하고 서황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갑옷을 겹겹이 입었지만, 마초의 몸통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다. 겹쳐 입은 갑옷은 서황의 방패 일격에 두 벌 다 못쓰게 되었다.

“다행히 갈비뼈가 부러지지는 않은 것 같군. 그 짧은 거리에서 나무 방패를 휘둘러서 통철판을 우그러뜨리는 게 정녕 인간인가?”

“옆에서 보는데 제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서황을 단 일 합에 생포했지만 말입니다. 어쩌다 그토록 위험하게 단기접전을 벌일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야 가장 확실하게 생포하는 방법이 단기접전이니까. 나름대로 이길 자신은 있었어.”

“어째서입니까?”

“사실 나는 서황과 단기접전을 해 본 적이 있거든. 한중에서였지.”

“네? 정말입니까? 역사서에는 장군과 서황이 단기접전을 했던 게 기록돼 있지 않아서 저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뭐 역사서에 그런 것까지 기록하겠느냐? 게다가 난전 중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라서 본 사람도 별로 없었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30합 정도 싸우고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끝났다.”

마초는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로 강한 상대와 칼을 맞대면 매 순간이 머리에 새겨지지. 지금의 서황은 나를 처음 보겠지만, 나는 서황의 버릇이나 기술을 다 알고 있는 상태로 싸운 거야. 그때의 경험으로 서황이 어떤 수를 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 그리고 말의 문제도 있다.”

“말의 문제요?”

“서황은 남들보다 덩치가 훨씬 크고 무겁다. 그의 진정한 무예를 끌어내려면 서황을 태우고도 날래게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덩치가 큰 준마를 타야만 해. 한중에서 나와 싸웠을 때는 장군의 신분이라 어지간히 좋은 말을 타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평범한 말을 타고서는 자기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지. 그래서 나는 일부러 아버님의 준마를 빌려 타고 속도에서 우위를 점한 것이다.”

나관중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공자는 무예뿐만 아니라 지략도 대단하십니다.”

“이런 얕은꾀를 지략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보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군. 서황을 불러서 항복을 권해야겠다.”

마초는 천막 안에 술과 안주를 차리고 서황을 끌고 오게 했다. 천막에는 나관중과 철리길, 방덕이 배석했다.

잠시 후, 마가군의 병사들이 굵은 밧줄로 묶인 서황을 끌고 왔다.

“장사를 모셔 오라고 했지, 누가 이렇게 무례하게 끌고 오라고 했느냐!”

마초는 짐짓 소리를 버럭 질렀다. 병사들 중 고참병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사가 힘이 절륜하여 자칫 일을 그르칠까 그랬습니다.”

“뭣이? 네놈이 감히 서 장사를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썩 물러가거라!”

고참병은 잽싸게 서황의 밧줄을 풀고는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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