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패륜아 (2)
“맹기. 일어나, 맹기!”
“음, 영명이냐? 난 아프니까 좀 더 자게 내버려… 응???”
응?
마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이 물 밖으로 튀어나온 새우처럼 탄력 있게 움직였다. 배의 탄력만으로 침상에서 튕기듯 일어나서 땅에 두 발을 딛고 섰다.
“으응?”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지만, 이제 마흔일곱 살의 중년이고 오랜 전투로 병든 몸이다. 이렇게 몸이 가볍게 움직일 리 없다.
마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늘씬한 몸이었다. 허리둘레가 티 나게 줄어 있었다. 이런 몸은 마치…….
“스무 살 먹은 애송이 같잖아?”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마초는 자신을 깨운 사람을 돌아보았다.
짧은 턱수염을 기른 20대의 청년이었다. 중간 정도의 키에 어깨가 유독 넓은 근육질의 사내였다.
방덕, 자는 영명.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전장을 함께한 마초의 동료였다. 마초가 서량군의 맹주가 되기 전까지는 친구로 지내던 사이였다.
마초는 미간을 찡그리며 방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진짜 영명과 똑같이 생겼군. 하긴 꿈이니까 당연한가?”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
“그래, 가끔은 이런 꿈도 나쁘지 않지.”
마초는 피식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자동의 표기장군부가 아니라 작은 군막.
군막 한켠에 간소한 침상이 있고, 그 옆에는 잘 정돈된 갑주와 마구, 말 위에서 사용하는 긴 창과 휘어진 칼, 활과 화살통이 걸려 있었다. 다시 그 옆에는 말 마(馬)자가 새겨진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깃발의 아래쪽에는 ‘정서장군부 기도위 마초’라고 씌어 있었다.
‘이곳은 아버님이 이끄는 마가군의 군막. 정서장군부의 기도위라면 내가 20세에 처음 임관했을 때 받은 관직이다. 벌써 30년쯤 지난 일이 아닌가?’
군막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동이 터 오는 아침이었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까지 눈에 익숙하던 촉한의 군복이 아니라 제멋대로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마가군이었다.
마가군은 천수군의 관군, 양주 자사 경비의 폭정에 저항해서 들고 일어난 반란군, 관중에서 넘어온 유랑민들, 인근의 이민족들이 마등을 중심으로 세력화된 군대였다.
세간에서는 마등을 서량의 효웅이라 불렀지만, 실상은 한동안 통일된 복장조차 갖추지 못한 가난한 지방 군벌일 뿐이었다. 마초의 기억 속에 있는 30년 전의 마가군 모습 그대로였다.
군막 근처에 물통이 있었다. 달려가서 자신의 얼굴을 물 위에 비춰 보았다.
수면 위에 낯설면서도 또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20세 전후로 보이는 영준한 청년이었다. 우뚝하게 솟은 콧날과 여인처럼 흰 피부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사나워 보이는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자신감과 오만함이 드러났다. 이민족의 혈통이 섞여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보면 푸른 빛이 엷게 떠올랐다.
젊은 시절의 마초 자신이었다.
“어, 잘생겼다.”
마초는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젊은 시절의 자신의 얼굴을 감상했다. 세상의 모든 미남자들이 그렇듯이 그 또한 자신의 외모가 뛰어난 것을 정확히 알고 적당히 그 사실에 도취해 있었다.
그때 주위에서 번을 서던 병사들이 마초에게 다가왔다.
“도위, 이제 정신을 차리셨소?”
“역시 젊으니까 열병을 심하게 앓아도 금방 털고 일어나시는구먼.”
“꽃다운 나이에 열병 따위로 죽으면 안 되지. 아직 장가도 못 가셨는데.”
“지난밤에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길래 도위가 빨리 일어나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효험이 있었나 보오.”
마초는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기도위로 부임한 직후, 진중에서 열병에 걸려서 잠시 동안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다. 분명히 마초가 스무 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초평 4년(193년)인가. 동탁은 죽었고, 이각과 곽사가 조정을 장악하고 패악질을 부리고 있을 시기다. 이때 아버지를 달래기 위해 정서장군의 관직을 주었지.’
정서장군은 수도의 서쪽에서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사령관이다. 원래 서량의 군관에 지나지 않던 마등과는 어울리지 않는 높은 직위였으나, 지금은 힘이 곧 관직이 되는 난세였다.
그러나 수장의 관직이 높은 것과는 별개로 마가군의 살림은 어려웠다. 정서장군에게 책정된 2천 석의 녹봉은 지급되지 않았다. 조정이 세곡을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등은 다른 군벌들이 그렇듯이 무정부 상태가 된 천수와 부풍 인근의 치안을 유지하는 대가로 인근 군현의 태수와 현령들이 조정에 납부할 세곡을 대신 거두어들였다. 그것으로 군대를 유지하는 재원을 삼았으나 양식은 매번 넉넉지 않았다. 지금처럼 흉년이라도 들면 더욱 그러했다.
“그나저나 되게 현실적인 꿈이네. 30년 전 일이면 나도 가물가물한데.”
마초가 중얼거리자 뒤따라온 방덕이 측은한 듯한 눈으로 마초를 바라보았다.
“맹기(마초의 자), 열병이 들었다더니 머리가 크게 상했나 보구나. 괜찮다, 푹 쉬면 나아질 거야.”
“영명(방덕의 자), 꿈에서라도 다시 봐서 반가웠다.”
마초는 방덕을 보며 슬픈 웃음을 지었다.
“잠깐이라도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나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곧 따라가마.”
마초는 꿈속의 방덕에게 그렇게 작별을 고하고 곁에 있는 군졸의 칼을 빼앗아 뽑아 들었다.
피를 보면 그 즉시 꿈에서 깬다. 천 번이 넘는 악몽과 가위눌림 속에서 터득한 마초의 비법이었다.
“자, 그러면 모두들…….”
마초는 쓸쓸한 미소를 남기고 팔뚝에 칼을 찔러 넣었다. 이제 아픔이 느껴질 새도 없이 꿈에서 깨어날 것이다.
푹!
“으억?”
칼로 찌른 팔뚝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마초는 아픔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아니, 잠깐. 이럴 리가 없는데?”
“뭐하냐, 실성했냐?”
“도위, 드디어 미친 거요?”
방덕과 군졸들이 화들짝 놀라며 마초를 군막으로 옮기고 붕대를 감았다. 그들은 마초가 열병 때문에 잠시 정신이 오락가락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방덕과 군졸들이 나간 후 마초는 다시 한번 잠을 청했다.
잠시 동안 눈을 붙인 후 일어난 곳은 여전히 마가군의 군막.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은 꿈이 아니다.’
마초는 그제야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 유성을 보면서 다시 한번 살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근 30년의 시간을 거슬러 20세 무렵으로 돌아온 듯했다. 부하들의 말에 의하면 마초가 시간을 거슬러 눈을 뜨기 직전에도 유성이 떨어졌다고 했다.
마초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익주의 습한 공기가 아니라 서량의 건조한 공기가 폐부에 들어왔다.
“나는 정말로 30년의 시간을 거슬러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얻은 것인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지금은 피비린내 나는 군웅할거의 시대가 막 열린 시점이다. 지금부터 마초의 수명이 다하는 30년 후까지, 천하는 셋으로 나뉘고 싸움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이 30년 동안 과거의 자신은 무엇을 했었던가?
‘나는 계속 싸웠다. 이각, 곽원, 백파적, 서량의 군웅들, 이민족들, 그리고 조조와…….’
마초는 싸움을 하면 대개 이겼으나, 인생에서 가장 큰 싸움이었던 조조와의 대결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먼저 죽고, 뒤이어 아내와 자식들이 죽었다.
유비에게 귀부하고 나서 십 년. 마초는 매일 밤 지난날을 후회했다. 시간을 되돌려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마초는 군막 한켠에서 자신의 칼을 집어서 뽑아 들었다. 5척(약 115cm) 길이의 장도였다. 마상에서 쓰기 적합하도록 살짝 휘어져 있었다.
“이제 다시는 가족을 잃지 않으리라! 다시는 패륜아라는 오명을 쓰지 않으리라! 다시는… 어떤 싸움에서도 지지 않으리라!”
마초는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5척 장도는 마치 마초의 마음을 아는 듯 잘 연마된 도신에서 빛을 뿜었다.
어떻게 30년의 시간을 거슬러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주어진 기회를 제대로 살리는 일이다.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가족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마초가 장도의 푸른 날을 보면서 다짐할 때, 인기척도 없이 군막을 열어젖히고 방덕이 들어왔다.
“맹기, 칼이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나?”
마초는 칼을 내려놓고 방덕을 와락 끌어안았다.
“영명… 정말 영명인가?”
“갑자기 왜 이래? 열이 내렸다길래 찾아왔더니 머리가 좀 이상해졌나?”
“영명… 이제는 너를 잃지 않겠다. 네가 조조군에 투항하게 만들지 않겠다. 관우에게 목숨을 잃게 하지도 않겠다.”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야? 조조라면 그 서원팔교위의 조조? 그리고 관우는 누구냐?”
마초는 방덕과 군막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앞으로 30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선택을 했으며, 천하의 정세는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말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방덕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그래서, 네 말대로라면 중원을 그 조조가 차지했고, 우리는 그에 맞서서 거병했고, 조조에게 패했다.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마등 장군께서는 우리의 거병 때문에 처형당하셨다. 우리는 한중으로 피신했는데, 너는 혼자서 촉 땅의 유비라는 사람에게 의탁했고, 나는 살아남은 병사들과 함께 조조군에 투항했다. 나는 조조의 휘하에서 유비의 아우 관우라는 사람과 싸우다 죽고, 너는 촉에서 몇 차례의 전투에 종군한 후 기력이 다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이런 얘기인가?”
“대강 요약하자면 그렇다.”
“하하, 꼭 도가(道家)쟁이들 같은 말을 하는구나. 꿈속에 나비가 됐는데,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알 수가 없다 뭐 그런 얘기 있잖아.”
“당장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나조차도 믿기 힘든 이야기니까. 중요한 건 이게 다 내가 겪은 일이라는 거고, 나는 이제부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살 생각이다. 더 이상 아무도 잃지 않도록…….”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헛것이 보인다더니, 이번에 열병을 단단히 앓기는 한 모양이구나. 어쨌든 철이 좀 든 것 같으니 다행이다.”
방덕은 마초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짧은 턱수염이 따라서 움직였다.
“맹기, 너는 안 그런 척하더니 평소에 고민이 많았구나. 그러니까 그런 꿈을 다 꾸지.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어릴 적부터 너를 봐 왔지만, 네가 정이 좀 없기는 해도 그런 패륜아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추호도 없다. 게다가 패륜을 했으면 싸움이라도 잘해야지, 결국 조조한테도 지고, 그 유비라는 사람 휘하에서는 별 활약도 못 하고 죽었다는 거잖아? 설마 네가 그렇게까지 한심하게 살겠냐? 미래에 대한 걱정이 지나쳐서 꿈을 꾼 게다.”
‘아니 이 자식이…….’
방덕은 위로인지 뭔지 모를 말을 하면서 마초를 안심시키려 했다.
중평 연간(184년~189년), 서량에는 전쟁고아가 흔했다. 방덕도 그런 전쟁고아 중 하나였다. 서량의 군관이었던 마등은 어린 방덕을 거두어 무예를 가르치고 자신을 보좌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마초와는 자연스럽게 동문 사형제이자 친구처럼 자라게 된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를 뵈어야겠다. 아버지께서는 어디 계신가?”
“꿈과 현실이 뒤섞여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정서장군께서는 양식을 구하러 풍익에 가 계시지 않느냐? ”
“풍익… 그래, 분명히 이때쯤 흉년이 들어서 풍익에 가신 적이 있었다.”
순간 마초의 머리에 오래전 기억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초평 4년(193년), 이 해에는 서량 전 지역에 흉년이 들었다. 여름 보리가 거의 걷히지 않을 것으로 보이자 마등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둔영을 옮겼다. 목적지는 풍익군 지양현. 황도 장안의 바로 옆에 위치한 비옥한 땅이었다.
그리고 이때, 가벼운 차림으로 진영을 나섰다 왕승이라는 장수에게 기습을 당한다.
‘아버지는 화살을 몇 대나 맞은 채 간신히 돌아오셨다. 군량을 구하지 못해 힘겹게 이 해 겨울을 났었지.’
군량을 구하러 간 마등이 곧 위험에 처할 것이다. 지금은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마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영명, 아버지가 위험하다. 이제 곧 아버지는 왕승이라는 자에게 습격을 당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드실 것이다. 빨리 달려가서 구해야 한다.”
“맹기, 정서장군이 내리신 영은 이곳에서 둔영을 지키라는 것이다. 지금 네가 하는 말은 군령을 어기는 것이다. 장군의 성품을 잘 알지 않는가? 혈육이라고 군령 위반을 적당히 넘어가실 분이 아니다.”
“영명. 도와주게.”
방덕은 마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마초를 쳐다보던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알았다. 하지만 우리만이다.”
“우리만으로 충분하다.”
마초는 방덕의 말을 들으면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눌러 참았다.
‘영명은 군령을 가볍게 여기는 자가 아니다. 그저 우정을 더 무겁게 여길 뿐.’
마초와 방덕이 이끄는 부곡을 합치면 200명 정도였다. 기병만 뽑으면 80기 정도일 것이다.
서량 최대의 군벌이던 마등도 왕승의 습격으로 인해 위험에 처했었다. 고작 80기의 병력으로 왕승을 당해낼 수 있을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상관없다. 나는 이제 절대로 지지 않는다.’
마초의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마초는 휘하의 부곡 중 기병 30기를 소집했다. 방덕이 50기를 데리고 합류했다. 아직 해는 중천에 걸려 있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달리면 사흘 뒤에 마등이 있는 풍익군 지양현에 닿을 수 있다.
“아버지, 부디 제가 갈 때까지 무사하십시오.”
서량병 80기가 동쪽으로 말을 달렸다. 선두에서 대열을 이끄는 마초의 얼굴에는 가족을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가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