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두부를 만든 자
둔영에는 뜻밖의 인물이 도착해 있었다.
“풍익군의 연사 장기, 자는 덕용이라 합니다. 평소 정서장군을 흠모하여 만나 뵐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모처럼 시간이 나서 찾아뵈러 왔는데 길이 엇갈렸습니다. 그래도 한 번 인사는 드리고 가려고 이렇게 기다렸습니다.”
장기는 이십 대 중반쯤 된 청년이었다. 투박한 외모와 왜소한 체격을 보면 영락없이 평범한 하급 관리처럼 보였지만, 사실 머리가 비상하고 배포가 두둑한 자였다.
삼국지 위서 장기전에 따르면, 장기는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명문가 출신들과 교류하기 위해 젊은 시절부터 상급 관리들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바쳐 가며 인맥을 쌓았다. 몇 년 후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결국 무재로 천거되어 현령이 된다.
삼십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온 마초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장기… 이 자를 이렇게 다시 보다니.’
마초는 지난 생에서 장기를 두 번 본 적이 있었다.
건안 7년(202년), 원소의 부하 곽원이 관중으로 쳐들어오자 장기가 마등의 군영을 찾아 와 곽원을 칠 것을 설득한 적이 있었다. 이때 곽원과의 싸움을 통해 마초가 중원에 이름을 알렸다.
건안 16년(211년), 마초가 서량의 군벌들을 이끌고 봉기했을 때 마초와 싸우러 온 조조군의 적장이기도 했다.
‘이 자가 장안 일대의 행정을 장악하고 병참을 지원했었다. 이 자의 수완이 아니었으면 내가 조조에게 이겼을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딱히 묵은 감정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문관인 장기와 전장에서 직접 부딪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더 미운 놈이 너무 많은데 이런 자들까지 일일이 미워하면 세상살이가 너무 피곤하지 않나. 그나저나 이 자가 이때 풍익군에서 하급 관리로 있었구나. 이때 이미 아버님을 만나서 인맥을 쌓아 두려고 했었나 보군.’
원래의 역사에서는 이날 왕승이 마등을 습격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만남이 무산된 모양이었다.
마등 또한 밑바닥에서 군벌의 수장까지 올라온 자였다. 인맥 관리에 능하고 또 중요시했다. 포로의 처분을 일단 미뤄 두고 장기를 응대했다.
“왕승을 묶어두고 두 명이 함께 지켜라. 일단 장 연사와 인사를 하고 심문해도 늦지 않다.”
장기는 마등에게 선물할 붓과 서판 같은 물건들과 함께 간단한 술과 안주를 들고 왔다. 해가 저물었으니 장기는 군막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였다. 마등의 군막에서 장기가 가져온 술과 안주로 조촐한 주안상이 차려졌다.
마초의 눈에 장기가 가져온 술안주 하나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하얀 덩어리였다. 고기도 떡도 아닌 것이 젓가락을 대자 부드럽게 잘리는 음식이었다.
마초는 하얀 덩어리를 잘라서 입에 가져갔다. 물기를 많이 머금은 부드러운 식감의 음식이었다. 텁텁한 냄새를 참고 입에 넣으니 처음 맛보는 고소한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마초는 50평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 촉한에서 표기장군의 자리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다. 궁중의 화려한 연회와 산해진미에도 익숙했는데, 그런 그에게도 이 하얀 덩어리는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그리고 아주 맛있군. 이건 무슨 음식이지?’
마등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장기에게 음식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장 연사, 이 하얀 덩어리는 무엇으로 만든 음식이오? 처음 보는 음식인데 참으로 맛있구려. 매일 먹고 싶은 맛이오.”
“정서장군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입니다. 이것은 콩으로 만든 것입니다. 콩물을 끓였다가 식혀서 굳히면 이렇게 덩어리가 지게 됩니다. 이 음식을 알려 준 사람은 두부라고 부르더군요.”
“두부라… 참으로 훌륭한 맛이군. 비싼 고기나 생선이 아니라 콩으로 만들었다면 농사 짓는 백성들도 충분히 먹을 수 있겠구려.”
“과연 정서장군께서는 백성을 먼저 생각하시는군요. 실제로 제가 있는 고릉현에서는 이 두부를 만들어 먹는 백성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불과 몇 달 전에 어느 청년이 만들어 낸 것인데, 맛이 너무나 훌륭하여 몇 달 만에 인근의 현으로 퍼져나가고 있지요.”
“그 청년이 누구요?”
“고릉현에 나생이라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객점에서 잡일을 하던 청년인데, 어느 날 열병을 앓고 나서 정신이 이상해졌는지 뜻 모를 소리를 하기 시작하더군요. 자신이 천 년 후의 세상에서 왔다고 말입니다.”
“천 년 후의 세상에서?”
“예, 그 청년이 열병이 나아서 일어난 후 자기가 미래에서 즐겨 먹던 음식이라며 만든 게 두부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마초는 귀가 번쩍 띄어 다급히 되물었다.
“장 연사, 그 청년이 열병을 앓은 후 사람이 바뀌었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마 도위. 처음에는 열병을 앓아서 머리를 다친 모양이라고 다들 안쓰럽게 생각했는데 이게 심상치가 않더란 말입니다. 나생은 원래 까막눈이었는데 앓다 나은 다음 날부터 글을 잘 쓰더군요. 두부 같은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만드는 것도 그렇구요. 사람들은 나생에게 귀신이 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초 자신은 삼십 년 후의 세상에서 회귀했다. 만약 그가 진짜로 천 년 후의 세상에서 회귀한 사람이라면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단서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 나생이라는 사람을 만나 봐야겠습니다. 고릉현의 객점에 가면 만날 수 있습니까?”
장기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팽가장에 끌려가서 두부를 만들고 있지요.”
“팽가장……?”
팽가장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마등의 눈썹이 꿈틀했다.
마등이 장기에게 말했다.
“내가 군량을 구하러 지양현에 온 것은 장 연사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오.”
“물론입니다, 정서장군.”
“지양현에 와서 보니 보리 작황이 내가 있던 천수군 농현보다 훨씬 낫더이다. 그런데 이 일대의 부호들은 하나같이 보리 수확과 함께 팽가장에 보리를 팔기로 한 상태라서 곡식을 융통하는 게 쉽지 않았소. 팽가장의 주인이 누구이길래 이 일대의 곡식을 다 사들이는 것이오?”
장기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 또한 나라의 녹을 먹는 자로서 말씀드리기 두렵고 부끄럽지만, 정서장군을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장기가 팽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팽가장의 주인 팽가는 오랫동안 풍익군에서 터를 잡고 살아 온 호족입니다. 원래부터 땅과 재물이 많았고, 군의 관리들과도 긴밀하게 유착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자기 땅에서 농사짓는 백성들을 마음대로 때려죽여서 원성이 자자했지만, 군의 태수들에게 뇌물을 많이 바쳐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흔하다면 흔한 자들이지. 그런데 아무리 군의 관리들이 뒷배에 있다고 해도 흉년에 곡식을 사들이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오. 내가 보기로는 이곳 부호들이 팽가에게 곡식을 팔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어 보였소.”
“바로 보셨습니다. 이제 팽가의 뒷배는 풍익군의 관리들 따위가 아니라 조정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조정의 최고 권력자라면…….”
“표기장군 곽사가 팽가의 매부입니다. 곽사가 아직 무부였을 때 팽가가 자기 누이를 시집보냈지요.”
마등과 마초가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표기장군 곽사.
원래 서량에서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치던 무장이다. 동탁의 휘하에서 종군하다가 졸지에 조정의 고관이 되고, 동탁 사후 이각과 눈이 맞아 조정을 장악하고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사내다.
마등과는 평소에도 그다지 감정이 좋지 않은 사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팽가는 곽사의 처남이 되니, 작년부터는 군의 관리들이 팽가의 눈치를 보겠군.”
“맞습니다. 곽사가 조정을 장악한 이후로 팽가는 실질적인 풍익의 왕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호족들을 트집을 잡아 죽이고 그 땅과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곽사에게 병사들을 얻어 와서 자신의 사병으로 삼았는데 이들이 매일 민가를 돌아다니며 노략질을 하고 있고, 국가에 내는 세곡 외에 자기가 마음대로 백성들에게 상납을 받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마초가 끼어들었다.
“관부도 팽가의 패악질을 전혀 견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팽가는 관부 위에 있습니다. 이곳은 장안에서 가까우니 여차하면 곽사가 달려올 수 있는 거리입니다. 팽가가 아무리 패악질을 해도 곽사가 무서워서 관부에서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인근 현의 현위 몇몇은 팽가에게 붙어서 사병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재물을 풀어서 국가의 군대를 자신의 사병처럼 쓰고 있는 것이지요. 나라의 녹을 먹는 현위라는 자들이 집집마다 돌면서 팽가장에 상납할 공물을 공출하고 다니는 꼴을 보면 속에서 불이 납니다.”
마초와 마등이 서로 마주 보았다.
“지양현위 왕승 또한 그런 놈들의 하나겠구나.”
“그래서 현위 휘하의 군졸들치고는 무장 상태가 좋았던 듯합니다. 그런데 대체 왜 아버지를 습격했을까요?”
“그것은 차차 알아보자. 하여튼 시절이 하 수상하니 장 연사가 심려가 크시겠소.”
“이까짓 하찮은 벼슬을 던지고 초야에 묻혀 살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합니다.”
마초의 기억 속에 있는 장기는 노회한 사내였다. 반면 지금 마초의 눈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20대의 장기는 아직 젊어서인지 쉽게 취해서 속에 있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제법 의분도 있어 보였다.
‘쓸 만한 자다. 과거의 악연은 잊고 친교를 쌓아 두는 것이 좋겠다.’
마초는 장기와 술잔을 기울이며 과장된 언사로 장기를 칭찬하고 호감을 드러냈다.
마등은 그런 마초의 모습이 상당히 놀라웠다.
‘맹기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불같은 승부욕은 있지만, 항상 포용력이 부족하지 않았던가? 꼭 사십이 넘은 사내처럼 노련하구나.’
마초는 짐짓 친밀한 척 장기와 말을 나누고 있었다.
“덕용(장기의 자), 그대의 재주라면 언젠가 나라에서 크게 쓰일 날이 있을 것이오. 만약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면 내가 크게 쓰이도록 만들어 드리겠소.”
“맹기, 말이라도 고맙소. 한낱 연사의 몸이지만 그대가 나를 높이 봐준 것은 잊지 않겠소.”
술자리가 저물 때까지 마초는 장기와 교분을 쌓았다.
* * *
술자리가 파한 밤, 마등과 마초가 군막에 마주 앉았다. 지금부터 낮에 포로로 잡은 지양현위 왕승을 심문할 참이었다.
군막에 끌려 온 왕승은 낮에 군사들을 이끌고 마등을 들이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마등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정서장군, 소장이 그릇된 판단을 하여 감히 정서장군께 무례를 범했나이다! 부디 소장의 목숨을 살리시어 크신 은혜와 밝으신 덕을 베풀어 정서장군의 하해와 같은 은총이 구주를 뒤덮게 하시옵소서!”
왕승은 알고 있는 어휘를 총동원하여 마등에게 살려줄 것을 청했다. 마등은 왕승의 하찮은 사람됨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대는 내 목이 왜 필요했던가?”
“목이 필요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소장은 그저 정서장군께서 군사를 조금 물려 주시기를 바랐을 뿐이오며,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소장을 배후 조종한 풍익의 부호 팽가가 사주한 것으로서, 팽가는 표기장군 곽사의 처남인데, 하여튼 팽가가 나쁘고 소장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오며, 그리고…….”
왕승의 횡설수설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작년에 동탁이 죽고 이각과 곽사가 정권을 잡았다. 이들은 마등을 회유하기 위해 정서장군이라는 큰 관직을 주었다. 마등과 대단한 친분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마등이 가진 군사력과 명망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마등이 식량난으로 풍익까지 와서 식량을 구하게 됐는데, 마침 풍익은 곽사의 처남 팽가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원흉은 팽가의 누이이자 곽사의 처인 팽씨였다. 평소 마등을 탐탁지 않게 보던 그녀가 이 기회에 마등을 제거하라고 오라비 팽가에게 사주한 것이다.
마초는 곽사의 처 팽씨의 이름을 듣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곽사의 처라면, 훗날 이각이 곽사에게 첩을 줄 것을 경계하여 이각이 보낸 음식에 독이 든 것처럼 꾸며서 둘의 사이를 틀어지게 만든 여인이 아닌가? 자기 마음대로 정서장군인 아버지를 제거하려고 했다니 결단력 하나는 대단하다만 참으로 생각이 짧은 자로구나.’
팽가의 수하들이 마음대로 마등을 제거하려다 실패했으니 곽사도 큰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될 것이다.
마등은 팔짱을 낀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별안간 병사들을 불러 왕승의 포박을 풀어 주게 하며 말했다.
“그대는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이니 죽이지 않겠다. 말을 내어 줄 테니 날이 밝으면 둔영을 떠나 돌아가도록 하라.”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정서장군의 크신 은혜에 그저 감복 또 감복할 따름이옵니다.”
“그리고.”
마등은 은근한 웃음을 띠고 왕승을 가까이 불렀다.
“그… 팽 대인이라는 분께서 나를 조금 오해하셨나 보네. 곽 장군은 서량 최고의 영웅이라 나 또한 곽 장군을 흠모한 지 오래네. 곽 장군께서 나를 불편해하실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곽사의 무용은 서량 전역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의 포악한 성품 또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마등과는 대놓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마등은 그런 내색을 감춘 채 팽가를 통해 곽사에게 줄을 대려는 지역 군벌을 연기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팽 대인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늦었네. 이틀 후 팽 대인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테니, 자네가 먼저 팽가장에 가서 팽 대인께 잘 말씀드리게. 서로 간의 오해를 풀고 앞으로는 잘 지내보자고 말이야.”
“아이고, 망극하옵니다, 장군!”
죽은 줄 알았던 목숨이 살아나게 되자 왕승의 얼굴이 환해졌다. 연신 머리가 땅에 닿도록 깊게 절을 했다.
왕승이 나간 뒤, 마등은 마초를 보며 물었다.
“맹기, 내가 어째서 저자를 살려 준 것 같으냐?”
마초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보리가 팽가장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정확하게 봤다. 팽가가 우리를 제거하려다 실패했으니 그걸 빌미로 군량을 얻어 낼 셈이다.”
“그러려면 저자를 살려 두는 게 낫지요. 우리가 저자를 죽여 버리면 팽가도 전면전을 준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돌려보냈으니 팽가는 우리가 진짜 협상하려는 줄 알고 자리를 준비할 것입니다.”
“그래. 나는 이번 일을 묻어 두는 대가로 보리 1만 석을 요구할 것이다. 만약 거절한다면…….”
“거절할 수 없을 겁니다.”
죽는 것보다는 보리 1만 석을 내놓는 게 나을 테니까.
마등과 마초는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