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은 만능 빌런 94화 - 리디북스
“일! 일합시다!!”
“아니 일하는 건 좋은데 왜 아시아 본부 관련 서류를 들고 온 거야?”
“그딴 건 됐으니까 빨리요!”
“으음... 차빈이를 도우러 가고 싶다만...”
[전지(全知)]의 부작용에 의해 한동안 부지런해진 유자혁을 가만히 놔줄 수 없다는 듯이 각종 서류를 꺼내 그의 앞에 늘여놓은 레나가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정인태가 저지른 일은 총대장의 딸, 유차빈에게 맡겨놓으면 돼! 지금은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사실 눈앞에 있는 문제는 수도 없이 많았다.
가디언 코리아의 본사가 무너진 초유의 사태.
그것도 외부의 공격이 아닌 지사장인 정인태가 미쳐 날뛰며 일어난 일이었기에 지금 가디언 코리아는 그야말로 개판인 상황.
“자자, 차빈 씨를 돕는 건 여기 있는 서류들을 처리하고 나서도 늦지 않아요.”
“에휴. 알았다 알았어.”
다만, 레나에게는 아시아 본부의 미뤄져 있는 서류가 먼저일 뿐이었다.
* * *
“아악!! 아버지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레나가 유자혁을 붙잡고 있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가디언 코리아를 어떻게든 안정화하기 위해 노력 중인 유차빈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여기는 누락, 저기는 조작! 지사장 직인이 찍힌 건 멀쩡한 게 없네!”
횡령은 기본, 고의로 누락한 자료에, 조작이 만연한 기록들을 앞에 둔 유차빈의 입장에서는 그냥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다.
“비서... 아니, 임시 지사장님!”
“뭔가요?”
그 와중에 이미지 관리는 해야겠다 싶었는지 G.K의 직원이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순식간에 머리를 정리하고 미소를 짓는 유차빈이었다.
“우석훈 대통령이 오셨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정인태가 유자혁의 손에 명을 달리하고 상황이 정리된 지 이미 수 시간.
벌써 찾아왔어야 할 정부의 인사가 생각보다 늦는 것에 대해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던 찰나였지만, 설마 대통령이 직접 올 줄은 몰랐던 터라 유차빈은 살짝 당황했다.
“어디 계시죠?”
“전투 현장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알겠어요. 가서 일 보세요.”
“넵!”
정인태가 폭주함에 따라 민간인 수십이 죽거나 다치고, 도로, 건물을 따지지 않고 파괴된 물적 피해만 추정 수백억 원.
당연히 정부는 G.K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상황.
“하아, 이번 기회에 G.K를 해체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네.”
이럴 때야말로 아시아 통괄 무력대를 맡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 유자혁이 필요할 때건만.
“대체 어딜 가서 안 보이는 거야...”
어느새 쏙 하고 사라져버린 유자혁을 생각하며 유차빈이 이를 갈았다.
“진짜 나중에 보자...!”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통령에게 향했다.
* * *
“으으음...”
복부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고통에 신음한 이렐라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드디어 일어났군.”
“...?”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검은 악마의 모습에 눈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하... 잡혀버렸네?”
아무것도 없는 그저 사각형의 방. 그리고 벽면에 구속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
“내 목에 이건 봉인구야?”
“그래.”
그리고 목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봉인구의 무게에 이렐라인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나를 죽이지 않고 이렇게 변태처럼 구속해놓은 이유가 뭔데? 헉!? 설마 몸이 목적인 거야!? 이런 변태!”
“...하아.”
“재미없었어? 히히히.”
장난스러운 이렐라인의 목소리에 진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분이라는 자에 대해 말할 생각은 있나?”
“있겠어?”
“그렇겠지.”
진우는 뻔뻔한 이렐라인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뭐야 고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런 취미는 없다.”
“에이, 어울려줄 생각도 있는데? 한번 해보지 그래?”
“고문을 해줬으면 하는 태도군.”
“그것도 재밌을 것 같아서 말이야~”
“쯧.”
뻔뻔함을 넘어서 뭔가가 결여된 듯한 이렐라인의 모습에 진우는 등을 돌렸다.
“응? 뭐야? 진짜로 그냥 가?”
“...”
대답해줄 이유가 없었기에 진우는 독방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진짜 가네?”
독방에 홀로 남은 이렐라인이 뭔가 아쉽다는 식으로 입술을 삐죽이고는 눈을 감으며 마력에 집중했다.
“...역시 마력은 안 움직이나...”
감옥섬의 봉인구와 같은 방식의 마력 흡수식 봉인구.
그것을 최유나가 개량한 것이기에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마력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렐라인이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봤다.
“제이든은... 나를 찾기보다는 그분의 그림을 따라 움직이겠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중얼거리던 이렐라인이 에효, 하며 한숨을 쉬었다.
“뭐 한동안은 여기서 쉬도록 할까? 그동안 피곤하기도 했고.”
그리고 다시 눈을 감은 이렐라인은 태평하게 잠이 들었다.
* * *
독방에 설치된 카메라와 마이크의 감도를 수정한 천예성이 카메라 속, 잠든 이렐라인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잡혀 온 사람의 태도가 아니군요.”
“미쳤거나 믿는 구석이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개인적으로는 전자에 조금 더 비중을 두고 있는 진우였다.
“아무튼 조직원들이랑 잘 나눠서 감시해. 내일 다시 올게.”
“네, 걱정 마세요. 보스.”
믿음직스럽게 말하는 천예성의 대답에 진우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 위로 올라갔다.
“유자혁이 정인태를 죽였다고?”
“그렇네. 완전히 작살을 내놨더군.”
위로 올라와 천무진이 내미는 태블릿을 받아 사진을 확인했다.
“...확실히. 어지간히 강해졌었나 보군.”
“음. 유자혁은 웬만하면 사람을 죽이지 않으니.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겠지.”
수십 개의 창에 전신이 꿰여 죽은 정인태의 사진을 본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천무진에게 태블릿을 넘겼다.
“최유나한테 대충 설명하면서 사진도 같이 보내줘.”
“음... 좋아하진 않겠지?”
“아마도. 그래도 아쉬워하는 정도일 거야.”
“일단 보내놓도록 하지.”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천무진과 헤어져 본부를 걷던 진우가 슬쩍 자신의 옷을 살폈다.
“음... 조금 더러운가?”
태풍에 비견될 만한 바람 앞에 서 있었던 걸 생각하면 양호한 편이지만, 조금 찢어지고 먼지가 묻고 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갈아입고 가는 편이 좋겠네.”
누가 봐도 나 격한 전투를 치르고 왔소. 라는 티가 팍팍 났기에 진우는 일단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그렇게 진우가 자신과 이은선, 지은이가 함께 쓰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오자.
“...”
<나쁘지 않은 곳이군.>
진우의 방문 앞에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누구냐.”
<음? 오, 이런 그대가 나에게 누구냐고 묻는 것이냐?>
“그럼 또 누가 있지?”
<하하하, 그도 그렇군.>
검은 연기가 뭉쳐 있는 듯한 모습, 얼굴은커녕 표정도 없이 일렁거리는 그림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렇지, 나는 구원자다.>
“...구원교의 교주셨군.”
<오, 아니아니, 나는 교주가 아니야. 그저 구원자일 뿐.>
그림자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해석안]을 사용한 진우였지만, [해석안]은 눈앞에 그림자가 그저 ‘진짜’ 그림자라 알려올 뿐 그가 누구인지는 꿰뚫어 보지 못했다.
<사실 아직 자네를 찾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아직? 언젠가는 찾아올 생각이었다는 거군.”
<그렇지. 다만 자네가 내 인형을 가져가 버렸으니 어쩔 수 있나.>
“인형?”
인형이라는 말에 진우가 반사적으로 이렐라인을 떠올렸다.
<나름 공을 들여 만들어낸 인형이라 말이지. 요즘 말로 애착인형이라고 하던가?>
“...만들었다라...”
역시 이렐라인은 초능력 이식, 혹은 그에 준하는 방법으로 개조되었던 것이라 생각하며 진우가 은밀하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오. 이런이런. 자네와는 싸우지 않을 것이네.>
“!?”
그리고 그림자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고, 진우가 끌어올린 마력이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무슨!?”
<하하하, 그냥 돌려달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게.>
“...”
다른 이의 마력에 조짐도 없이 간섭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진우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냥이 아니라면 뭘 대가로 넘길 거지?”
<후후후, 역시 받아들이는 것이 빠르군. 내가 그래서 자네를 좋아하지.>
“헛소리는 그만하고 용건이나 말해라.”
본부에 가득한 카메라를 생각하면 이미 천무진, 혹은 다른 이들이 왔어야 함에도 아무런 소란도 일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또한 무슨 조치를 취했으리라 판단했다.
<그래그래.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대화를 나눴으면 하지만, 아직은 그런 사이가 아니니 어쩔 수 없겠지.>
“아직...?”
마치 나중에는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사이가 될 것이라 확신하는 말투에 진우가 의문을 가졌다.
<인형을 돌려받는 대신 자네의 질문 한 가지를 대답해 주지.>
“...그게 대가라고?”
<자네에게 있어 이만한 대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네만?>
“...”
그림자의 말대로였다.
진우는 이렐라인의 태도에 그녀에게 무슨 정보를 얻는 것을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넘겨주는 것으로 한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확실히 이득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라고 어떻게 믿지?”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그림자의 말대로 행동할 이유는 없었다.
<음... 그도 그렇군. 나에게는 [해석안]이 통하지 않을 테니 내가 진실로 답한다 한들 믿을 수 없겠군.>
“?!”
[해석안]이 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그림자의 말에 진우는 살짝 놀랐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지 않나? 나는 조용히 인형을 가지고 갈 수 있음에도 이렇게 자네를 찾아왔네. 내가 답하는 것을 믿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
진우가 거절한다면 조용히 이렐라인을 데리고 가면 끝이라는 말투에 진우가 입을 다물었다.
“후우우... 제안을 받아들이지.”
결국 진우의 선택권은 그림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었다.
<하하하. 잘 생각했네.>
자신과‘는’ 싸우지 않는다. 라는 말은 다른 이라면 상관없다는 말과 같았기에 섣불리 행동할 수 없기도 하고 말이다.
<자. 무엇이든 질문하게. 성심성의껏 진실로서 답해 주겠네.>
“......”
그림자의 말에 진우가 고민에 빠졌다.
‘정체를 물어볼까? 아니야, 이자의 정체를 안다 한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애초에 내가 모르는 자일 가능성도 있다.’
‘구원교의 목적? 뻔하지, 물어보느니만 못하다.’
‘신명하와 정인태가 사용한 약물? 알아봤자 쓸데가 없다.’
‘약물을 만들어낸 목적? 만들어내는 방법?’
‘앞으로의 계획?’
‘나를 공격하지 않는 이유?’
‘마력에 간섭하는 힘의 정체?’
수없이 많은 생각이 진우의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그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머리에 피가 쏠려 열이 나기 시작할 때쯤.
“후우우...”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교주.”
<음?>
“넌 구원교의 교주가 아니라고 했지.”
진우는 황금의 눈을 번쩍이며 물었다.
“구원교의 교주가 누구냐.”
<......>
그리고 그림자가 찢어지며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기껏 물어본다는 게 그건가?>
“...대답이나 해라.”
<하하하하! 유쾌하군! 아주! 유쾌해!!>
쿠구구궁!
그림자가 폭소하는 것에 맞춰 이클립스 본부의 마력이 흔들려댔다.
‘이 무슨...!’
그건 이 일대의 마력을 전부 통제하고 있었다는 말이기에 진우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다.
<아! 이런이런. 너무나 유쾌하여 제어를 놔버렸군.>
“...질문에 대한 답은?”
<하하하. 두려움이 가득함에도 기세는 꺾이지 않는구나 정말로... 부럽도다.>
“...뭐?”
뜬금없는 그림자의 말에 진우가 의문을 표하려는 찰나.
그림자가 진우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시작했다.
<구원교에는 교주가 없다.>
“...그걸 믿...”
<허나 곧 생겨날 테지.>
“곧...?”
<교주 후보는 둘. 둘 중 누가 될지 나는 모르겠군.>
그림자의 입이 길게 찢어지며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었다.
<이걸로 답이 되었으려나?>