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서량식 협상
이틀 후.
마등과 마초는 아침 일찍 말을 달려 둔영을 나섰다. 만년현에 있는 팽가장에 닿은 것은 해가 중천에 걸릴 무렵이었다.
“팽가가 곽사의 매부라더니 위세가 좋긴 좋은가 봅니다.”
“그러게 말이다. 집이 아니라 요새나 다름없구나.”
팽가장은 거대한 저택이었다. 중간중간 망루가 서 있고 무장한 사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보기만 해도 위축될 만큼 위세가 당당했다.
하지만 마등과 마초는 군벌로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다. 전혀 위축되는 기색 없이 하인의 안내를 받아 태연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정서장군 오셨습니까!”
마등이 온다는 기별을 받고 팽가는 때맞춰 흐드러지게 술자리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주리는 일은 전혀 모른다는 듯, 팽가가 준비한 거대한 술상에는 향기로운 술과 귀한 요리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과 화사하게 차려입고 춤을 추는 무희들은 덤이었다.
“정서장군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왕림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으하하하!”
팽가는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마등에게 인사를 건넸다. 비대한 몸집에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얼굴에서는 개기름이 흐르는 자였다.
“마모가 풍익에 왔으면서 팽 대인께 인사드리는 것이 늦었소이다. 부디 넓게 혜량해 주시오.”
팽가나 마등이나 세상살이에 능숙한 자들이다. 서로의 꿍꿍이는 따로 있지만 천연덕스럽게 몇 마디 의미 없는 덕담을 주고받았다.
마초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음식을 나르고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들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인상이 험악했다. 옷깃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팔뚝이 다들 굵직했다.
딱 봐도 도부수(刀斧手, 큰 칼과 도끼를 쓰는 무사)였다.
‘도부수가 약 백여 명. 그리고 저택 안의 하인들도 유사시 병사가 될 수 있을 테니… 대략 삼백 명쯤인가.’
왕승이 마등을 치기 위해 동원했던 병력만 삼백 명이다. 팽가의 세력이 서너 개 현에 걸쳐 있다 하니 다 합치면 천 명은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팽가장에 있는 무사들은 생각보다 숫자가 적었다.
‘사실 적은 수는 아니지. 우리는 80기에 불과하니까. 이 정도 병력이면 만약의 사태가 발생해도 우리 마가군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팽가는 상식적인 판단을 했다. 그러나 지금 마가군을 이끌고 있는 마등, 마초, 방덕에게 과연 상식이 통할 것인가?
한편 마등과 팽가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본론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팽 대인께서 오해가 있어서 본관을 죽이려 했으나, 이제 오해는 풀린 듯하오.”
“이를 말씀이십니까? 앞으로는 정서장군께서 섭섭지 않으실 만큼 뒤를 봐 드리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오. 그래서 말인데.”
마등은 잘생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본관이 양식이 조금 필요하오. 마침 보리 수확철이니 보리가 좋겠군.”
“조금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지요?”
“1만 석.”
마등의 말을 들은 팽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농담이시지요?”
“진심이오.”
“그… 정서장군. 1석이면 1명이 1년을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그렇지요?”
“그렇소만.”
“그러니 1만 석이면 1만 명이 1년을 먹을 수 있는 양이라는 말입니다.”
“마침, 내 수하가 1만 명쯤 되니 하는 말이오.”
마등이 뻔뻔하게 대답하자 팽가는 기가 찼다.
“지금 같은 흉년에 보리 1만 석이 어디 있습니까? 소인도 흉년에 대비하여 닥치는 대로 보리를 사들이고 있으나 5천 석도 모으지 못했습니다. 정서장군, 재물이 필요하시다면 소인이 금이나 비단을 내서 도와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곡식이라면 당장은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팽가는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대면서 곡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누가 들어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마등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팽가를 보며 씨익 웃었다.
“본관이 팽 대인께 설명을 제대로 못 드린 모양이오. 본관은 곡식 1만 석이 필요하다고 했소.”
팽가도 만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아무리 정서장군의 청이라도 없는 곡식을 만들어 낼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가? 아쉽군. 잠깐만 다시 생각해 보시오.”
“다시 생각하고 자시고…….”
그때, 마등의 옆에 시립해 있던 청년 장수 하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팽가가 청년을 보며 물었다.
“장수께서는 누구시오? 소인에게 용건이 있으시오?”
“정서장군을 섬기는 방덕이라고 합니다.”
방덕은 그렇게 대답한 뒤 마등을 쳐다봤다. 마등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덕도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별안간 팽가의 머리를 붙들고 한껏 쳐들었다가 탁상에 내리찍었다.
뻐억!
“으어억!”
팽가의 굵은 비명 소리가 울렸다. 방덕은 개의치 않고 팽가의 머리를 치켜들었다 탁상에 내리찍는 동작을 네 번 반복했다.
뻑! 뻑! 뻑! 뻑!
“꺄아아악!”
“이… 이놈이! 어르신에게서 손을 떼지 못할까!”
갑작스럽게 구타를 당한 팽가의 머리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술 시중을 들던 무희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고, 일꾼으로 위장하고 여기저기서 일하던 도부수들이 일제히 칼과 도끼를 뽑아 들었다.
그런 도부수들 앞으로 마초가 나섰다.
“정서장군께서 팽 대인과 협상 중이시다. 아랫것들은 방해하지 마라.”
“협… 협상이라고?”
마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서량에서는 원래 이렇게 협상을 한다네.”
도부수들이 마초의 너스레를 들어줄 리 만무하다. 저마다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칼과 도끼를 뽑아 들었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호령했다.
“어르신을 구해야 한다. 먼저 저 어린놈부터 쳐라!”
팽가가 거느린 도부수들이 마초 앞으로 나섰다. 마가군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바탕 큰 싸움이 벌어지려는 찰나, 마초는 5척 장도를 뽑고 달려 나갔다. 목표는 적진 한가운데였다.
퍽!
도부수들 사이로 뛰어든 마초가 장도를 한 번 크게 휘둘렀다. 한 번 참격에 두세 명의 팔다리가 절단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도부수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마가군. 쳐라.”
“우와아아!”
마초의 호령과 함께 마가군 병사들이 싸움에 뛰어들었다.
유력 호족인 팽가에게 도부수로 고용될 정도면 어지간히 싸움에 이골이 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지휘하는 도부수의 우두머리는 경악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대체 이놈들은…….”
마가군 병사들은 그런 도부수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천하의 어느 군대보다도 싸움에 익숙한 서량병들, 그중에서도 마초와 방덕의 휘하에 있는 군사들인 것이다.
더군다나 가장 위험한 것은 마초였다. 앞장서서 도부수들 사이로 뛰어들어 장도를 휘두르며 진형을 무너뜨렸다. 마초가 휘두르는 칼날이 가는 곳마다 어김없이 팔이나 다리, 머리가 하나씩 떨어지고 사방으로 선혈이 튀었다.
그 와중에 용감한 도부수 하나가 마초에게 접근했다. 도부수는 왼손으로 마초의 멱살을 붙들고 오른손으로 도끼를 치켜들어 마초를 겨눴다.
“이놈, 무예 좀 익혔다고 전장이 만만해 보이더냐? 네놈 도법은 대단하다만, 전장에서는 이렇게…….”
“변수가 많아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그렇지 않나?”
마초는 자신의 멱살을 붙든 용감한 도부수를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번개같이 빠른 동작으로 도부수의 어깨에 팔을 끼워 넣고 비틀었다.
우드드득.
“으…으어어억?”
팔이 기묘하게 꺾인 도부수가 고통과 놀라움이 섞인 신음 소리를 뱉었다. 마초는 어깨에 끼운 팔을 그대로 돌려 아래쪽으로 젖혔다.
빠각.
어깨 관절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도부수의 비명 소리가 저택 안을 울렸다.
“나이가 어려 보이니 도법만 잘할 거라 생각했나? 도, 검, 창, 권법, 그리고 금나술. 뭐든지 자신 있는 걸로 덤벼 봐라.”
마초는 겉보기로는 스무 살 정도의 젊은이일 뿐이다. 도부수들은 그가 40년간의 수련과 수많은 전장 경험을 쌓은 고수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없었다.
팽가의 도부수들은 마초에 의해 한 번 사기가 꺾이자 걷잡을 수 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흘긋 본 방덕은 이내 자신이 할 일에 집중했다.
빠악!
“끄아아악!”
팽가의 안면을 탁상에 내리치며 일부러 조준을 살짝 비틀었다. 모서리에 입 언저리가 닿아 생니 한 개가 부러져서 팽가의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쯤 되자 팽가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마등을 향해 외쳤다.
“…장군! 정서장군! 그저 살려 주십시오.”
“그래? 그대는 나를 죽이려고 했는데, 내가 그대를 살려야 할 이유가 있는가?”
“대, 대신 정서장군께서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 드리리다.”
“그렇다면…….”
마등은 손을 들었다. 중지의 신호였다.
“공격 중지!”
여기저기서 소교들이 복창했다. 팽가장의 도부수를 다 도륙할 것처럼 거칠게 몰아치던 마가군 병사들은 순식간에 병장기를 거두고 뒤로 빠졌다.
공격이 멈춘 것을 보고 마등이 말을 이었다.
“정서장군에게는 전쟁을 위해 곡식을 징발할 권한이 있지. 이곳 팽가장에서 보리 1만 석을 징발한다. 오늘은 이 정도로 넘어가도록 하지.”
“크, 크윽… 으흐흑…….”
팽가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 전 정서장군 암살을 기도한 호족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마등은 언제 수하들을 시켜 싸움을 벌였냐는 듯,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비단 수건으로 팽가의 땀과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짐짓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팽 대인께서 군량을 융통해 주시겠다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오. 그런데 분명 아까는 팽가장에 1만 석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지금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팽가는 엉망이 된 얼굴을 닦고 몇 번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이곳 관중은 흉작으로 곡식을 구하기 어려우나, 한중 땅은 흉작이 들지 않았습니다. 보통 관중에 흉년이 들면 한중에서 곡식을 비싼 값에 팔기 위해서 상단이 옵니다. 금년도에도 한중태수가 보낸 상단이 보리를 팔러 곧 이곳으로 올 예정입니다.”
“한중이라면 가뭄과 홍수가 거의 없는 땅이지. 그러나 한중에서 관중까지는 길이 험해서 곡식을 운송하기 어렵지 않소? 게다가 이곳 풍익까지 오려면 중간에 부풍과 장안을 지나야 하는데, 지금은 그곳에 도적떼가 창궐하고 있는 형편이오. 도적떼를 피해 여기까지 군량을 운송할 수 있는 길이 있겠소?”
“포수를 거슬러 오는 물길이 있습니다. 험한 포야도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곡식이 온전히 도착하지는 못하겠지만 지금은 식량이 워낙 귀하니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부풍 일대의 도적떼가 문제가 되는 건 맞지만…….”
팽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곽 장군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습니다. 한중태수가 파는 곡식을 열흘 뒤, 포야도 입구에서 제가 인수하기로 하였습니다. 곽 장군의 군사들이 호위할 테니 도적떼는 이 곡식을 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곡식은 일만 석 분량입니다.”
“하하, 역시 팽 대인께서는 통이 크시오. 그렇다면 본관이 그 곡식을 인수해서 정서장군부의 군량으로 쓰겠소. 대인의 은혜는 잊지 않으리다.”
마등은 이야기를 다 듣자 굳은 표정을 풀고 껄껄 웃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마치 협상을 하는 척 팽가를 방심시켜서 호위 병력을 줄이고, 마초의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준 뒤 아주 유리한 조건을 끌어냈다. 흉년을 버틸 수 있는 군량을 얻게 됐으니 마등이 흡족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
한편 마초는 환하게 웃는 마등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생에서 아버지는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돌아가셨다. 아우들도, 처자식도 마찬가지다. 이번 생에는 결코 그런 일이 생기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가족을 지킬 것이다.”
부귀, 영화, 명성이 아닌 가족을 위해 싸울 것이다.
마초는 자신도 모르는 새 속마음을 입 밖으로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