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마초 대 마등
마초는 계속 술을 마셨다.
10년 전에 죽는 모습을 지켜본 아내를 정인으로 다시 만났다. 그리고 바로 헤어졌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이 이런 사정을 알 리 없었다. 마초의 친구 부간과 이회는 마초가 단순히 정인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줄 알고 기꺼이 대작해 주었다. 세 사람의 술자리가 파하는 데는 무려 이틀이 걸렸다.
하여 마초가 집에 돌아간 것은 사흘간의 휴가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마초는 아직 혼례를 올리기 전이었기 때문에 아버지 마등의 저택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최근에는 신병 모집으로 인해 둔영의 일이 바빠서 마등과 마초 모두 집에 거의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마초는 한 달여 만에 처음으로 집에 오는 터라 가족들은 오랜만에 마초를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초의 입장에서는 30년 만에 다시 보는 젊은 시절의 집안 풍경이었다. 마초는 먼저 마등의 처 한씨에게 인사를 올렸다.
“초가 어머니를 뵙습니다. 강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마지막으로 본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구나. 풍익에서 생사의 위기에 처한 아버지를 구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이제 어엿한 무장이 되었구나.”
“우연히 때가 맞아 일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서량 제일의 영걸이신데 어찌 제가 아버지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겠습니까?”
한씨는 마등이 십여 년 전에 들인 후처였다. 마등은 마초의 생모 강씨가 병으로 죽고 나서 인근의 규수 한씨를 후처로 맞았다. 한씨는 현명하고 온화한 성품이라 마초를 비롯한 전처 소생의 삼형제와 딱히 부딪힐 일이 없었다. 마초와는 살가운 모자 관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초가 한씨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조반을 드시고 나서 후원에서 무예 수련을 하고 계신다. 수련을 방해하는 걸 싫어하시니 쉬다가 수련이 끝나면 인사드리렴.”
“그러면 이제 거의 끝날 때가 되었군요. 후원에서 잠시 기다렸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마초는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 식사 후, 수련을 시작했다면 해가 중천에 뜬 지금은 마무리할 때가 되었을 것이다. 후원에는 마등이 장도를 들고 마가도법의 투로를 수련하고 있었다. 마초는 마루 한켠에 앉아 마등의 수련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등의 연무는 질박하고 강건했다. 대를 이어 내려오며 화려한 투로가 잔뜩 생긴 마가도법이었지만, 마등은 불필요한 동작을 전부 쳐내고 실전에 바로 응용 가능한 동작들만 남겨서 움직임을 간소하게 만들었다. 화려한 동작은 전혀 없었으나 그만큼 강한 힘이 있었다.
‘그래서 더 멋진 도법이 됐지. 역시 아버지다.’
마초는 마등의 연무하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등은 마초의 도법 스승이기도 했다. 석 자의 도신과 두 자의 칼자루를 가진 5척 장도도 마등이 만든 병기였다. 날이 살짝 휘어져 있어서 말 위에서 돌진하며 베기에도 적합하고, 긴 길이로 인해 땅 위에서 검을 상대하기도 편한 무기였다.
그러나 그만큼 사용법이 까다롭다는 단점이 있었다. 무재를 타고난 마초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마휴와 마철은 다른 병기를 더 선호했다.
마초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투로를 연마하던 마등이 입을 열었다.
“맹기, 거기서 멍하게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라.”
“아버지, 제가 온 걸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데 모를 수가 있나. 오랜만에 얼마나 늘었는지 대련을 해 보자.”
“그러시다면 한 수 배우겠습니다.”
마초는 후원으로 나아가서 마등의 앞에 섰다.
마등이 대련용 장도를 건넸다. 실전용과 똑같은 길이와 무게로 만들었지만, 날을 완전히 죽이고 천을 감은 물건이었다. 마초는 속으로 단단히 다짐했다.
‘날은 죽였지만 타격력은 살아 있어서 극도로 집중하지 않으면 대련 상대를 다치게 한다. 조심해야겠군.’
목도로만 대련하게 되면 쇠로 된 병장기가 부딪히는 실전의 감각을 살리지 못한다. 대련용 장도는 연습용으로만 쓸 수 있는 나쁜 습관이 들지 않도록 고심 끝에 마등이 만들어 낸 물건이었다.
마초는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양손으로 장도를 쥐고 마등의 앞에 섰다.
이틀에 걸쳐 과음을 하면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마초가 새롭게 얻은 20세의 육체는 놀라운 회복력을 가지고 있었다. 장도를 쥐고 자세를 취하자 정신이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휘이잉.
마등이 장도를 들고 자세를 취하자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마초는 위압감이 바람이 되어 얼굴을 때리는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 한 방울 남은 취기마저도 날아가고 온전히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선수는 마등이 취했다.
“핫!”
마등의 기합 소리와 함께 5척 장도가 짧은 호를 그리며 마초의 어깨를 향해 비스듬하게 내리쳐졌다.
‘망설이면 당한다!’
엉거주춤한 자세로는 절대 마등 같은 고수의 칼을 피할 수 없다. 마초는 뒷발을 힘차게 밀면서 앞으로 전진했다. 마등을 향해 오히려 뛰어든 것이다.
퍽!
두 사람의 칼이 서로 얽혔다.
퍽. 퍽. 퍽.
두 자루의 칼이 흐름을 타면서 세 번 부딪혔다. 같은 도법을 수련한 스승과 제자는 서로의 공격 방향을 뻔히 읽고 있었다.
칼이 세 번째 부딪혔을 때, 마초가 속도를 올렸다. 대련용 장도가 허공을 갈랐다.
부웅!
칼날에 감아 놓은 천이 찢어질 듯 우는 소리를 냈다. 네 번째 부딪힘을 위해 마등이 칼을 들어 올렸을 때, 마초는 이미 자신의 칼을 마등의 어깨에 얹어 놓고 있었다.
첫 번째 승부가 났다.
“제법이구나.”
“매일 정진하고 있으니까요.”
마등과 마초는 짧은 문답으로 방금 전 대련의 복기를 끝냈다. 그리고 동시에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나서 두 번째 승부를 겨룰 준비를 했다.
두 번째 선수는 마초가 취했다.
‘젊어진 몸이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시험해 봐야겠군. 이번에는 상단 자세로 상대한다.’
마초는 장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왼손으로 칼자루 끝을 쥐고 오른손으로 칼자루 위쪽을 쥔 상단 자세였다.
그리고 뒤에 둔 왼발을 힘차게 밀었다. 마등의 어깨를 노리고 장도를 내려쳤다.
퍽!
대련용 장도끼리 붙으며 묵직한 타격음이 일었다. 마등은 단단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일단 허초를 몇 개 섞어서 아버지의 반응을 봐야겠다.’
상단 자세를 잡고 위에서 내려치는 마초와 막고 반격하려는 마등 사이에 몇 번의 심리전이 오갔다. 마등은 마초가 발출하는 수에 유혹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버지가 허초를 쓰시겠군.’
생각대로였다. 이제는 마등이 칼끝을 교묘하게 흔들며 마초를 향해 눈속임을 걸었다. 저 움직임에 반응해서 움직이면 바로 마등의 실초가 날아올 것이다.
마초는 속지 않았다.
마초에게 빈틈이 없자 마등은 빈틈을 보기 위해 반보 뒤로 물러났다. 마초가 노리던 그 거리였다.
‘좋아!’
마초는 마등이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재빨리 왼발을 앞으로 밀었다. 왼손과 왼발이 동시에 앞으로 나간 좌상단의 자세를 취했다. 방어에는 취약하지만, 공격거리가 길어지는 자세였다.
탁.
마초가 뒤에 둔 오른발을 힘차게 굴렀다. 발을 구르는 힘으로 전진하며 머리 위로 치켜든 장도를 내리쳤다. 마등은 칼을 들어 마초가 내리치는 칼을 막았다.
퍽!
칼과 칼이 부딪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마초의 일격은 마등의 방어를 뚫어냈다. 막는 칼째로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힘이 있는 공격이었다.
두 번째 승부가 났다.
“허허, 이것 참. 자칫하면 세 번 연달아 패하겠군.”
세 번의 대련에서 계속 같은 결과가 나오면 우열이 갈린 것으로 본다. 마가도법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마등의 얼굴 표정이 심각해졌다. 곧바로 세 번째 대련이 시작되었다. 마등이 휘두르는 장도의 기세가 한층 강맹해졌다.
드드득!
두 사람의 대련용 장도가 격렬하게 부딪혔다. 마등은 체격과 힘의 우위를 이용하기 위해 칼을 붙인 채 힘싸움을 걸었다. 칼날에 두른 천은 너덜너덜해지고 칼날끼리 긁히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렇다면… 좋아. 그걸 해 봐야겠군.’
마초는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칼 너머로 마등이 가해 오는 힘을 느끼기 시작했다.
몸이나 칼을 밀착시킨 채 상대의 힘을 느끼는 기술. 먼 훗날의 무술가들이 문파에 따라 합기(合氣), 또는 청경(聽勁)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기법이었다. 지난 생에서 마초에게 수많은 승리를 안겨 준 특기이기도 했다.
스르륵.
마초는 청경의 기법으로 마등이 가하는 힘의 방향을 읽어서 받아넘겼다. 그리고 화경(化勁)의 기법으로 마등의 힘을 역이용해 칼을 측면으로 넘겼다. 칼 너머로 느껴지는 마등의 무게중심이 휘청이자 마초는 폭발하듯 힘을 쥐어짜서 칼을 크게 휘둘렀다.
텅!
마등이 쥐고 있던 장도가 마초의 화경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높이 날았다. 마등이 놓친 장도는 빙글빙글 돌아 바닥에 떨어졌다.
세 번째 승부가 났다.
마등은 몹시 놀란 듯, 잠시 땅에 떨어진 장도를 바라보다 이내 마초에게 시선을 돌렸다.
“맹기, 정녕 놀랍구나.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늘었느냐?”
“아직 부족합니다. 대련에서는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전에서 지금 가진 기술을 다 쓰기 위해서는 완력이 더 필요합니다.”
지난 생에서 마초가 처음으로 마등을 이긴 건 스물두 살 때였다. 지금은 아직 스무 살이다.
‘그러니 아버지도 내가 이렇게 강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40년 수련을 쌓은 고수가 20세의 몸에 들어가 있다. 이 정도면 체격이 완성되기 전인 지금 상태로도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넉넉히 들 것이다. 어지간한 상대에게는 질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아직 더 강해질 수 있다. 지금은 힘과 체격이 좀 부족하지만 앞으로 2, 3년이면 몸이 완성될 터. 그때가 되면 내가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것이다.'
마등은 마초의 말을 듣고 감탄했다.
“그것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 더 대단하구나. 지금의 너라면 도법으로는 아마도 서량 제일일 것이다.”
마초는 이렇게 대답하려고 했다.
‘아마도가 아니라 실제로 제가 서량 제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몸이 젊어졌으니 그때보다 더 강하겠죠.’
그러나 입에서는 조금 다른 말이 나왔다.
“우웨엑!”
뒤늦은 구토가 올라왔다. 이틀간 마신 술이 다 깨기도 전에 무예 스승을 상대한 대가였다. 마초는 후원 바닥에 토사물을 쏟아냈다.
* * *
마초의 숙취가 대강 수습된 후 두 부자는 집안 한켠으로 자리를 옮겨서 마주 앉았다. 부자 모두 서로에게 할 얘기가 있었다.
마등이 먼저 용건을 꺼냈다.
“사대부들은 집안의 격을 따져서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혼례를 치른다지만 네 할아버님도, 나도 젊은 날 정인과 혼인했다. 너의 정인 양 소저는 이름난 선비 양 선생의 딸이고, 너도 이제 혼례를 치를 만큼 나이가 찼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양 선생 댁에 혼담을 넣어 볼까 한다.”
“아버지, 사실은…….”
마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원과는 헤어졌습니다.”
“헤어졌다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그저 남녀의 일입니다. 각자 나이도 찼으니 혼담은 다른 상대와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군문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금은 혼례를 치를 시기가 아닌 듯합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혼인하는 게 어떠냐? 네가 겉보기에는 장군 아들이고 인물도 좋고 하니 혼담이야 많이 들어오겠지만 네 성질머리에 화목하게 지낼 만한 규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혼인이란 가문의 격만 따질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우선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아버지 친아들 얘기하시는 거 맞죠?”
“당연하지. 양 소저가, 하원이가 정히 너는 싫다고 하더냐?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다만.”
“결과적으로 저한테 꺼지라고… 아니, 제가 싫다고 하기는 했지요. 어쨌든 혼례는 제가 어엿한 무장이 된 후 진행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제 여인과 정을 나누는 것에는 별 흥미가 없습니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관중이나 서량 호족의 여식과 정략혼을 했으면 합니다.”
마초는 지난 생에서 이미 혼례를 치러 보았다. 그러나 젊은 날의 열정으로 진지하게 시작했던 결혼생활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마초는 자기 눈앞에서 양하원이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두 번째 삶의 기회가 주어진 이상 더 이상은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혼례는 서로 간에 정이 없더라도 양하원이 아닌 다른 사람과 치르고 싶었다. 기왕 정 없는 혼례를 할 거라면 호족의 여식과 하는 편이 가족들의 장래를 위해 좋을 터였다.
마등은 그런 아들의 태도가 안타까웠으나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혼사 문제는 몇 년 후에 다시 논의하자꾸나.”
마등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네 도법은 이 아비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이제는 확실한 너의 우세다. 네 나이 때는 실력이 빨리 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이 스물에 청경과 화경을 자유롭게 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나도 네가 삼십 년이나 되는 긴 꿈을 꾸었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겠구나.”
“제 꿈을 믿어주신다니 다행입니다. 사실은 그 꿈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곧 관중에 기근이 닥칠 겁니다.”
기근이라는 말을 듣자 마등이 미간을 찌푸렸다. 우뚝한 콧날을 따라 굵은 주름이 패었다.
칼날과 화살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굶주림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